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 한 번 불리지 않은 아이.
이제 겨우 열아홉의 소년이 집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한다.

 

깜깜하다.
어디로 갈까.
그러나 여기를 떠나기 전 모두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나를 친구로 대해 준 기진이, 성제, 최연, 김수현에게.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희주에게.
귀엽고 따뜻한 달이에게.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한번도 잘해주지 못하고 결국 더 불쌍하게 만들어 버린 엄마에게.
아무리 미워하려고 해도 늘 보고 싶은 누나에게.
다들 미안해.
그리고 안녕.

 

 책을 덮는데 가슴이 아프다.
저렇게 인사를 하고 어디로 갈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여기 밤거리를 달리는 이 구멍은 무엇으로 막아야 할까."이다.
마음에 구멍이 뚫린 이 아이는 어디로 갈까?
아니,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텅빈 구멍이라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박지리작가의 두 번째 소설 <맨홀>을 다시 읽었다. 작년에 <다윈영의 악의 기원>을 다 읽고 뒤통수를 맞은듯 어리어리한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서였을까. 그 땐 감흥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나 마음이 아려온다.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오롯이 당하기만 하는 무기력한 존재인 엄마를 답답해하면서도 소년은, 누나와 모의를 하며 악몽의 시간들을 견뎌냈다. 상상했다. 아버지를 죽이거나 엄마를 죽이거나 아님 누나와 둘이 죽거나. 분란의 중심이 사라지면 평화로울 줄 알았다. 하지만 성격 형성기의 소년에게 치명타를 남긴 아버지의 죽음 뒤에도 폭력의 그림자는 소년의 발뒤꿈치에서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교류도 자연스럽지 못했고 무엇보다 소원해져버린 누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수시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려 노력했고, 겉으로 평온해 보이기 위해 말을 아꼈지만 덜그럭덜그럭거리는 내면의 소리에 괴로워했다.

평범한 일상을 살려고 마음을 잡아가던 중 결국 사건은 터지고야 만다. 친구들과 네팔인을 폭행하다 사망에 이르게 된다. 죽이고 싶도록 혐오했던 아버지를 이용한 변호사의 감정어린 호소로 보호감호만 받게 된다. 다른 친구들은 3년이나 형을 받았는데도... 아버지는 화재 진압하다 순직한 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7주만에 집으로 돌아온 소년을 밖으로 내몬건 엄마였다. 돌아온 날 밤 엄마가 울면서 아들에게 한 말은 이렇다.

 

 "엄마는 니가 무섭다... 내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게,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니 얼굴만 봐도 겁이 나고 무서워."

 

 남편에게 얻어터지면서도 항거 한 번 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보호막이 되어 주지도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였던 엄마가 결국은 아들도 거부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인간의 인격형성에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자식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지 생각했다면 저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엄마 역할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서, 따뜻한 존재가 되어주지도 못해놓고, 최저보호선이라 불리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만들지 못한 엄마가, 아들을 쫓아내다니!!

그래도 소년은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소년은 가정이라는 따뜻한 보금자리 대신 맨홀속에서 안온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곳도 시멘트로 막혀버려서 황량한 밤거리로 내몰린다. 구멍이 되어버린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막막해하며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작가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발밑의 맨홀을 보고 문득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이 무수히 많은 맨홀들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소설은 그 많은 맨홀들 중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편평해 보이는 길위에는 맨홀들이 많다. 그 뚜껑들을 열면 어둡고 아프고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아우성치듯 튀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뚜껑을 꼭 덮어둔 채 아무 일 없는듯 살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신호에 감응할 수 있어야 한다. 맨홀속에 갇힌 이야기들을 꺼내야 한다. 희끄무레한 연기같은 것이 새어 나온다면, 딸막딸막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뚜껑을 열어 그곳의 이야기들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작가가 무수히 많은 맨홀들 중 하나의 이야기를 썼다는 건, 내가 먼저 반응했으니 당신들도 안테나를 좀 세워보라는 뜻일게다. 소설로 반응하는 것은 소설가의 일이니까. 작가의 소설들을 읽을수록 그는 늘 우리에게 주위를 좀 둘러보라고 귓속말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