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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 무너뜨리기 - 세상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의 교묘한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 해체하는 법
캐럴 길리건.나오미 스나이더 지음, 이경미 옮김 / 심플라이프 / 201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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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
무너뜨리기>는 페미니스트이자 심리학계의 거장 ‘캐럴 길리건’과 인권 변호사이자 뉴욕대학교 연구원인 ‘나오미 스나이더’의 공저로 심플라이프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가부장제에 관한 기존의 논의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랑, 이별, 상실, 배신의 순간 우리가 어떻게 가부장제 안으로 편입되는지, 견디기 힘든 고통에 시달릴 때 가부장제가 우리의 심리를 어떻게 통제,
보호하는지 파헤친다. 기존의 논의가 가부장제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경제적 이득 같은 외적인 동인에 주목했다면 <가부장 무너뜨리기>는 불안의 감소, 고통의 경감 같은 내적인 동인에 초점을 맞춘다.
파트 1에서는 가부장제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파트 2에서는 가부장제와 결별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밝히고 있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 문화라고 보고
있으며 일종의 프레임 혹은 렌즈라고 아래 세 가지로 정의한다.인간의 능력을 ‘남성적’또는 ‘여성적’이라고 보고 남성적인 것을 우월하다고 규정한다.일부
남성이 다른 남성들보다 우위에 있지만 모든 남성은 모든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남성은 자아를 갖춘 반면 여성은 자아가 없고 대신 남성의 욕구를 은밀하게 보살피는 관계에 속한다고
강요하며 자아와 관계를 분리시킨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어떤 분열이 생기려하면 이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가부장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부장제는 권력과 지위로 이루어진 위계질서를
공고하게 해야 하고 이를 유지하려면 관례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부장제의 작동방식이 지속가능하게 하는
이유이다.
다음 대화를 한 번 보자.
여자 : 우리 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어요. 지난주에는 만나지도 못했잖아요.
남자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여자 : 만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당신은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남자 : 당신 입에는 늘 불만이 걸려 있어.
여자 : 정말,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러니까...
남자 : 이봐,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잖아. 모든 걸 다 당신 말대로 할 수는 없다고.
(침묵)
남자 : 원하는 게 있어?
여자 : 신경 쓰지 말아요.
관계를 복원시키려고 하는 여자의 태도를 모르는 척 하다가 얼버무리려하는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거나 직접 경험한 유사한 예도 있을 것이다.
보통 이런 류의 대화를 그저 남녀의 차이,
대화기술의 차이의 예로 사용하거나 까탈스런 여자 vs
단순,무심한 남자라는 유머코드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가부장제의
압력에 못 이겨관계
복원 능력을 포기함과 동시에 거리 두기로 접어든다는 뜻이라고 했다.이처럼 관계의 상실을 강요하고 그 상실을 회복 불능인 양 몰아가는 과정을 통해
가부장제가 지속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가부장제는
어디서부터 그 근원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고 공고하다.
의식 깊이
파고들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방식에 개입하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히 알아채기 어렵다.
설령 알아챈다 하더라도 올바른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파트1에서는 젠더 이분법과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떤 피해를
입혀왔는지,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이득을 얻으며 어떻게 가부장제의 조력자로 살아왔는지 명확하게
알려준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유령’처럼 존재하는 가부장제의 실체를 목도할 수 있게 돕는다.
p. 58~59
사랑의 희생, 사랑의 포기는 가부장제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것은 위계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도록 길을 닦습니다. 가부장제는 다른 남성보다 일부 남성이 더 큰 특혜를 받으며 사는 질서이자 모든 남성이 여성보다 더 큰
혜택을 받는 구조입니다. 가부장제 정치학은 지배의 정치학이지요. 민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불평등을 합리화하고 억압으로 보이는 것에 눈감게 하는
정치학입니다. 가령 밑바닥 계층이 납작 엎드리는 것,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 상위 계층이 내리는 처분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 같은 상황을 외면하지요.
제도로서의 가부장제와 그것의 가치가 지속되는 원리는 가부장제의 정치적 힘
외에도 심리적 힘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p. 68
소년에게는 앎을, 소녀에게는 돌봄을 배당하는 젠더 이분법을 내면화하면 일부 소녀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실로 알지 못하게
되고 일부 소년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염려하고 돌보려는 사람이나 상황에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관계 맺음에서 침묵이라는 여성스러움으로 혹은 거리 두기라는 남성스러움으로 전환하는 것이 위계질서를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보니 상위 계층에 있는 이들은 공감 능력을 잃어야 하고 하위 계층에 있는 이들은 자기주장 능력을 상실해야
합니다. 앎과 돌봄은 정치적 저항에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이 두가지 덕목은, 특히 지성(앎)과 감정(돌봄)을 분리함으로써 남성이든 여성이든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성별에 따라 제한적인
행동지침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가치입니다.
파트2에서는 가부장제와 결별하는 사람들의 행보를 조명한다.
2017년 갈등, 폭력,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한 여성들이 모여 유대 사막을 행진한 ‘평화로 가는 여정’을 좇아가며 분열을 조장하는 적대를 넘어 우리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증명한다. 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사건 이후 시작된 미투 운동을 재조명하며 우리가 서로서로 공명해야 하는
이유, 가부장제의 압력에 의해 숨겨왔던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드러내야 하는 이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으며 가부장제에 맞서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p.193
역설적이게도 갈등이 없고 서로의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그것이 가부장제의 특징입니다. 가부장제에서 아버지의 목소리에 문제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체주의 정권은 어떤 반대의 목소리도 응답하지 않으므로 재빨리 침묵 속으로
들어가지요. 반면 민주주의는 갈등과 의견 충돌에 열려 있어야 꽃이 핍니다.
우리는 그동안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갈등을 불편해하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가부장제가 내면화된 것이었다. 위 인용처럼 의견이 충돌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사회가 민주주의이고 가부장제와 결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에 저자 캐럴 길리건은 이렇게 말한다.
“가부장제를 굳건하게 지키는 기제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깨달은 것이 성과입니다.
시계가 작동하는
듯합니다.
민주주의와 사랑이 가는 길에
분열이 생기고 그 상처를 회복하려는 어떤 움직임이 보일 때마다 가부장제는 정확하게 수치심을 건드립니다.
가부장제는 회복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심장을 공격합니다.
그 능력은 우리가 경험한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고 관계를 잃었을 때 발생하는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민주주의와
가부장제가 엇갈리는 위험한 교차로에서 어느 쪽 길로 갈 것인지를 묻는다.
책의 원제를
직역하면, ‘왜 가부장제가 지속되는가?’이다. 내용은 제목에 대한 고찰로 맞다고 생각하지만 의역한 제목 <가부장 무너뜨리기>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본다. 어떻게 가부장제가 지속되어오고 있는지 책 내용을 인용하며 공감했다.
남자들도 남성다움을 의식하지 못한 채 학습했고,
여자들은 여성다움이 생존에 적합한 것으로 길들여져왔다.
세상이 급변하고 한국사회에서도 페미니즘을 큰소리로 드러내는 사회가 되었지만
가부장제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속에 숨겨져 있고 지배당하고 있는 것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통해 의식하지 못했던
것까지 확인하게 된 것이 독자로서 수확이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가부장 무너뜨리기>라는 제목에 어울릴만한 해법이 속시원하게 제시되지 못한 점이다.
제목에 낚인 느낌이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은 뭘까? 책과 연결하자면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약자가 홀대받지 않는 사회, 평준화와 일반화가 아닌 개개인의 개성대로 살 수 있는 사회,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개진할 수 있는 사회, 갈등을 모른 척하거나 무마하려하지 않고 드러내 싸울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