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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강의 -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박노자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며칠뒤면 2018년을 맞이하게 되는 연말이지만 올해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념할 일이 많은 해였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종교개혁 500주년과 20세기를 풍미했던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대표적이다. 어느 사건에 현재적 의의를 둘 지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가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잃었던 1920~30년대 독립운동과 80년대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학생운동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 역사 속에 아로새겨진 흔적은 러시아 혁명이 더 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올해 국내에선 러시아 혁명 관련 서적들이 속속 출간되었다.「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혁명의 러시아 1891~1991」,「E. H. 카 러시아 혁명」,「예술이 꿈꾼 러시아혁명」, 트로츠키의「러시아 혁명사」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로운 외부인의 시각으로 조명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고 있는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수도「러시아혁명사 강의」라는 이름의 책 한 권을 보탰다.
책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2007~2016년 대학에서 강의했던 러시아혁명사 강의록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녹여 러시아 혁명의 전후 맥락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세 중심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러시아 이외 지역 즉 유럽의 좌파정당과 중국‧북베트남‧인도 등의 독립운동에 러시아 혁명이 미친 영향과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뒤따라온 공산당 독재하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적색개발주의의 기원과 실제, 가치와 한계 등을 분석했다.
전반부에서는 근대 자본주의 모순을 탁월하게 분석한 급진적 혁명가이자 사상가였지만 혁명과 집권과정에서 보여준 내부 비판자 탄압 등의 비민주성으로 독재의 길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한 레닌, 세계혁명론을 내세운 이상주의 혁명가로서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끈 지도자이지만 국가만능주의에 빠졌던 트로츠키,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을 내세워 이민족과 내부 비판자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국가폭력 체제를 구축한 스탈린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이어 의회정치를 통해 기성질서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모순적인 입장의 유럽 좌파정당이 러시아 혁명중 겪은 부침을 이야기하며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를 들고 있다. 1936년 총파업으로 사회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할 수 있게 되는 등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음에도 현실에 안주하고 알제리 독립전쟁과 68혁명 상황에서 안이한 대응으로 현재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 좌파, 노동당과의 차별화에 실패하고 소련에 대한 추종‧맹종‧묵종으로 진보세력의 명분을 스스로 무너뜨린 영국의 좌파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한국 진보정당이 그러한 오류를 답습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저자는 극단적인 사회모순 해결, 빈곤타파 및 자주적 근대화의 모색 등이 필요했던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을 목도하면서 유사한 사회적 상황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해 그 영향력 하에 있었던 아시아 여러나라의 사례도 살폈다. 특히 1919년이후 유럽의 핵심부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현실인식 속에서 아시아의 식민지 체제 전복으로 세계 혁명을 촉진시켜야 한다는 전략하에 이루어진 민족주의 세력과의 합작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공산주의 확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만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해방이라는 본연의 목표보다는 민족국가 단위의 발전에 치중한 점을 지적한다. 끝으로 이런 적색개발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문제점 등을 검토하면서 과거의 소련이나 중국, 북한과는 다른 사적자본이 아닌 국가가 주체가 되는 비시장적 산업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 피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다른 책「다시 돌아보는 러시아혁명 100년」의 총론에서 우리는 지금도 10월 혁명의 연장선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10월 혁명 이후 소련이 성취한 여러 무상복지 덕분에 체제경쟁을 하던 서구도 복지개혁을 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밝힌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일제에서 해방된 뒤 이승만 정권에서 실시한 토지개혁이 대표적이다. 북한에서 급진적인 무상몰수‧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이루어진 덕분에 체제의 붕괴를 염려했던 남한이 제한적인 방식이라도 채택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 1992년 발간된「역사의 종말」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0세기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21세기 초반 10년간 민주주의의 썰물현상과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보면 성급하고 선동적인 선언에 불과한 것이었고 미‧중‧러 등 열강의 각축, 신자유주의 팽배로 인한 대중일반의 경제적 고통, 세계적 장기 침체 등에서 볼 수 있듯 현 체제의 한계는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참고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러시아 혁명을 꼽으며 출간된「러시아 혁명사 강의」는 혁명 주역 레닌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현지 상황을 생생히 목격하고 한국적 상황에도 익숙한 박노자 교수의 생각이 잘 요약된 친절한 안내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