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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의 정원 ㅣ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평점 :
이 책으로 앙리 보스코를 처음 접해봤는데 왜 지금 알았지 싶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색의 작가였다. 그리고 동시에 처음보는 색의 작가였다. 소설의 화자인 메장이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환각을 보거나 마법같은 분위기의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메장이 마을의 풍경과 일상을 묘사할 때는 내가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있는 듯 목가적인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반지의 제왕'과 '빨간머리 앤/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하나로 합친 것 같았다.
이야기는 메장의 목동인 아르나비엘이 양을 방목하던 중 폭우를 만나 보리솔이라는 고원의 작은 마을에 묵게 되면서 시작한다. 아르나비엘과 자신의 양을 보살펴준 데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후 메장은 보리솔로 향하고, 보리솔의 천국같은 모습에 반해 게리톤 부부와의 교류를 시작한다.
그렇게 보리솔에서 보내게 된 성탄절 밤 메장은 반바지를 입은 기이한 당나귀를 마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인이 여자 아이를 보리솔에 두고 떠난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펠리시엔으로 아이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채 하루의 대부분을 잠에 빠져 산다. 미스터리한 펠리시엔을 자신의 집에서 돌보며 메장은 펠리시엔의 비밀을 풀고자 한다. 펠리시엔에게 골몰하던 어느날 메장은 과원에서 펠리시엔이 맨발로 춤을 추는 기이한 꿈을 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메장은 펠리시엔을 확인하고, 자고 있는 펠리시엔의 발이 덤불에 긁혀 있는 것을 본다.
아이가 잃어버린 기억은 무엇인지, 아이가 기묘한 말과 행동은 어디에서 온 건지, 어떤 저주에라도 걸린 건지. 메장이 펠리시엔의 신비에 기꺼이 이끌려 들었듯 나도 이 책의 신비로운 매력에 끌려 들어 이야기를 따라갔다.
하지만『이아생트의 정원』에서 가장 백미는 역시 전원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보스코는 풍경의 자그마한 부분조차 그냥 넘기지 않고 문장으로 표현한다. 묘사를 하는 데 글자를 아끼지 않으며 낭비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그 시대, 그 장소에 살지 않았지만 보리솔과 아멜리에르에 가본 것만 같이 목가적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던 건 향기의 묘사다. 보스코에게 이 세상에 같은 향을 풍기는 식물 혹은 사물은 없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과수원은 송진 머금은 목재, 신선한 수지, 과일 향나는 나뭇잎 냄새를 선사한다. ··· 아주 따스한 벌통이 대여섯 개 놓여 잘되고 있는데, 과수원 꽃들은 바스락거릴 정도로 당분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워난 작은 과수원 안 사방에서 꿀과 밀랍 냄새가 풍긴다."
"빨래는 산들바람에 바짝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였고 빨랫줄은 건들거리고 있었다. 대기는 풀 냄새와 세탁장의 맑은 물, 비누에 든 꽃향기를 풍겼다. 더구나 깊어진 봄기운이 나무들 싹을 부풀려놓았던 터라 깨끗한 집안일에서 풍겨 나오는 이런 냄새에, 태양으로 데워져가는 과수원이 풍기는 나무껍질 향기가 어우러졌다."
이 외에도 아름다운 묘사가 많아 표시해둔 문장이 많다.
마지막으로『이아생트의 정원』에 나오는 인물들의 영혼은 자신의 삶을 섬세하게 헤아릴 줄 알며 주변 사람이나 환경의 깊숙한 영혼까지 알아볼 수 있다. 보리솔의 삶을 영혼처럼 소중히 여기는 게리통 부부, 자연을 헤아리며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지혜로운 아르나비엘, 펠리시엔을 위해 기도를 아끼지 않는 작은 마을의 신부님, 영혼과 육신 양쪽은 딱 가운데 자리 잡아 바람 한 줌과 같은 메제미랑드, 성실하고 다정한 아그리콜네, 모든 사물의 쓰임과 자리를 아는 덕에 "익숙한 사물들의 형태 아래에서 어떤 순수한 정수를 끌어낼 수 있"는 시도니, 그리고 그런 시도니의 영혼을 사랑으로 헤아리는, 이 모든 이야기의 기록자인 메장.
이 모든 섬세하고 충만한 영혼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던진 말을 충분히 음미하고, 찾은 답도 입에 올리기 전에 먼저 음미하는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메장은 리귀제를 떠나 가족 사이의 분쟁에 참여하였을 때 영혼이 앗긴 것 같다고 말했다. "질책하고, 질문하고, 답을 하고, 논거를 대고, 법을 인용하고, 묘안을 찾고, 원칙을 따지고, 심지어는 훈계까지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소스라쳤다"고. 하지만 리귀제로 돌아간 메장의 영혼은 다시 충만해졌다.
영혼에 대해 생각할 일은 참 드물다. 음미 대신 답을 하고 논거를 대고 묘안을 찾아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준 충만한 영혼에 둘러싸여 그들이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었다. 영혼의 부재를 느끼고, 부재의 공간을 나무껍질과 꽃의 향으로 채우고, 별빛을 꿈꿀 수 있었다. 메장에게 리귀제와 보리솔이 그러하듯 『이아생트의 정원』은 나에게 영혼이 앗긴 듯할 때 다시 찾을 수 있는 휴식처 같은 소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