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속의 유령 암실문고
데리언 니 그리파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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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방 안에 있는 다른 여자들, 내 하루 속 얼마나 많은 순간이 그들의 하루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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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이것은 여성의 텍스트다.

데리언 니 그리파는 어느 틈엔가 숨겨져 있을 한 여성의 흔적을 찾고자 한다. 아일린 더브 니 호널. 17세기에 그녀의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사라진 여성 시인. 그녀를 찾는 행위는 작가의 삶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배어져 나온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큰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셋째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또 다른 모유가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유축까지 하며 낮과 밤을 지나는 모든 시간에 단 한 사람, 아일린 더브의 삶의 궤적이 그녀의 시간을 관통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어디에도 그 흔적을 쉽사리 찾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누이,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존재하는 아일린 더브의 삶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한정된 텍스트로만 설명된 그 모순들을 마주하며, 데리언 니 그리파는 그녀 자신이 되어 ‘목구멍 속의 유령’을 불러내곤 한다.


∕ 유독 피곤하다고 느껴지는 아침에는 잠깐 공상에 잠기거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10분쯤 읽기도 하지만, 오늘 나는 다른 대부분의 날처럼 움직인다. 즉 <아트 올리어리를 위한 애가>의 지저분한 복사본을 집어 든 뒤,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초대해 내 목구멍 속에 잠시 출몰하게 한다. 하루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하는 작은 침묵의 시간을 나는 이렇게 채운다. 그 여자의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들어 씨근거리고 윙윙거리는 유축기 소리와 합친 다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듣는 것이다. 복사본의 여백 위에서, 내 연필이 대화를 시작한다. 수많은 나와의 대화. 생각을 적어 둔 기록들과의 대화. 변경할 수 있는 기록들과의 대화. 그 대화 속에 있는 각각의 물음표는 시인의 삶에 대해 묻지만,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결코 묻는 법이 없다. | 21


끊임없이 생각하고 떠올리며 아일린의 삶을 유추했던 작가는 그 시간 속에 계속해서 글을 쓰고 몇 번의 시를 발표하며 자신의 삶을 이어나갔고, 그녀도 모르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그 힘은 작가에게 문학상을 안겨주고 상금으로 집을 사는데 보탤 수 있는 여유까지 쥐어주었다.

무언가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데도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라는 믿음 한 줄 만으로 이어졌던 불안하고 지난한 시간이 어느 순간 작가의 삶 자체가 되었고,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결과로 담겨져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아주 천천히.

지치지 않고 걷는 삶이 얼마나 살얼음 같은지 나는 너무도 알 것 같다. 그래서 이 여성의 텍스트를 꼭 기록하고 싶었다. 삶의 한 편에서 끊임없이 애쓰고 있을 모든 사람에게,

“다 괜찮아질 거예요.”

이것은 여성의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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