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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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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트위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남자인] 친구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길래 이유를 물어보니 맛집도 가고 싶고 SNS에서 본 카페도 가고 싶은데 여자친구가 없으면 못 가니 그런다고 한다." 상상도 못한 이유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아마 비남성)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곳에 왜 혼자 가지 못하는 거지? 아니, 혼자 못 가겠으면 친구랑 가면 되잖아?'

평소 남성 호모소셜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나는 해당 게시물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최근 광장에서 2030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이 발언을 통해 남성우정 문화의 유해성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발언자들이 입을 모아 동성 친구들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광장에 나올 정도로 주류에서 벗어난 극소수뿐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친구 간에 특별한 이벤트는 무용하고 오글거린다며 피하는 모습, 축구장과 PC방과 술집을 근거지로 삼는 모습, 제육을 먹으며 주로 주식과 비트코인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등등. 이는 나에게 여러 미디어와 밈을 통해 '만들어진' 남성우정의 모습이긴 했지만 이제까지 (심지어 별로 본인에게 해당하지 않는데도) 이 이미지 자체를 싫어하는 남자는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자신들의 '유쾌하고 진실된' 우정 양식에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쳤으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대다수는 그들 자신의 문화에 흡족하며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끼리는 카페도 같이 못 간다니. 너무 이상했다. 남자들의 우정이 궁금해졌다. 남자에게 친구는 뭐지? 남자들은 친구 관계에서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지?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영국의 남성 스탠드업 코미디언 맥스 디킨스가 이러한 의문을 품고 1년간 '남성 우정'에 대해 종횡무진 탐구한 과정을 담은 소상한 보고서다. 맥스의 탐구는 자신의 여자친구 나오미에게 프러포즈할 계획을 취소하며 시작된다. 프러포즈가 성공해도 자신에겐 결혼식 들러리로 세울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결혼하려는데 신랑 들러리가 없어요’라고 구글에 검색한 맥스는 거의 십억 건에 달하는 검색 결과를 보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친구관계에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맥스는 대체 왜 이런 일이 나타났는지,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탐구에 착수한다.

맥스는 젠더부터 역사·문화·과학·기술적 관점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남성 우정을 살펴보며 연구, 통계 자료, 기사, 인터뷰 등의 다채로운 자료를 저자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솜씨 좋게 엮어낸다. 독자는 맥스의 여정을 따라가며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유성애적인 젠더 규범이 우정의 양식을 형성하고 영향을 주는 구체적인 방식을 볼 수 있으며, 젠더 이외에도 현대 기술과 외로움을 이용하는 산업사회가 인간관계에 끼치는 영향을 돌아볼 수 있다.


또한 맥스는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탐구를 통해 깨달은 내용을 그때그때 반영하여 다양한 시도를 한다. 맥스는 이 프로젝트 끝에 결국 결혼식 들러리를 구할 수 있을까? 1년간의 처절한(?) 충격과 반성, 노력 끝에 친구에게 진실한 마음을 고백하는 맥스의 모습을 보면 깔깔 웃다가도 마지막 화에선 코끝이 찡해지는 시트콤 한 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맥스는 책을 시작하기 전 한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이 책은 나의 개인적 경험을 다루었기에 그 범위가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등에 제한되어 있다." 이건 자신이 이 주제를 다루기에 매우 적합함을 은근슬쩍 어필한 게 아닐까?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상성'을 충족하는 남성우정의 독소를 다루려면 내부자의 시선이 필요한 법이다. 『여성 거세당하다』라는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고 자신에겐 '유해한 남성성'이 없을 거라 철석같이 믿는 모습을 보면 저자는 완벽하게 자격이 있다.



읽으면서 젠더 규범에 따라 여성과 남성의 우정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그게 남성들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만든다는 점도 인상 깊었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정' 자체에 대한 훌륭한 고찰이었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는가』를 읽으며 '어른으로서 친구가 된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저자는 상황이 친구와 나를 묶어주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어른이 되어서도 우정을 유지하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정은 우리에게 상당한 정신적 부담을 준다. 스케줄을 조정해 날짜를 잡고, 만날 장소를 알아보고, 꾸준히 연락하고, 기념일을 챙기는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해내야 한다. 진정한 우정은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이런 정신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쓰는 말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정에서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보여준다. 저자는 망가진 줄도 모르고 망가져버린 우정을 회복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한다.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연락하고, 고마움을 진솔하게 전하고, 먼저 나서서 모임을 조직하고, 친구의 기쁜 소식에 축하 카드를 보낸다. 물론 처음 하는 시도인 만큼 완벽하게 해내진 못하지만 그래서 저자의 노력이 더 와닿는지도 모른다. 우정을 위한다면 행동해야 한다. 마음은 행위 없이는 보이지 않는 법이고, 이건 우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친구'는 판타지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특정 시기의 축복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 관계는 나에게 중요하고 나는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어”라는 메시지는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전달될 뿐이다.

책을 읽던 시기에 우연찮게 친구들과의 약속이 연달아 생겼다. 책을 읽으며 행동과 표현의 중요성을 실감했기에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을 자리에 나가기로 했고, 친구를 만나서는 평소와는 달리 내 고민들과 생각들을 유머로 포장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덕분에 최근 좀처럼 채워지지 않던 우정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을 안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저자가 머리말에 자신의 책이 '우정 사용 설명서'가 되길 바란다고 했을 땐 남자들을 겨냥해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나도 이 설명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처럼 시간의 흐름 앞에, 혹은 여러 이유로 우정에 대한 회의가 드는 사람이 있다면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남성우정 #남자는왜친구가없을까 #인간관계 #북스타그램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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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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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계』의 소설들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까발리며 가족이라는 신화를 깨부순다. 그렇다. 가족은 신화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는 신이 된다. 신의 존재 아래 집은 신성불가침의 성전으로 자리 잡는다. 그 성스러움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신의 기적과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은 죄다.

하지만 암푸에로는 이 최후의 신성에 당당히 조소를 날린다.
「그리스도」의 화자는 아픈 동생을 간병하는 소녀다. 소녀는 어느 날 엄마와 함께 동생에게 먹일 성수를 뜨러 교회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적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상'을 파는 아주머니를 보며 생각한다.

"왜 아주머니는 그리스도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기적을 보여주는 그리스도라면 동전이 가득할 텐데. 버스비가 없어서 가끔은 먼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우리랑은 달리."

쉴 틈 없이 동생을 돌봐야 하는 소녀에겐 TV 애니메이션 한 편을 끝까지 보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다. 이 소박한 일조차 이룰 수 없는 기적을 누가 '기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에서 기적의 허상성을 보여준 작가는 뒤이어 「수난」에서 기적 뒤에 묻힌 여자를 보여준다. 「수난」은 "성경 속 여성 막달라 마리아를 재해석하여 예수의 수난사를 다시 쓴" 이야기다. 암푸에로가 새로 쓴 성경에서 신은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로 여자의 힘과 피와 에너지를 뺏어 '기적을 행하는 자'로 남는다.

신의 위선은 「상중」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리아의 오빠는 마리아가 자위를 했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창녀'라고 부르며 축사로 쫓아낸다. 그곳에서 수많은 남자들은 마리아를 강간한다. 마리아의 살갗은 모두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가 흐른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가 이곳에 방문한다. 마르타는 예수를 붙잡고 마리아를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예수는 그저 믿음을 가지란 말만 되풀이하며 마르타와 마리아를 남겨두고 떠난다.

"마르타가 따라 나와 무릎을 꿇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그가, 당신 오빠의 집이오, 하고 마르타에게 대답했다.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오, 남자에 대한 존중이 그 집안에 대한 존중이니까, 그래도 그에게는 이미 얘기했소, 그녀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내가 그리되도록 기도하겠소.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가 마르타에게 말했다."

암푸에로는 신화를 새로 쓰며 그 작동 방식을 파헤친다. 말뿐인 사랑과 믿음으로 폭력을 덮고, 그 결과 생겨나는 고통과 죽음을 희생으로 명명하며 기적의 토대로 사용하는 일. '희생당한' 자들에겐 신의 기적은 그뿐이다.

​예수의 방관으로 결국 사방의 벽에 밀폐된 폭력은 오롯이 그 안에 있는 여자의 몫이 된다. 이제 같잖은 기적 따위를 믿을 수 없는 여자들은 예수가 성스러운 얼굴로 기도하는 동안 피와 똥을 뒤집어쓴 괴물이 되기를 택한다.

「경매」의 화자는 어린 시절 투계꾼인 아빠를 따라 투계장을 따라다닌다. 그곳에 있는 투계꾼 아저씨들은 '나'를 만지며 성폭행을 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안고 가던 수탉의 배가 터져 "닭의 창자와 피와 닭똥"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때 아저씨들이 구역질을 하며 자신을 피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닭의 피와 똥을 몸에 묻히고 다닌다. 그런 '나'를 아저씨들은 '괴물'이라고 부른다.

「경매」처럼 암푸에로 소설 속 여자들은 피, 똥, 벌레와 같은 역겨운 이미지로 칠갑이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상중」의 마리아는 "집에 남자 하나 있느니 세상 모든 바퀴벌레를 들이겠노라고" 말하며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 위를 뛰어다닌다. 「알리」에서 알리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부터 아래턱까지를 긋는다. 상처는 보랏빛 애벌레처럼 변해 그녀를 괴물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투계』를 읽고 있으면 이러한 이미지들이 과하다는 생각도 무엇의 '비유'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폭력은 그 정도로 역겹고 '살기 위한' 여자의 투쟁은 실제로 피투성이이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이 추천사에 쓴 것처럼 "여자의 상처가 폭발할 때 비유는 필요 없다."

『투계』는 이렇게 폭력 속에서 괴물이 된, 혹은 괴물이 되기를 택한 여자들을 그려낸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 누가 정말 괴물처럼 보이는지는 겉모습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가족이라는 성전의 하이얀 외벽이 더이상 깨끗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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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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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의 딸 리타는 비 오는 날 밤 성당에서 죽었다. 경찰도, 마을 사람들도, 리타의 남자 친구까지도 리타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엘레나는 알고 있다. 리타는 자살하지 않았다. 리타가 비 오는 날의 성당을 무서워했다는 걸 엘레나는 엄마로서 알고 있다. 그러니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 엘레나는 파킨슨 병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떠나기로 한다. 20년 전 리타에기 빚을 진 이사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엘레나는 리타가 자살했다 생각하는 형사에게 모르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엘레나를 알고 있다』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의 입을 통해 반복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을 규정하고 단죄하는 남성 인물에게 '당신은 나의 마음을 모른다'고 말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사회와 이를 거부하는 여성의 저항은 엘레나, 리타, 이사벨로 세대를 거쳐 이어진다. 하지만 피녜이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복잡한 현실을 책에 담아낸다.

'모르면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외침은 엘레나와 리타, 그리고 이사벨이 서로를 향해 소리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여성들이 세상의 규정에 저항하지만 동시에 이를 내면화해 다른 여성의 몸을 규정하는 슬픈 모순을 보여준다. 같은 '여성'으로서 했던 말들은 '이해'의 탈을 쓴 또 다른 단죄가 되었다. 피녜이로는 이렇게 세대 간의 연결과 불화를 통해 섬세하게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를 풀어낸다.


파킨슨병은 엘레나를 고개 숙이게 만든다. 목빗근이 뻣뻣해져 땅을 보고 걸어야 하는 엘레나는 꼭 죄를 지은 사람 같다. 그건 자신의 몸으로 부정을 저지른 여자, 자살이든 낙태든 안락사든, 하느님이 주신 몸을 함부로 사용한 여자와도 닮은 모습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고개 숙인 상태로 고개 숙이기를 거부한다. 엘레나의 이러한 의지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꺾이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또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엘레나는 알고 있다』는 엘레나의 여정을 통해 이렇게 질문한다. 신부는 리타의 타살을 주장하는 엘레나에게 교만하다고 말한다. 현실은 정반대인데 엘레나가 이를 부정하고 자신이 진실을 '알고 있다' 주장한다고, 이는 허영과 교만의 죄라고 말이다. 엘레나는 물론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신부도 틀렸다. 고통, 죄책감, 수치심, 굴욕감을 떠안고도 이사벨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그 마음은 오직 엘레나만이 알고 있다. 엘레나는 아무리 사회가 문화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도덕의 이름으로 여성의 몸을 구속하고 여성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도 그들이 각자의 진심까지 모르게 만들 수는 없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진심은 진실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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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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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 마음속에 아름다운 정원을 간직하는 것처럼 나도 마음속에 평생 동구와 영주를 간직할 것 같다. 따뜻하면서도 아릿한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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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의 정원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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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앙리 보스코를 처음 접해봤는데 왜 지금 알았지 싶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색의 작가였다. 그리고 동시에 처음보는 색의 작가였다. 소설의 화자인 메장이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환각을 보거나 마법같은 분위기의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메장이 마을의 풍경과 일상을 묘사할 때는 내가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있는 듯 목가적인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반지의 제왕'과 '빨간머리 앤/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하나로 합친 것 같았다.

이야기는 메장의 목동인 아르나비엘이 양을 방목하던 중 폭우를 만나 보리솔이라는 고원의 작은 마을에 묵게 되면서 시작한다. 아르나비엘과 자신의 양을 보살펴준 데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후 메장은 보리솔로 향하고, 보리솔의 천국같은 모습에 반해 게리톤 부부와의 교류를 시작한다.
그렇게 보리솔에서 보내게 된 성탄절 밤 메장은 반바지를 입은 기이한 당나귀를 마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인이 여자 아이를 보리솔에 두고 떠난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펠리시엔으로 아이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채 하루의 대부분을 잠에 빠져 산다. 미스터리한 펠리시엔을 자신의 집에서 돌보며 메장은 펠리시엔의 비밀을 풀고자 한다. 펠리시엔에게 골몰하던 어느날 메장은 과원에서 펠리시엔이 맨발로 춤을 추는 기이한 꿈을 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메장은 펠리시엔을 확인하고, 자고 있는 펠리시엔의 발이 덤불에 긁혀 있는 것을 본다.
아이가 잃어버린 기억은 무엇인지, 아이가 기묘한 말과 행동은 어디에서 온 건지, 어떤 저주에라도 걸린 건지. 메장이 펠리시엔의 신비에 기꺼이 이끌려 들었듯 나도 이 책의 신비로운 매력에 끌려 들어 이야기를 따라갔다.

하지만『이아생트의 정원』에서 가장 백미는 역시 전원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보스코는 풍경의 자그마한 부분조차 그냥 넘기지 않고 문장으로 표현한다. 묘사를 하는 데 글자를 아끼지 않으며 낭비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그 시대, 그 장소에 살지 않았지만 보리솔과 아멜리에르에 가본 것만 같이 목가적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던 건 향기의 묘사다. 보스코에게 이 세상에 같은 향을 풍기는 식물 혹은 사물은 없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과수원은 송진 머금은 목재, 신선한 수지, 과일 향나는 나뭇잎 냄새를 선사한다. ··· 아주 따스한 벌통이 대여섯 개 놓여 잘되고 있는데, 과수원 꽃들은 바스락거릴 정도로 당분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워난 작은 과수원 안 사방에서 꿀과 밀랍 냄새가 풍긴다."

"빨래는 산들바람에 바짝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였고 빨랫줄은 건들거리고 있었다. 대기는 풀 냄새와 세탁장의 맑은 물, 비누에 든 꽃향기를 풍겼다. 더구나 깊어진 봄기운이 나무들 싹을 부풀려놓았던 터라 깨끗한 집안일에서 풍겨 나오는 이런 냄새에, 태양으로 데워져가는 과수원이 풍기는 나무껍질 향기가 어우러졌다."

이 외에도 아름다운 묘사가 많아 표시해둔 문장이 많다.

마지막으로『이아생트의 정원』에 나오는 인물들의 영혼은 자신의 삶을 섬세하게 헤아릴 줄 알며 주변 사람이나 환경의 깊숙한 영혼까지 알아볼 수 있다. 보리솔의 삶을 영혼처럼 소중히 여기는 게리통 부부, 자연을 헤아리며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지혜로운 아르나비엘, 펠리시엔을 위해 기도를 아끼지 않는 작은 마을의 신부님, 영혼과 육신 양쪽은 딱 가운데 자리 잡아 바람 한 줌과 같은 메제미랑드, 성실하고 다정한 아그리콜네, 모든 사물의 쓰임과 자리를 아는 덕에 "익숙한 사물들의 형태 아래에서 어떤 순수한 정수를 끌어낼 수 있"는 시도니, 그리고 그런 시도니의 영혼을 사랑으로 헤아리는, 이 모든 이야기의 기록자인 메장.
이 모든 섬세하고 충만한 영혼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던진 말을 충분히 음미하고, 찾은 답도 입에 올리기 전에 먼저 음미하는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메장은 리귀제를 떠나 가족 사이의 분쟁에 참여하였을 때 영혼이 앗긴 것 같다고 말했다. "질책하고, 질문하고, 답을 하고, 논거를 대고, 법을 인용하고, 묘안을 찾고, 원칙을 따지고, 심지어는 훈계까지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소스라쳤다"고. 하지만 리귀제로 돌아간 메장의 영혼은 다시 충만해졌다.
영혼에 대해 생각할 일은 참 드물다. 음미 대신 답을 하고 논거를 대고 묘안을 찾아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준 충만한 영혼에 둘러싸여 그들이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었다. 영혼의 부재를 느끼고, 부재의 공간을 나무껍질과 꽃의 향으로 채우고, 별빛을 꿈꿀 수 있었다. 메장에게 리귀제와 보리솔이 그러하듯 『이아생트의 정원』은 나에게 영혼이 앗긴 듯할 때 다시 찾을 수 있는 휴식처 같은 소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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