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기담 수집가 : 두 번째 상자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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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를 이틀을 내고 주말을 껴서 연달아 쉬니 좀이 쑤신다. 누워만 있기는 시간 아깝고. 이러려고 연차를 냈나 싶어 가장 가까운 서점에라도 간다. 회전문을 지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책을 먼저 찬찬히 구경한다. 모퉁이를 조금 돌아보니 국내 에세이 코너다. 여기서 바로 <헌책방 기담 수집가 : 두 번째 상자>를 발견했다. 장강명 소설가님이 기다리고 나도 기다린 속편이 드디어 나왔구나!


이전에 <헌책방 기담 수집가> 첫 책을 재밌게 읽었었다. 워낙 읽고 싶은 책이 많았기에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2편을 다 읽고 나서 읽다만 첫 책의 나머지마저 다 읽어버렸다. 무척 기쁜 마음에 바로 집어 들어 옆구리에 끼고는 서점 나머지를 돌아다니며 두어 권 더 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책도 너무 자주 사면 안 되나 보다. 오랜만에 서점에 와서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설렜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 : 두 번째 상자>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역시 흡입력이 엄청나다. 이틀에 걸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모두 다 읽었다. '헌책방'과 '기담'이라는 이 두 키워드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뭔가 한국판 판타지 같다. 영국에 해리 포터와 호그와트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과 기담 수집가가 있다. 하지만 헌책방에서 기담 수집 중독자(?)가 수집한 이야기들은 모두 다 사실이라는 사실...! 실제로 읽다 보면 혹시 과장하거나 양념을 친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샘솟기도 한다.


미해결 사건으로 남은 범죄 사건 파일을 읽는듯한 기분이 들었던 2부 목요 문학회 미스터리. 행방이 묘연한 그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오밤중에 무드 등 하나만 켠 채로 읽는데 온몸에 소름이 몇 번이나 났다.


3부 심야 책방 기담회는 무척 재밌게 읽고 봤던 심야 식당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래서 이 제목이 더 반가웠다.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만 여는 심야 책방을 소재로 소설이나 만화를 연재해도 무척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고쳐먹는다.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는걸.


이런 이야기에 얽힌 공통된 물건이 책, 심지어 헌책이라는 점이 매력 있다.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또 쌓여버렸다. 외전까지 정말 완벽했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 세 번째 상자도 나오기를 기대한다.


헌책방에 가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만간 헌책방에 들러서 나와의 인연이 될 책을 만나러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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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우리 몸을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 학문

이 책은 해부학 입문서이다. 어느 누가 읽어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쓰여있다. 개인적으로 관심도 조금 있었던 터라 그런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기술적인 부분을 다루었다기보다는 인간 존재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정신'보다는 '몸'을 통해 인간 존재를 탐구하는 책이라고나 할까.

해부학도 다른 모든 학문의 출발이 그렇듯, 알고자 하는 단순한 욕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해부학'하면 어떤 느낌이나 감정이 먼저 떠오를까? 이 책의 저자는 그림이나 글로만 공부하는게 아닌, 진짜로 죽은 인간의 몸을 직접 해부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다. 의사면허증도 있는 사람이 내과나 외과도 아니고 해부학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까? "왜 (하필이면) 해부학을 선택하셨나요?"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무의식에 있던 해부학에 대한 선입견을 발견했다.
저자는 사람들이 사체를 해부하는 것에대해 기분나쁘다는 태도를 갖는 것에대해 꼬집는다. 마치 자신이 배설한 분뇨를 일명 '똥퍼'가 퍼가는 모습을 더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꼴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그런 일'은 되도록 이면 피하는게 좋지 않을까. 내과나 외과에 비해 해부학은 좀 낮은 수준의 학문은 아닐까. 특히나 직접 사체를 해부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이라며 해부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이나 글을 통한 공부면 몰라도, 직접 사체를 해부한다면? 그래도 여전히 상상만해도 무섭고 오싹한 기분부터 생긴다. 인간도 아닌 고양이나 새가 길거리에 죽어있는 모습만 봐도, '으웩 징그러워!' 하곤 했다. 하물며 같은 종족인 인간의 사체랴. 죽은 사체의 동맥에 포르말린을 주입해 썩지 않게 한 다음, 피부를 가르고 근육을 가르며 이곳저곳을 자르며 살펴보는 걸 '굳이' 왜 하는 걸까?

질병의 원인을 파헤쳐서 몸을 고치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질병을 고치기 위한 혹은 사망 원인을 법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해부는 굉장히 최근에 생긴 방식이다. 그보다 더 최초는 미술해부이다. 천재 중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활동하던 시대인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술을 위한 해부가 거의 필수였다고한다. 그렇다면 조각하거나 회화를 위해서 해부하기 시작한걸까? 저자는 단순히 '무엇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과 대답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왜 인간은 해부하기 시작한걸까? 하는 물음을 추적하고 또 추적하다 마지막에 이른다.

"인간은 무엇이든 알려고 하고, 알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알려고 한 것이다. 모든 학문은 '알고 싶다'에서 비롯된다."-p.81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으니까요."

그렇다. 알고 싶은 걸 탐구하는 건 본능적이고 재미있는 일이다. 도움이 되는 건 그 다음의 일이다. 그리고 앎을 향한 탐구에 높고 낮은 수준의 학문이란 없다. 오히려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건 왜 궁금한거야? 하는 그런걸 파헤쳐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게 있을까?








궁금증

Q. 왜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그림은 발이 없는데, 살아있는 몸에게는 발보다 손과 얼굴이 중요할까?

우리가 상상하는 유령은 발이 없다. 그리고 살아 생전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는 얼굴과 손이다. 얼굴과 손만큼은 옷으로 가리지 않는다. 가리면 불편하다. 그만큼 신체 부위 중에서 중요하다는 뜻이다. 전체적으로는 몸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얼굴과 손은 무의식적 정보를 전달한다. 말로는 거짓말을 말해도 표정은 거짓말을 못한다. 손 또한 표정이 있다. '밥을 먹다'라는 단순한 정보는 손으로 전달할 수 있고, 악수도 한다. 살아 생전에는 손과 얼굴에 비해 발은 그다지 정보 전달의 역할로는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데 몸이 죽고 그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발이 없다. 왜 우리는 발을 그려넣지 않을까? 걸어다니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같다.


Q. 만약 서양에서 해부학을 도입하지 않고, 동양에서 독자적으로 해부학을 발전시켰다면 어떻게 접근했을까?

서양은 인간의 몸을 기계로 바라본다. 몇 세기 전에 해부학 서적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서양의 이런 몸에 대한 관점이 유입된 것이다. 그러니 몸을 기계로 보는 방식은 서양의 관점이지 동양의 관점은 아니다. 인체를 단순한 기계로 바라보는 관점은 인체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단 한 가지에 불과한 것 아닐까싶다. 만약 서양에서 해부학을 받아들이기 전에 동양이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면? 하지만 서양이 해부학이 동양 보다 먼저 발달할 수 있던 데에는 바로 몸을 기계로 바라보았기 때문인것 같다. 장기나 조직을 부품으로 보고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긋는 다는 것이니까. 동양은 기관 - 장기 - 조직 - 세포 - 분자 - DNA 이렇게 점점 세부적으로 파고들며 분석하지는 않았을 것같다. 피부와 근육 정도만 해부해보고, 들여다 본 내부구조에 감탄해하며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Q. 본능에 충실한 현대인, 왜 유독 지적욕구에만은 충실하지 못할까?

생존본능에는 식욕, 성욕 그리고 지적 욕구도 포함한다. 식욕을 자극하는 광고와 먹방은 정말로 많다. 성욕도 남에게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는 아무도 억압하지 않는다. 결혼 후 불륜에 대해서는 사회적 지탄이 크고, 연애할때 바람둥이라며 비도덕적이라는 시선을 받긴 한다. 하지만 절에 들어가서 세속과 분리되어 철저히 혼자 살라고 권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순진하면(?) 저평가 받기도 한다. 천주교의 신부님에게는 어떻게 신부님으로 잘 사시냐는 의문을 품는다. 이 말에는 "식욕 혹은 성욕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일상생활이 가능한가?"하는 물음이 내포되어있다.

그런데 지적욕구에 대해서는 오히려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먹고 사는데만 필요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너무 많이 공부해서 그만 공부하고 싶은 심정이 절절할 것이다. 하지만 지적 욕구는 내가 아는 바로는 다른 두 욕구 처럼 완결이 없다. 얼른 먹는 걸 그만 뒀으면 좋겠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만약 그런 기분이 들면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는 반응일 수도 있다. 오히려 맛있는게 세상에 너무 많아 행복할 지경이다. 그러니, 공부를 당장이라도 관두고 싶은 심정으로 공부하는 건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지적욕구를 충족하고 있는 건 아닌 듯 하다. 어쩌면 지나친 식욕과 지나친 성욕은 지적욕구에 대한 불만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와 동시에, 욕구는 욕구일 뿐인데 지적인 활동에 대해 우리는 너무 대단한 취급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령 누가 1년에 책 300권 읽는다 하면 마치 자신과는 다른 별의 사람이라는 시선을 보낸다거나, 공부 열심히 해서 스카이대에 나온 사람을 보고 자신과는 다른'급'의 존재라 우러러본다. 우리는 밥을 많이 먹거나 잘 먹는 사람을 좋게 볼수는 있어도(오히려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대단한 취급을 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사실은 식욕과 성욕처럼 지적욕구도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가 '정상'이 아닐까?

"사회가 종종 해부학을 금기시해온 이유가 어쩌면 너무 재미있어서가 아닐까?" 라고 반문하는 저자의 말에 이 질문이 떠올랐다. '재미있다'라는 건, 지적욕구를 제대로 충족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려서이다. 내가 만약 사춘기때, 겉으로 보이는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큼 나의 몸 그 자체에 대해 지적 호기심으로 탐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조금 더 행복하고 건전한 시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사는 이 시대는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는 사회는 아닐까? 그리고 왜 우리는 인간 자신의 몸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왜 그런 징그러운 해부학을 하세요?"에 "왜 그렇게 책을 읽는거야?" 라는 질문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결국엔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 "재미있으니까요." 지적욕망을 누리며 사는 건 재미있는 삶을 사는 전제조건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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