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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붙어 있으니 살아야겠고 - 무기력의 심리학
하타노 기요오.이나가키 가요코 지음, 김현숙 옮김, 박창호 감수 / 공명 / 2022년 7월
평점 :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요령이 늘어납니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를 처리하는 기술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일에 흥미를 잃게 됩니다.
며칠씩 미루다가 마음먹고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으름을 피우죠.
금세 일을 끝내 놓고 뿌듯해 하면서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며 스스로에게 상도 주게 됩니다.
그 정도로는 무기력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할까요?
정작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따로 있더군요.
[숨은 붙어 있으니 살아야겠고]는 무기력의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과 표지에 흥미를 느껴 섣불리 책을 펼쳐보는 건 금물입니다.
무기력에 시달리다 무기력에서 벗어난 에세이 쯤으로 가볍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만,
이 책은 엄연히 인문계열의 교양심리학 쪽으로 분류된 본격 심리연구 전문서에 준합니다.
저자 하타노 기요오는 도쿄대학 교육심리학을 박사 과정까지 수료하였으며 발달심리학, 인지과학을
전공하였습니다만 지난 2006년 타계하였습니다.
공저자인 이나가키 가요코는 오차노미즈여대 교육학과를 석사 과정까지 수료하였으며
발달심리학과 유아교육학 교수입니다.
책은 대부분 미국에서 연구된 무기력의 심리학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미국과 일본의 사회와 문화 차이가 있으므로 후반부에는 비교 분석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무기력을 말할 땐 '학습된 무기력'이란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철장에 가둬 둔 개에게 전기 충격을 주면 처음에는 피하려고 노력하던 개도
결국 피할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전기 충격을 당하기만 할 뿐이며 나중에는 피할 방법이 생기더라도
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전기 충격에 견디기만 한다는 것이 '학습된 무기력'의 주요 골자죠.
그럼 무기력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요? 활력? 생기발랄?

무기력의 반대 개념은 효능감이다.
즉, '노력하면 좋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겨
자신감과 예견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근거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의욕적이고 활기차게 대처해가는 상태다.
<숨은 붙어 있으니 살아야겠고> 中에서
하지만 저자는 인간은 효능감이 결여되면 무기력에 시달리며 특히 풍족하게 생존이 보장된 경우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무기력은 '학습'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효능감의 결여 때문일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어렵다고 생각했던 목표를 치열하고 힘겹게 달성한 후 뭔지 모를 허탈감에
빠져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무기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은 총 10장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장에서 3장까지는 무기력에 대해, 4장에서 6장까지는
무기력을 벗어나는 효능감을 높여주는 여러 조건들에 대해, 7장에서 9장까지는 획득한 효능감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 마지막 10장에서는 무기력과 효능감에 관한 미국과 일본을
서로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직장생활에서의 업무 처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책의 6장에서 다루는 <숙달과 보람>을
읽으며 떠오른 장면을 글로 옮겨 본 것입니다.
효능감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하나는 스스로 자기향상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향상의 판단 기준이 외부에 있는 한, 성공의 기쁨도 기껏해야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좀처럼 의욕적인 삶을 이끌어 주지 못한다.
또 한 가지는 자기향상이 자신에게 가치 있고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6장 숙달과 보람> 中에서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서투르고 실수할 수도 있지만 점점 손에 익어 숙달이 되면
재미를 느끼게 되고 더 잘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람을 느끼지만 그 단계가 지나면 무기력이 찾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테지요.
무기력은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내겁니다.
효능감을 키우고 유능감을 갖는 것만이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임을 저자는 거듭 강조합니다.
효능감을 키우기 위해 요구되는 첫 번째 사항은 모두가 의미 있는
숙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발적이고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과제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숙달된 능력에 의해 창조의 즐거움이나 타인에게 공헌할 수 있는 기쁨,
자기통합에 따른 만족감 등을 느낄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두 번째는 숙달에 동반한 내적 만족에 중점을 두고, 외적 성공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아도 나름대로 각자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9장 효능감의 사회적 조건> 中에서
앞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저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은 산더미 같은 업무가 아니라
'일'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하고 잘해도 이 일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이것에 저는 무기력을 느꼈던 것이죠.
하지만 다행히도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직은 '그래! 이거야!'하는 일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 또한 저의 효능감을 키우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기력의 심리학 [숨은 붙어 있으니 살아야겠고]를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