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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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게 시작되어 어느새 폭발적인 인기를 끈 한 드라마에서 등장한 고래.

덕분에 한동안 고래 관련한 다양한 콘텐츠와 굿즈들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거기에 당연히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 [모비 딕] 아닐까요?

미국 출신의 작가 허먼 멜빌에 의해 1851년에 씌여진 장편소설 [모비 딕]은 그동안 다양한 버전으로

재출간을 거듭하며 대중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무려 600쪽이 넘는 페이지와 20만자가 넘는 글자수를 자랑한 이 엄청난 소설은 어떤 내용일까요?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다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 소설 [모비딕]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 책의 두께와 무게가 저를 묵직하게 짓누르기는 했지만요.

[모비 딕]은 '백경 白鯨 (흰고래)'라는 제목으로도 친숙한데 일본에 쓰던 제목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원제목인 [모비 딕 Moby Dick]보다는 차라리 백경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Moby는 '거대한, 초超~'란 뜻이고 Dick는 남성의 성기를 일컫는 단어라고 하니까요. (웃음)

고래는 보통 까만데 왜 흰고래일까? 향유고래라는 종류가 원래 흰색일까? 라는 의문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당시 실제로 알비노 이빨고래가 존재했었고 작가 멜빌은 거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네요.

19세기 포경선들은 대부문 나무로 만든 목선이다보니 덩치가 큰 향유고래들이 포경선을 공격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고 합니다.




[모비 딕]은 장편인 만큼 그 속에 담긴 은유적 표현과 철학적 문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인 에이해브(아합), 이슈메일(이스마엘)은 기독교 성경 속 인물들을 연상하게 하고

작품의 줄거리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인물 오디세우스의 해상 모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마도 같은 바다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이겠죠.

다만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을 쫓아 다녔고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


[모비 딕]은 모험소설입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삭제된 채 주요 흐름만 간추린 어린이용 동화책으로도 자주 출간되기도 하지요.

저도 아주 어렸을 적 <백경>이라는 제목의 청소년용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나서 이번 완역본에

도전해보았습니다만 소설의 호흡이 긴 만큼 읽어가는 것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네요.

소설같이 읽히다가도 희곡처럼 읽히기도 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면 지금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정말 망망대해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모비딕을 쫓는 선원들의 심정처럼 막막할 때도 있었어요.


내 영혼은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압도당했다. 그것도 미치광이에게!

제정신을 가진 자가 전장에서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중략)

아아,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자리에 있는지 분명히 알겠다.

나는 반항하면서도 복종한다.

더 나쁘게는 그를 증오하면서도 동정한다!

<38장 황혼> 中에서


모비 딕을 쫓을 것을 명하는 에이해브 선장을 향한 증오와 동정을 담은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독백이

마치 연극 무대의 대사와도 같이 읽혔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독백과 인물들 간의 대사들이 마치 대본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쩐지 저도 스타벅의 대사를 읽으면서 뭔가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모비 딕에게는 때때로 인간의 영혼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두드러진 특징 외에도 다소 모호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나머지 모든 특징을 압도해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중략)

무엇보다 나를 오싹하게 만든 것은 그 고래가 흰색이라는 사실이었다.

흰색의 가장 내밀한 개념 속에는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깃들어 있어

두려운 핏빛보다 더 큰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42장 고래의 흰색> 中에서


자연 생태계에서 흰색은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가장 먼저 희생되기 쉽기에 도태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모비 딕의 고래는 흰색임에도 불구하고 포악하고 무자비합니다.

흰색이라서 공격을 더 많이 당했을 테고 살아남기 위해 악착 같이 싸웠을 테고,

싸우다 보니 성격이 나빠지고 그래서 배만 보면 공격하고 다시 인간에게 공격 당하고

그러니 더더욱 사나워진 것이 아닐까, 잠시 저만의 상상을 보태봅니다.


석탄불 앞에서 앉아서 제 몸을 다 불사를 것처럼

이글거리는 불길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그런 불길도 차츰 사그라들더니 결국 말없는 티끌이 되고 말았지.

바다의 노인이여! 불같이 타오르는 그대의 생명도 결국에는

한 줌의 재가 되고 말 것이오! (중략)

에이해브 당신 말이 맞아요.

승부에 살고 승부에 죽는 겁니다.

<118장 사분의> 中에서


본격적으로 모비딕을 잡으러 가는 에이해브 선장을 향해 중얼거리는 스타벅의 대사는

마치 앞날을 예고하는 불길한 예언과 같이 들리기도 하고 결의 찬 응원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왜 에이해브 선장은 그토록 모비 딕을 증오했을까요?

단지 자신의 다리를 잃었기 때문이라기엔 너무나도 깊숙한 곳까지 원한이 파고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그의 집념의 작살은 모비 딕에게 꽂혔고 그 작살 끝에 연결된 밧줄에 감겨 최후를 맞고 말았지요.


"배구나! 배가 관이었어, 두 번째 관!"

에이해브가 보트에서 외쳤다.

"두 번째 관의 목재는 반드시 미국에서 난 것이라고 했지!"

<135장 추격-셋째날> 中에서


지루하고 기나긴, 언제 끝날지 모르던 소설의 막바지는 마치 그동안의 인내심에 보상이라도 하듯

휘몰아치며 빠르게 전개되었어요.

알면서도, 그 끝을 알면서도 빠져들고 만 에이해브 선장의 저 대사에 소름이 쫙 돋고 말았습니다.

관이 되어버린 배와 함께 바다에 잠겨버린 모든 선원들, 반면 퀴퀘그가 열병으로 죽어갈 때

만들었다가 되살아나서 쓸모없게 된 퀴퀘그의 관을 붙잡고 살아난 이슈메일.

어쩌면 삶과 죽음은 모두 네모난 침대와 관 사이에 오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기나긴 여정을 끝냈습니다.

이후 이 책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들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드라마 시즌2가 방영되면 그때는 또 다른 버전의 모비 딕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정말 짧게 만나고 싶네요.

나만의 '모비 딕'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시간 [모비 딕]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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