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동 안개소년
박진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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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안개를 뒤집어쓰고 나온 인간이 있습니다. 그를 받는 순간 간호사는 열 손가락을 팔랑대며 비명을 질렀을 겁니다. 하지만 안개소년은 머리에 뿔이 돋거나 이빨이 삐죽삐죽하거나 뱀 혓바닥을 날름대지 않습니다. 악마도 괴물도 아닙니다. 그저 가스등 불빛처럼 뿌연 안개에 가려져 얼굴이 안 보일 따름이죠.> (p.10)

읽던 페이지에서 잠시 고개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태어날 때 안개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아이 - 안개가 온 얼굴을 뒤덮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상상해보았다. 그런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 상상력의 부재에 땅을 치며 계속 책을 읽어내려갔다.

대부분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불행하듯, 안개소년 역시 불행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버렸고, 외할머니만이 그를 맡아 키웠다. 외할머니 역시 손자를 연민으로 바라보았으나 따스하게 안아주지는 않았다. 그저 주어졌으니 키울 뿐, 큰 사랑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광동 반지하방에서 성장한 안개소년은 낮에는 집에 머물다가 밤이 되면 비로소 세상과 마주한다. 후드티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이다. 가끔 선글라스를 벗고 세상 사람들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또래인 지나를 만나기도 하고, 또한 회장을 만나기도 한다.

안개소년은 그의 희귀함 때문에 회장의 눈에 들었으나, 또한 그 때문에 산 채로 실험대에 오르기도 한다. 타의에 의해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나온 소년은 윤덕호와 강만호를 만나 그 자신을 하나의 오락거리로 만들어 돈벌이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돈벌이도 잠시, 다시 회장의 계략에 빠져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게 되고 안개 소년은 외할머니인 로즈마리와 함께 보광동 반지하방으로 돌아가게 된다. 안개 낀 얼굴과 함께.

새벽에 출근할 때, 아주 가끔이지만 짙은 안개를 만나곤 한다. 아침 뉴스에서는 안개를 주의하라며 떠들어대지만 난 내 주위를 둘러싼 안개가 참 포근하게 느껴졌다. 앞이 보이지 않아 위험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좀 더 내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느낌이라 안개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안개소년'은 비록 얼굴이 안개로 뒤덮여 형체가 명확하지 않다. 그 자신도 자신의 얼굴 생김새를 모르고 남들 역시 그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런지. 모두들 웃고는 있지만 웃는 표정 속에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긴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건 아닐까. 언제든 남을 해치고 찢어버릴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안개는 저 멀리멀리 숨겨놓은채 말이다.

안개소년의 탄생부터 세상으로 나오기까지의 여정은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작가의 거대한 상상력에 갇혀 헤맨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였다. 미로의 출구를 명확히 보여주었더라면 좀 더 안개 소년과 친해졌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쩌면...압구정역 어딘가를 진짜로 헤매고 다니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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