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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밤의 코코아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마음이 뜨뜻해지는 연애소설을 만났다. 펄펄 끓으며 내 속을 홀랑 태워버린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적지근하게 아쉬움을 준 것도 아니었다. 대고 있으면 손바닥 안쪽이 조금조금 빨개질 만큼, 딱 그만큼 뜨뜻했다. 세상을 바꾸자는 투사도 나오지 않았고 살신성인 봉사하는 주인공도 없었지만 착하고 평범한 여자들이 나를 울렸다.
일도, 사랑도, 가족도, 삶도, 주어진 위치에서 전심으로 노력하면 당연히 좋아지는 줄 알았다. 만사형통은 아니더라도 최선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 그래, 그녀들은 몰랐던 것이다. 몰랐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줬던 것이고, 남겨졌을 때 벙벙했던 것이고, 아직도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것이다. 앞뒤 재지 않고 사랑에 푹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누리고 싶은 이것저것을 다 손에 쥐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상대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줄 알았던 호기로움도, 모두 이십 대니까 가능했던 생각과 착각이 아닐까.
<고독한 밤의 코코아> 단편집에는 다양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오로지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면서 상대를 배려한다고 여기는 고지식한 여자, 연애가 시작되기 전의 설렘을 즐기는 여자, 사랑도 하면서 여유도 챙기고 싶은 여자, 비밀스러운 연인과 좀 더 확실한 관계를 바라는 소심한 여자, 배경이나 환경을 따지지 않고 진실한 사랑을 하고 싶은 여자,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여자,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소중한 사랑을 떠나보내고 만 여자.
이 우둔하고 순진한 여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실수로 혹은 착각으로 당시 제 삶의 가장 큰 존재를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전작 <서른 넘어 함박눈>에 등장한 언니들만큼 요물은 못 되더라도,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고 사랑을 이어나갔던 그녀들은 삼십 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리고 나는 서툴지만 우직한 그 사랑에 더욱 마음이 갔다. 그래서 때로는 그녀들이 눈치 없이 행동하고, 멍청한 선택을 연발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앞에서 끙끙 마음만 졸이다가 고이 보내주고 마는 소심함을 보이더라도 그저 안타깝고 그저 애틋하기만 했다.
“그럼 잘 가. 건강하게 지내!”
그는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여러 가지 추억이 담긴 악수였다.
회사를 그만두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이 악수는 그만큼의 희생을 지불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눈은 욕정에 젖어 있었고, 내 손을 잡은 그의 촉촉한 손이 등판에 새틴 조끼를 걸친 섹시한 매력만큼이나 내 마음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 손을 놓으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_p.88 <세상엔 좋은 남자가 가득할 거야>
그러면서 정반대의 상황도 그려보았다. 도오루에게 ‘헤어지지 않을 거야.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고 울며 매달려보면 어떨까. ‘다시 한번 기회를 줘. 당장 회사도 그만둘게. 일 안 할게……’ 라고.
‘늦었어? 너무 늦은 거야’라고.
‘내겐 당신이 필요해. 그걸 모르겠어’라고.
_p.128 <너무 늦은 거야?>
선생님의 얼굴은 역시 내게 두두 하고 가슴 뛰는 그리운 안타까움을 불러왔지만, 그 옛날 순수의 결정과도 같았던 마음하고는 질이 달랐다.
_p.168 <공기 통조림>
이건 소설이고 그녀들은 주인공일 뿐인데 내가 너무 감정이입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 마음은 소설에 꼭 들어맞았고 인물들의 감정 곡선을 따라 같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후회하고 그리워할 그녀들이 눈에 선해서 마음이 저릿저릿했지만 어떤 선택이든 결국 자신의 몫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뿐이다.
고독을 전해준 그녀들 덕분에 오늘 밤은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코코아처럼 따뜻하고 달콤하면서도 몸도 마음도 한없이 녹녹해지는, 그런 착한 고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