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아리 장편소설
전아리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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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게 좋은 작품을 만나 기분이 좋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모르던 작가이거나 우연히 책을 집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앤>의 작가 전아리는 일단 어리고, 예전부터 백일장을 독식하며 문학천재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나역시 글을 쓰고 싶은 한 사람으로서 그 모습을 그냥 좋게 볼 수도 없었다. 솔직히 부럽기도 했고 고깝기도 했다.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은 백일장 나름의 공식이 있어 거기에 맞춰 매끄럽게 잘 쓰면 상을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읽어본 백일장 수상작도 다 비슷비슷하게 어른스럽고 깔끔하고 훈훈했다. 또 내가 바로 전에 <날짜변경선>을 읽은지라, '이거 뭔가 있는거 아니야?' 하면서 괜히 삼류 추리극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앤>은 나의 못된 시기심과 선입견을 깨준 고마운 책이었고,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를 잡아당기는 젊은 작가를 알려준 고마운 책이었다. (잇힝)

 

<앤>은 굳이 분류하자면 추리? 미스터리? 쯤으로 볼 수 있을까? (그냥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장르 덕도 있겠지만, 작가가 소설을 끌어가는 힘이 대단하다. 술술 읽히거니와 다음 장을 빨리 넘기고 싶어 나 혼자 안달했다. 읽으면서 김영하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럴>!) 생각이 많이 났다. 냉소적인 시각과 현실 비판적인 스토리, 그리고 이기적인 주인공이 겹쳐서 그랬던 것 같다.

 

 

유성은 왜 내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나. 그는 내가 자신을 밀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걸까.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호소해도 내가 동요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거였다.

 

 

 

<앤>에는 좋은 비유도 많이 눈에 띄지만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이 있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작품은 또한,  현재와 과거를 적절하게 오가며 지루하지 않으면서 쓸슬하고도 애잔한 정서를 남긴다. 거칠고 빠르게 달리는 카레이싱 무대 같지만, 곳곳에 어디서 본듯한 예쁜 숲길을 만들어놓아 숨쉴 곳을 만들어준달까.

 

주인공 '해영'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영은 지 혼자 잘난 맛에 엄마, 아빠, 동생, 봉다리, 기완, 황정혁을 무시하고 세상을 내리깔며 거만하게 구는 점이 싫었는데, 그 속에서도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놀랐다. 무서웠다. 나 또한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속물적 마음이 자꾸 내비쳤다.

 

그렇지만 현실을 달관한 것 처럼 보이는,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그려지는 '유성'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 착하고 따듯한 마음이 있었지만, 유성은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유성 처럼 속내를 알 수 없게 사느니, 난 차라리 속이 빤히 보이는 사람이고 싶다. 차라리 멍청한 내가 좋다.

 

조금 작위적이라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작품의 초중반에 해영이 생각한대로 일이 척척 풀리는 부분이나, 필요한 정보를 엿듣는 것 같은. 그러나 '너무' 과해서 불편한 것 까지는 아니었으므로, 패스!

 

주홍을 잘 안다고 지켜줘야 한다고 계속 합리화시키는 해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주홍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 폭력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사실은 주홍을 가두고 무시하는 정신적인 폭력이다. 그런 해영은 역겹고 재수없기도 하지만 왠지 안쓰러워 보인다. 그런데 그런 주홍의 세계가 산산조각 나버려서 너무 깜짝 놀랐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없는 유일한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앟는 것이다. 나는 주홍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상황 파악에 서투르고 세상 앞에서 쩔쩔매기만 하던 계집아이를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게끔 보호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했다. 알게된 지 얼마 된지 않은 남자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라니. 이런 모자란 부분이야말로 내가 계속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증거였다.

 

<앤>은 재미도 있었지만, 많은 부분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줘서 좋았다. 나 역시도 <앤>을 읽으며 폭력이나 관계 뿐만 아니라 대중을 지배하는 매스컴이나 그런 매스컴의 정치적인 논리, 쇼맨쉽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무 각성도 비판도 없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중에 대한 일침을 가하기도 가하기도 했지만, 하는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되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더라.

 

"살면서 머리 좋은 게 제일 잘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천만에. 그 머리 위에서 나는 놈들은 따로 있다. 똑똑한 놈보다 무서운 건 자기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인간이야. 이성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아주 다른 인간처럼 보일 수 있는 놈들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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