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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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현대사의 암울한 면을 이따금 떠올리고 관련 정보를 찾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작년 말 시작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군사 충돌이 몇 달 째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적법성 여부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방지 논의가 국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대량 학살이라는 비극을 막기 위해 만든 집단학살 방지 조약 위반자로서 2024년 이스라엘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일종의 아이러니에 혼란을 느끼던 중, 위즈덤하우스에서 번역서로 출간된 『늑대의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인 및 이스라엘을 중심에 둔 책은 아니지만, 책 소개 글에 두드러진 “야만의 시대”, “부도덕의 나날들”, “희생양 논리를 주장한 독일인들”, “자기반성은 없었다.” 등의 문구들에서 오늘날 상황이 엿보인다. 더군다나 평소 독일이라는 나라를 볼 때 떠올리기 힘들었던 부정적인 수식어를 통해 흔히들 알고 있지 못했던 당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하면서, 책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졌다. 


전후 시대 대다수 독일인의 의식에서 홀로코스트는 충격적일 만큼 역할이 미미했다. 물론 일부 사람은 동부전선에서 자행된 그 범죄를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잘못을 인정했지만,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 속에는 유럽의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사실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아주 소수만, 예를 들어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 같은 사람만 그 일을 공개적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심지어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오랜 논의 끝에 자신들의 책임을 고백하는 자리에서도 유대인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pp.10-11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무리에만 신경을 쓰는”,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였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대까지 독일 사회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스로를 희생자로 느끼며 과거에 대한 생각을 회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생존욕구가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어려웠던 환경과 사람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이 중심으로 제시되는 와중에 이와 관련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보충하여 당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춤을 추고 파티를 벌이며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전쟁 이후 집으로 귀향한 남자와 갈등은 빚는 여성의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시대상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개별적, 개인적 측면에서 이런 행동들이 의미했던 바와 시대적 측면에서 이런 일이 연유한 배경, 이유를 모두 조망하고 있어 참 재밌는 역사서를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가 본문에 직접 인용한 당대 독일어 글이 더해져 독자가 시대 및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연극 평론가 프리드리히 루프트, 저널리스트 루트 안드레아스-프리드리히, 작가 프란츠 호이어, 뮌헨 주민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남긴 글을 사료로 접근한 점이 눈에 띈다. 독자로서 기사, 일기, 문학 작품 등을 직접 읽어보고, 더 관심 생기는 것은 미주에 제시된 원전 정보를 따라 주도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 제시된 역자의 각주, 책 말미에 모여 있는 저자의 미주를 참고하며 이 분야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어려움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외국인명, 간행물명, 주요 단어에 독일어 원어가 병기되어 있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책에 제시된 원어를 그대로 검색해보면서 독서 중 느낀 의문을 일차적으로 즉시 해결할 수 있다.  


 국가 및 민족을 하나로 인식하고 강력하게 주입되었던 인종주의가 사라진 배경 등과 같은 익숙한 내용을 사회 구석구석 모습을 통해 색다르게 설명하고, 춤추기, 약탈, 사랑 등과 같이 그간 본 적 없거나 보기 힘들었던 독일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여, 전후 독일을 세계사적 맥락에서 거시적으로 바라봐왔던 사람들에게 흥미롭게 여겨질 책이다.  


이 책이 규명하고자 한 부분은 명확하다. 다수 독일인이 개인적 책임을 거부했음에도 어떻게 나치 정권을 가능케 한 심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이전의 과대망상만큼이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몽에서 화들짝 깨어난 듯한 급격한 현실 자각이었다. 게다가 연합국에 딸려 들어온 느긋한 생활 방식의 매력, 암시장을 통한 쓰디쓴 사회화 과정, 실향민에 대한 사회적 통합 노력, 추상미술을 둘러싼 떠들썩한 논쟁,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즐거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것이 심리 상태의 변화를 촉진했고, 그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담론은 서서히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pp.460-461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225765)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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