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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시는 마음의 평화를 준다.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지만, 문장 그대로다. 온 종일 요동치던 가슴이 시 한자락을 읽어내려가며 평화로워진다. 박진감 넘치는 추리소설도 좋고, 눈물이 찔끔나는 로맨스 소설도 좋지만 어수선하고 복잡스러울땐 시가 최고다. 앞뒤 순서 없이 손에 펼치는 대로 읽어도 아무 상관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어서 좋다. 그냥 내 손이 닿는대로 편안히 읽어나간다. 그러다가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마냥 읽어내려갈 수도 있고, 혹은 마음에 드는 시 한구절에 쉼없이 눈길을 주기도 한다.
오랫만에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주는 시집을 만났다. 끌림으로 많이 알려진 이병률님의 시집이다. 끌림을 읽으며 그의 감성에 녹아내렸던 나는, 이번 시집을 받아들고는 알 수 없는 설렘에 빠져들었다. 어떤 문장으로 나를 시의 세계에 빠져들게 할 지....기분좋은 설렘이 내 주위에 맴돌았다.
찬란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를 조그맣게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찬란'이라는 감정을 어쩜 저렇게 잘 나타냈을까. 어쩌면 모든 시인들은 이 세계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한 문장안에 함축하는 그들이야말로, 모든 것을 주무르고 재단하는 주인이라고.
길을 잃고 있음에도
맞은편에 오는 차와
내가 타고 있던 차가 부딪칩니다
그 순간 세상 어디에선 밀감이 쏟아지고
서쪽 하늘로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솟구칩니다
차를 멈춘 채
중앙선에 걸쳐 있는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앞을 보아야 했으나 옆을 보았습니다
비로소 당신을 태우고서야 당신을 넘은 겁니다
그날 후로
내가 달려온 차선 쪽으로만
아카시아가 떨어집니다
늘 지나다니던 길이 새삼스럽게 낯설었던 오후, 이 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차를 멈추고 멍하니 길 건너편을 내다보던 내가 떠올라 이 시에서 한참을 머무르고 또 머물렀다. 뚝뚝 떨어지던 아카시아가 덮으려던 것이 일말의 사건만이 아니듯이, 내가 지금 덮으려는 것은 지루한 일상이 아닐거다. 그렇게 내 마음속을 관통한 이병률 시인의 시와 함께 따뜻한 새 봄을 맞이했다. 찬란한 봄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내 마음속에 들어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