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좋다. 꼭 정독해서 심각하게 읽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그렇고 그런 체험 에세이는 아니다. 글이 좋다, 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인데 우선 살아있다. 내게는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독특성이다. 냉장고에서 3일이 지난 우유를 꺼내 마시는 것과 오늘 아침에 온 우유를 마시는 것은 다른 경험을 준다. 물론 신간이어서 질료로서의 책 자체도 신선하지만, 글 자체가 살아있다. *‘초신선’ 책 경험을 준다. 난 지금 차가운 건국우유를 마시며 하루 늦게 서평을 쓰고 있는데, 우유 맛뿐만 아니라 조금전까지 읽던 이 책 **어느 한 부분의 문장 맛까지 섞여 신선한 감칠맛이 입안에 감돈다.
이런 느낌을 주는 에세이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그리 널리 이름을 떨치지 않은 이 아일랜드 작가(John Connell)는 그의 영혼을 목양하고 있는 신부의 믿음처럼 확실히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 그의 글을 가만히 읽고 있으면 내가, 우리 모두가 이 세계에서 살아있다, 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의 글을 읽는 나와 너, 우리는 살아있다. ‘살아있음’의 통찰력과 문장력이 그가 가진 작가로서의, 아주 중요하고 본질적인 재능이다. 이런 예술이라면 얼마라도 주머니를 털어서 경험하고 싶은 의향이 있다.
글이 좋다는 것은 또한 쉽게 읽힌다는 의미다. 독서 피로도가 낮다. 이 부분은 물론 본질적으로 작가의 능력이지만, 한글책의 경우 번역가와 출판가(편집, 표지디자인을 등을 맡은 이들)의 기여도 중요했다. 책 표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내게는 이 책을 읽는 경험을 전체적으로 즐겁도록 만드는 요인으로 표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아주 신선하고 약간 달지근한 분홍색 딸기 우유를 쏟아부어 만든 든한 이 책의 표지컬러와 질감이 이 책 내내 흐르는 차갑고 맛있는 우유의 느낌을 지지하며 물들인다.연비 좋은 하이브리드 북 같은 느낌이랄까. 표지를 비롯한 책의 전체적인 느낌이 사랑스럽다. 저자인 존 코널의 에세이가 담고 있는 통찰은 상투적이거나 가볍지 않다. 행간에 숨겨진 목초지의 풀내음 같은 살아있는 통찰을 책의 바디감이 더욱 푸릇푸릇하게 견인하는 부분이 있다. 책 디자인이 무겁지 않으면서도, 신선하고 즐거운 느낌으로 책을 읽어나가도록 독려한다. 번역도 좋다. 번역가 노승영의 프로필(번역 이력과 환경단체에서 일한 경험)이 동물과 자연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원문이 한국어 문장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에서 번역가의 기여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인문학이나 종교서적이나, 진지한 류의 에세이는 디자인과 편집, 번역도 그러한 내용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책 디자인과 엄격한 번역이 그토록 진지한 내용을 지긋이 눌러주는 것이다. 통찰과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그처럼 적극적으로 집중하도록 하는 독서 경험에도 그 나름의 배움과 재미가 있으리라. 하지만 이토록 편안하면서도 기분 좋게 통찰을 주는 책읽기라니. 고맙다. 이렇게 내용부터 겉모습까지 신선한 우유미를 가진 이성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초신선은 이즈음 새롭게 떠오르는 식품 상거래 개념으로 알고 있다. 가령 오늘 새벽에 낳은 달걀을 당일 아침 가정에 배송에 주는 서비스 같은 것이다. **사실 서평 마감일이 하루 지나서 조금 밖에 못 읽고 이 서평을 썼는데, 정말 느낀 점만을 갖고 썼다. 더 읽고, 읽는대로 또 수정을 해보려고 한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고 송아지를 직접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다. -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