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파리의 을씨년스러운 골목을, 코트깃을 세우고 느릿느릿 걷는 남자.
나 또한, 그 남자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 남자는 십 년 전, 자신의 과거를 깡그리 잃어버린 채 낯선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점점 늘어나는 단서들. 그리고 사람들의 추억. 빛바랜 몇 장의 사진. 그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려 애쓴다. 한 장의 낡은 사진과 부고를 가지고 추적을 시작하고 피아니스트를, 사진사를, 멋진 정원이었을 을씨년스러운 곳에 유물처럼 남아있는 정원사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환상으로 여겨지던 과거에 살이 입혀지게 된다. 언젠가 한 번 맡았던 향수 냄새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게 되고,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기억 한 구석에 살그머니 자리잡고 있던 장소가 눈앞에 쭉,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1940년대의 불안하고 복잡했던 파리의 모습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드니즈-아시아의 느낌을 풍기던 긴 금발머리의 그녀-는 진짜 존재했던 인물일까? 내 친구 프레디와 그의 아름다운 여자친구 게이 오를로프는 정말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일까?

흔히들 과거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한다.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훨씬 더 희망차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가 없는 사람이 미래 또한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214p>

비록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한 과거일지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는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중요하고, 망령처럼 내 앞에 가끔씩 나타나도 미소지으며 편안히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남자는 나와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아뇨,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는데요. 그렇지만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과거 속의 나는 과연 내가 맞을까? 그럴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그렇기에 내 낡은 박스속의 사진들을 꺼내보며 과거를 추억할 때도 서먹한 느낌과 아련한 느낌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삶이 힘들어 벽에 부딪칠 때, 내 기억의 고향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과거가 떠오르는 건...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늘어가는 단서의 무질서함 속에서, 가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 책을 잃는 내내 패트릭 모디아노의 마술같은 글솜씨에 빠져들어 오랫동안 행복했다. 기 혹은 페드로와 함께 과거를 찾아가며 내 과거에 푹 빠져들어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들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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