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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쓰시마 유코 지음, 김훈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쓰시마 유코의 단편집 『묵시』를 읽었다.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담담하고 깔끔하고 고즈넉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독립된 작품이라고는 해도 『묵시』 안의 단편들은 유기적이라 할 만큼 많이 닮아 있다. 내 바로 옆에서, 마치 내 일부인 것처럼 존재했던 대상을 잃은 후의 상실감. 지금까지 발맞춰 걸으며 함께 만들어 왔던 발자국을 이제는 혼자 찍어야 하는 외로움과 쓸쓸함. 앞으로 더 가지 못하고 계속 돌아보며 그리워하다가 쭈뼛쭈뼛 돌아가서 그 발자국 위에 내 발 하나를 슬며시 대보기도 하고 어느새 앞서가고 있는 발자국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남겨진 자들은 주로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였다.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고독에 휩쓸리는 것이 두려웠던 딸.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 어머니 반대편으로 멀리멀리 도망쳤지만, 결국은 그 시절의 어머니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그녀와 마주보는 사이가 됐다. 그림만 놓고 보면 비극적이고 비애가 서린 풍경이겠지만 그녀들이 안쓰럽거나 청승맞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실을 겪은 여자들을 그리면서도 감상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질척한 감정을 쏙 뺀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깔끔한 문체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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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창은 집안의 다른 창문과 달리 거의 밤에만 보게 된다. 그것도 벌거벗고 밤의 창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상태로 바라보는 창이 있을까. 죽은 이가 그런 창을 놓칠 리 없다. 밤이 되고 욕실 창에 불이 밝혀지면 사자死者는 그리운 마음에 성큼성큼 다가와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 댄다. … 언제까지 찾아올 생각일까, 이젠 이쪽으로 들어올 수 없는데. 아무리 욕실 창에 붙어 있어도 이제는 결코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죽음의 의미, 그것만이라도 오빠에게 전하고 싶었다. _「욕실」 중 |
남겨진 이의 눈에는 죽은 아들의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움직임이 보인다. 흐릿하지도 단편적이지도 않은, 또렷하고 아주 말끔한 모습으로. 남겨진 이는 기쁘고도 감동스러워 다른 이들을 잡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진지하지 않은 타인의 반응에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죽은 이는 나를 위해 찾아온 것이고, 그래서 내 눈에만 보이는 거니까. 나만 알아주면 되는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내색도 없이 스치듯 주고받는 눈맞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는 것 같은 행복감. 그 모습을 은밀히 지켜보는 나(독자) 또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마치 소설과 묵시를 주고받은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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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좁은 집에도 아들아이가 숨어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깨닫고 나니 조금도 뜻밖이 아니었다. 아들아이는 작디작은 알갱이 같아서 딸아이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면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다. … 나는 지금도 여전히 슬픔을 모른다. 아이가 여기저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무어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작은 알갱이가 된 아이가 매일 내게 기쁨의 빛을 전해준다. _「슬픔에 대하여」 중 |
남동생을 잃고 홀로 된 딸아이를 보는 엄마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죽은 동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거나 그를 환기시키는 무엇을 볼 때, 엄마는 슬그머니 딸의 눈치를 한 번 더 보게 되지만 딸아이는 무덤덤하고 무신경한 척 제 인생을 살아간다. 아들아이를 잃은 일로 딸아이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덩달아 높아지긴 했지만, 무신경한 척 하려는 아이를 부러 자극할 이유도 없을 터. 어느새 훌쩍 자란 딸아이를 한 발짝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다. 자식을 소유하려 하지도 미화하려 하지도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정. 이것이야말로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은근하고 완벽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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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부모의 묘한 꿈이 자기 몸으로 파고들었음을 깨닫고 반발, 혹은 동의하면서 자신이 부모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부모와 아이가 연결되어 있다면 끈은 그것뿐이다. 부모라 해도 결국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꿈을 뽑아내는 게 고작이다. … 이 아이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이 세상을 살고 싶었다. _「‘신비한 소년’」 중 |
『묵시』는 대상뿐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매일매일 죽은 이를 회상하며 그리움 속에 빠져 살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하고 억지로 힘을 쥐어짜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아간다. 오늘은 오늘대로 내일은 내일만큼, ‘지금’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히 살아가는 결연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그만큼 자주, 오래오래, 죽은 이를 꺼내어 보고 생각하며 울고 웃고, 다시 또 그리고 좌절하다가 초연해졌을 날들이 상상돼 사실은 마음이 아프지만, 나에게 안타까워할 자격이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말도 마음도 아끼게 된다. 소설이 보여주었듯, 나도 이 소설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만이 말 못 할 나의 마음을 전하는 길이리라.
『묵시』는 화장기 없는 어머니의 말끔한 맨 얼굴 같은 소설이다.
그래서 더 정겹고, 소중하고, 시시때때로 울컥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