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날도 썹과 수만이 밴드부실에 남아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수가 썹의 연주를 보는 동안 수의 시야 속으로 가늘고 흰 다리가 들어왔다. 두 다리는 약간 벌려져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수는 다리의 라인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더는 짧게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여진 교복치마를 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아이가 팔짱을 낀 채 썹의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광 속 아이의 얼굴은 썹을 바라보고 있는 청중이 아니었다. 두 남자 사이에서 시선을 이끌어내는 주인공으로 비춰졌다.
마침내 연주를 마친 썹을 향해 여자아이가 박수를 쳤다.
“야. 너 짱이다!”
당황한 썹과 수를 뒤로 하고 여자아이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가 걸어가는 벽 쪽으로 비스듬히 세워진 기타가 보였다. 그녀가 기타커버를 벗겨내기 위해 몸을 굽혔다. 더 이상 짧을 수 없는 치마가 더 올라가는 순간 수는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남자 둘을 두고 그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수는 뭔가 불안하고 팽팽한 기운이 밴드부실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 보다 좀 더 작은 여자아이가 가져온 기타는 그들이 가진 기타보다 좀 더 컸다. 마침내 커버가 벗겨지고 하얀색 바디의 기타가 드러났다. 몸집은 컸지만 줄은 오히려 네 줄 밖에 되지 않는 기타였다.
“드디어 베이시스트가 오셨네.”
언제 등장했는지 몽이 벽에 기대어 한 마디 거들었다.
누군가 혜신에 관해 물었다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모델한다는 아이 말이야?’
혜신은 어릴 적부터 아역 모델로 데뷔하여 모델의 생활을 이어갔다. TV에 나오는 정도는 아니었다. 주로 잡지의 광고모델로 등장하곤 했지만 그나마도 주연급도 아니었다. 인지도 높은 연예인 대신 평범하지만 또래에 비해 예쁜 청소년1,2,3을 주로 모델로 쓰는 생리대나 주니어 화장품 광고에서 혜신은 모델2나 모델3에 해당했다.
그러나 미디어 바깥에서 존재하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볼 때 그녀는 돋보이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수의 귀에도 혜신의 이야기가 들렸었다. 하지만 그녀가 큼직한 베이스기타를 메고 밴드부실로 출몰한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혜신의 경우, 그 시기의 얼짱들이 그렇듯 셀카 찍기나 미니홈피 꾸미기 같은 것들에게 신경 쓰며 그와 비슷한 부류의 아이들 혹은 일진과 어울리는 등의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이나 언행은 늘 또래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수가 당시에 보기에 혜신의 외모는 빤히 들여다보이는 미모였다. 오똑한 코와 동그란 눈, 사춘기 아이답지 않은 늘씬한 몸매는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얼짱들의 전형일 뿐 뭔가 가슴을 건드리는 부분은 없었다. 마치 성적인 자극을 주지 않는 바비 인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혜신의 미덕은 자신의 미모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이었다. 수가 보기에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진 이는 대게 타인과 만날 때 자신의 평균치 이상의 외모를 중요한 포인트로 설정한다.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진 대부분이, 제가 뭐 예쁘나요? 저보다 예쁜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따위의 말로 자신을 낮추지만 그들의 행동, 이를테면 남자를 앞에 두고 말을 하는 자세, 연속해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 등을 관찰했다면 그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를 염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혜신에게 그런 면은 없었다. 그녀의 행동은 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말하는 중간중간 남자 아이들의 어깨나 팔을 함부로 잡거나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종종 짧은 치마를 입고도 바지를 입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썹이나 수 같은 아이들에게는 곤란한 일로 다가왔다. 반면 몽은 혜신을 대함에 있어 혜신만큼 자연스러웠고 그것으로 혜신은 더욱 밴드부 안으로 들어왔다.
6
수의 기억으로는 썹의 얼굴이 그날따라 더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던 같았다.
매주 밴드부에서 연습이 끝나면 혜신과 몽이 몰래 숨겨온 맥주를 하나씩 비우곤 했다. 썹은 원래 술을 못하기도 했거니와 그날따라 유난히 기분이 오른 혜신이 썹의 연주가 멋졌다며 썹의 등에 찰싹 달라붙으며 장난을 쳤다. 그 뒤로 썹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혜신은 얼마 먹지도 못하던 썹의 맥주까지 마셨다. 몽은 두 통을 비우면서도 자신은 요즘 ‘장자’를 읽고 있는데 음악생활을 계속 한다면 결코 약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며 명상이나 단전호흡으로 무상무념 상태를 유지할 거라며 떠들었다.
몽의 엉뚱함은 어느 정도 이골은 났지만 수는 혜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가 보기에 썹은 혜신이 다가올 때마다 흔들렸다. 아마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썹이 연주 과제를 열심히 준비해오는 건 혜신 때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사내 등에 자신의 가슴을 철석철석 부딪치는 혜신을 볼 때 뭔가 결핍된 어린 시절의 흔적 같은 것이 보였다. 가끔 철없이 오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썹 같은 친구에게 그러면 안될 것 같아 수는 자신도 모르게 함부로 깡통을 우그러뜨렸다.
깡통이 쪼그라드는 소리는 몽과 썹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혜신에겐 들렸을 것이다. 그렇게 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듯 보이다가도 급격하게 그늘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누구보다 혜신이 먼저 알아차린다는 것을 수는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러기에 수에게만큼 혜신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알코올 기운이 약간 돌고 난 뒤 수는 다시 기타를 드는 적이 많았다. 밴드부 생활이 1년 정도 되어갈 무렵 수에겐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세븐스 코드였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코드는 3개의 음으로 되어있다. 도와 미와 솔이 만나면 가장 기본인 C코드를 이룬다. 여기에 한 음을 더 올리면 바로 C세븐 코드가 된다. C코드가 교회 성가대에서 울리는 명징하고도 밝은 색채라면 C7코드는 교회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고 걸어가는 반항아의 느낌이다.
그런 세븐스 코드를 섞어서 진행을 시키면 록의 기본이자 블루스의 기본이 된다는 것을 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코드진행에 어울리는 음들을 익히고 그런 음들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이 ‘잼’이라는 것도.
정식 레슨을 받지 않고도 수는 혼자서 ‘잼’을 했다. 물론 둔탁하고 거칠었지만 기타 줄을 밀어 올려서 마치 목을 조르는 듯한 소리를 내는 ‘초킹’이나 망치질처럼 손가락으로 줄을 때리는 ‘해머링’같은 테크닉까지도 능숙하게 쓰고 있었다. 라디오 등에서 들었던 수많은 연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되어 온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연주, 그저 홀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순간, 대부분 홀로일 때가 많았지만 썹이 지켜볼 때도 있었다. 썹은 옆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그거 좋은데, 정도의 호응만 해주었다.
수는 그런 블루스의 음들이 일방적인 밝음 혹은 일방적인 슬픔이 아니라 밝으면서도 어둡고 어두우면서도 밝음을 포함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모호하고도 마력적인 음들을 연주할 때마다 그저 귀로 들렸던 음들이 가슴 위로 툭툭 떨어져 심장을 아릿하게 만드는 때가 있었다. 음악에 관한한 썹이 가장 넓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썹은 수에게 블루스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뮤지션을 소개했다.
“지미 헨드릭스를 들어본 적 있니?”
“응.”
“넌 그런 음악을 해봐야 해. 헨드릭스적인 음악.”
“헨드릭스적인 음악?”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로 하는 음악 말이야.”
“스미스적인 음악과는 다른 건가?”
“그것과 좀 달라. 난 네가 좀 더 격렬하고 다이나믹하게 연주할 수 있을 거라 상상해.”
그 뒤로 둘은 말을 더 잇진 않았다. 왜 썹이 수에게 지미 헨드릭스를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술이 조금 취해서 그랬던 걸까. 다만 고개만 끄덕이던 썹이 어떤 지향점을 이야기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