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집 김씨 사람을 그리다 - 김병종 그림 산문집
김병종 지음 / 너와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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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가물거릴 만큼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에 포수 아저씨가 살았습니다.

야구의 포지션도 아니고 사람 이름도 아닌 정말 엽총을 소지한 사냥꾼이었지요.

얼굴엔 수염이 무성한 털보에 겨울이면 사냥꾼 털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사냥터보다는

동네 점빵에서 막걸리 마시는 모습만 자주 목격할 수 있었던 술꾼 아저씨였지요.

술에 취하면 늘 곰을 잡으러 간다고 큰소리를 뻥뻥치곤 하셨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던 동네는 곰이 출몰하는 지리산 자락 마을이 아닌 바닷가 마을에 가까웠어요.

가끔 동네 아이들이 포수 아저씨가 총 쏘는 걸 구경하겠다며 졸졸 따라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칠집 김씨 사람을 그리다]를 읽으며 왠지 그 시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은 추억으로나 더듬어 볼 수 있는 풍경,

혹은 추억하던 사람조차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떠도는 이야기로 남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입니다.

세상에, 공부도 잘하는데 그림도 잘 그리고 글까지 잘 쓰다니요.

글과 그림을 한데 아울러 표현하는 전방위적 예술가라고 할 수 있네요.

그의 화실이 있는 신림동의 밥집 장부에는 '칠집 김씨'로 통합니다.

미장 이씨, 목수 오씨, 세멘 조씨처럼 누군가는 페인트칠을 하는 김씨라고 생각하게끔

그렇게 써 놓은 장부에 바를 정正자를 그려서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기실 따지고 보면 '칠집 김씨'야말로 제대로 된 나의 직함이 아닌가 싶다.

하루 종일 칠하고 칠하는 사람, 얼마나 아름다운가.

앞으로 보다 철저한 칠집 김씨가 되는 것이 내 꿈이다.

<칠집 김씨> 中에서


하지만 칠집 김씨가 그린 작품은 국내외 저명한 미술관에 소장되기도 하고

중국 시진핑 주석의 국빈 방문 때 증정되기도 할 정도로 손꼽히는 화가입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가끔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쿡쿡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키가 작고 볼품 없는 꼬마 김씨를 통해 성자聖者의 모습을 발견했다거나

첫미팅에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자 신경안정제 두 알을 먹고 졸았다는 글을 읽으며

아무리 대단한 화가라도 겸손함과 순진함을 엿보게 됩니다.




또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 그런지 풍경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림을 그려보니 알겠더군요.

성경 말씀의 한구절을 끄집어내어 생명의 근원이 오묘함을 찬탄하는 글을 읽으며

그 구절을 함께 곱씹어 봅니다.

저는 내년에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기도 한 C.S. 루이스의 책을 읽겠노라고 결심했는데

마침 작가의 글 중에 루이스 작가에 대해 쓴 글을 읽으니 참 반가웠어요.


C. S. 루이스의 문장은 우아하고 웅혼하다. 섬세하고 아름답다.

교향악 같고 가늘게 떨리는 바이올린의 현 같다.

마치 아일랜의 장엄한 모허 절벽 같은 원시의 자연을 닮은 듯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독특한 도시적 섬세함과 세련성을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잉글랜드적 문예 전통이다.

그의 정신과 문학 세계는 말하자면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라는

일란성 쌍생의 소산인 셈이다.

<C. S. 루이스를 읽는 밤> 中에서


총 3부로 이뤄진 에세이는 모두 다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풍경과 빛과 어둠 사이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가의 그림작품까지 곁들여 있으니 마치 글이 긴 화보집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글과 글 사이에 그림이 있고 그림과 그림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여운이 남습니다.



"그때 포수 아저씨 있었잖아?" 라니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어머니가 놀랍니다.

아주 어릴 적 살던 동네라서 기억이 가물하지만 문득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니 맨날 도망간 마누라 욕을 안주 삼아 술만 마시더니

알콜 중독자가 되어 어느 날 병원에 실려갔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시네요.

용감하게 곰을 잡으러 산에 갔다가 목숨을 건 사투 끝에 곰을 때려잡았다는 후일담까지는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안타깝습니다.

언제고 저도 그 포수 아저씨의 모자와 크고 넓은 어깨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살짝 바람을 가져봅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아련하게 떠올리게 하는 [칠집 김씨 사람을 그리다]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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