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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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에 있다. 기쁨은 두려움에 대면할 수 있도록 삶이 제공하는 몇 웅큼의 에너지일 뿐..."

 

 

 모순적인 저 문장이 이 소설에서 밑줄 그어두었던 여러 문장들 중 가장 와닿았다. 소설가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소설에서 주제의식으로 드러낸다. 그 주제가 독자에게 오롯이 가닿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자의 경우 자신의 배경지식이나 책을 읽을 당시 처한 상황에 따라 소설에서 느끼는 감동이 다를 수밖에 없다.

  최수철 작가의 장편소설 <독의 꽃>은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이 연상된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맞다고 했고 독에 대한 작품을 구상한 것은 10년 전부터였다고 한다. 본격적인 작업을 하기엔 어려웠는데 작가 자신의 고질적 두통을 중심에 두고 가지를 뻗어나가야 겠다고 생각하여 소설 <독의 꽃>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세상에 독이라는 게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그것을 독으로도 혹은 약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그처럼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또한 그것들을 인물과 이야기에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소설을 완성해냈다는 것에 경탄하게 된다. 무려 500쪽이 넘는 분량이다.

  내가 들어본 독이름이라고 해봐야 복어독인 테트로도톡신이나 은행열매의 피리독신 정도이고, 사과씨나 매실에도 어느 정도의 독성물질이 들어있지만 과복용하지 않으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 정도가 독에 대한 얕은 지식이다. 소설에는 백과사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독에 대한 지식들이 많다. 실제 등장인물들은 그것을 적극 활용하여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독을 독으로 물리쳐서 자신의 환증을 고치기도 한다. 언뜻 생각하면 세상에 이런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또 실제 생활에 활용하는 이는 또 얼마나 되겠느냐며 반문할 수도 있겠다. 작가는 왜 그렇게 독에 대해 방대하게 다루었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아마도 스토리를 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등장인물들 모두가 독을 직접적으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실제 독성물질에 관해 많은 정보와 용례가 등장하지만 이것은 소설이므로 분명 은유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을 드러낸 문장들은 이렇다.

"술이란 인간의 몸에 작용하는 독이고, 섹스는 인간 영혼에 작용하는 독이다."

 

"인간속의 불건전한 기운도 차가운 벽과도 같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오그라들어 병이 되고 악이 되고 독이 되는 거야. 때문에 인간이 어떤 폭력을 저지를 때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독이 치밀어올라 그의 행동에 묻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자기 스타일을 갖지 못하는게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제 스타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타일이라는 것 자체가 선택하거나 바깥에서 주어지는게 아니라 태어난 모습 그 자체가 취향이고 스타일이다."

 

 작가는 육체에 직접 작용하는 독으로 전체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궁극적으로 말하고자하는 바는 정신이다. 마음, 정신, 기운 같은 단어들은 결국 영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자신의 내면 세계에 들어있는 것은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으며 그 또한 타고나는 것으로, 작가는 보고 있다. 우리는 보통 외모를 스타일링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작가는 '태어난 모습 그 자체가 취향이고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운명론에 가까운 듯한데 사실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한때 자기계발서식의 사고, 특히나 "하면 된다"식 사고는, 나를 원하는 대로 충분히 스타일링할 수 있다고 여기고 노력도 해봤지만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변하지 않는게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태어난 모습 자체가 취향이고 스타일이라는 말에 실망과 위로를 동시에 받았다. 그러면 독과 해독 부분이 정신에는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

 맨 처음 인용한 문구, "삶의 의미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에 있다!"는 말의 아이러니를 곱씹어 본다. 그동안 내 삶의 의미는 뭘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를 생각할 때 "기쁨"은 자동 완성 단어처럼 한 세트였다. 그런데 아니란다. 기쁨보단 두려움이란다. 토요일에 집에 들인 새끼고양이는 내게 기쁨보단 두려움, 아니 무거움을 안겨주었다. '왜 기쁨이 아닌가?'

'나는 기쁨을 얻으려고 고양이를 데려온 게 아닌가?'

 기존에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취하는 태도를 보니 두려웠다. 내가 쟤들에게 못할 짓을 한 건 아닌지, 새로운 존재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로 인식되어 받는 스트레스는, 받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새로 온 아이의 발랄하고 활달한 행동을 보며 집안 물건에 입힐 상처가 얼마나 될지 두려움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이런 두려움과 걱정보다 새로운 대상이 줄 기쁨만 크게 생각했던 어리석은 자신을 본다. 무거운 마음을 이 문장으로 위로 받는다. 두려움에 대면할 그저 몇 웅큼의 에너지를 더 크게 보는 인간은, 마약처럼 독처럼 그 에너지 그 기쁨을 삶의 의미라 여기며 쫒는다. 결국 우리는 삶의 의미를 기쁨이라 여기는 착각을 착각이 아니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끝나지않는 한 계속되는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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