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간 3시간 전.

몽과 혜신이 서로를 쳐다보며 꼬박 2시간을 보냈다. 혜신이 자신의 분장을 간단히 끝낸데 비해 몽은 훨씬 더 까다롭게 굴었다. 하얀색 페인트를 뒤집어 쓴 듯한 얼굴에 쭈글쭈글한 주름살까지 표현했고 머리에는 기괴하게 산발한 가발을 썼다. 몽은 혜신이 마구잡이로 칠하던 입술을 귀밑까지 번지게 두었다. 몽의 목표는 배트맨에 나왔던 악당 ‘조커’가 되는 것이었다.

사악해질 대로 사악해진 몽과 오페라 가수 키메라처럼 눈 주위를 진하게 화장 한 혜신이 이번엔 수를 분장시키기 시작했다. 수를 앞에 두고 혜신은 한동안 키득키득 웃어댔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혜신의 볼이 약간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슬래시처럼 까만 얼굴로 만들어 줄 거야.”

혜신은 분장을 하는 동안 참새처럼 떠들어댔다. 수는 눈을 감았다. 약간의 긴장, 톡톡 건드리는 손길, 끊임없이 지저귀는 혜신의 말소리에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분장을 끝낸 혜신이 가발과 중절모는 물론이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슬림한 가죽바지와 부츠를 신겼다. 마지막으론 썹의 일렉트릭 기타를 매어 보았을 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수는 전성기 시절 슬래시가 되어있었다.

다만 클럽에서 만났다며 섭외한 드러머만큼은 따로 분장이 필요 없었다. 같은 나이라고 하기엔 덩치가 두 배는 되어보였다. 모히칸족처럼 곁 머리를 과감히 쳐버리고 남은 가운데 머리를 말갈기 마냥 세우고 있었다. 저런 머리를 유지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이 궁금할 정도였다. 공연 전 몇 번 합주를 해본 적이 있었지만 공연시작 막바지까지도 가끔 빙글빙글 웃음만 보일 뿐 수와는 말을 섞지 않았다.

 

 

수는 암전 속에서 몽의 신호를 기다렸다.

심장은 뛰었지만 첫 공연 때 뛰었던 것과는 움직임이 달랐다. 마치 자신의 장기가 아닌 것처럼 굴던 심장은 이번엔 자신의 가슴팍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느낌이었다. 훨씬 강한 펌프질을 해댔지만 두려움 보다는 기대감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수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기타 볼륨을 올린 채 마이크 대를 움켜잡고 잠시 분위기를 잡고 있는 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몽이 신호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한 번 가볼까? 드럼과 베이스는 여전히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수는 피크로 기타 줄을 짧고 강력하게 내리쳤다. 디스토션이 걸린 채 잔뜩 일그러진 기타 소리가 어두운 공기를 갈라놓았다.

기타 줄을 피크로 내리칠 때마다 수는 해머로 단단한 벽을 내리치는 상상을 했다. 그들의 첫 곡은 ‘스톤 템플 파일러츠(Stone Temple Pilots)’의 ‘다운(Down)’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은 아니었지만 고음 보다 저음에서 느낄 수 있는 카리스마와 전체적으로 강렬한 사운드로 이루어져 오프닝 곡으론 손색이 없었었다.

기타 소리를 신호로 스포트라이트 하나가 몽을 비추었다. 눈을 치켜뜬 악당을 본 관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커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인사하듯 읊조렸다.

 

Pleased to meet you.

Nice to Know me.

What‘s your massage?

Will you show me?

 

조커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포효하는 것을 신호로 조명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내려앉았다. 숨죽이고 있던 드럼과 베이스가 시동을 걸었다. 기타의 6번 줄 위로 수의 검지 손가락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처럼 미끄러졌다. 다시 5번 줄과 6번 줄을 내리치자 전방 스피커가 찢어질 듯 괴성을 토했다. 거대한 호수로부터 터져 나온 검은 물이 세상을 덮어버릴 기세였다. 무대 위의 실체를 파악한 관객들이 비로소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조커의 카리스마가 순간 무대 위를 신비롭고 괴기스럽게 바꿔놓았다.

수는 객석을 주시했다. 그들은 분명 집중하고 있었다. 흥분하는 가운데서도 몽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들으려는 진지함이 서려있었다. 이번에도 몽은 성공하고 있었다. 이목을 끄는 힘은 단지 음악적인 실력만은 아닌 것이었다.

 

I've been waiting for my Sunday girl

 

몽이 곡의 중간, 브릿지 부분에 이르러 ‘선데이 걸(Sunday girl)’이라고 외치며 앞 열의 여학생들에게 검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놀라운 것은 몽의 퍼포먼스 뿐 만이 아니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수 자신도 변하기 시작했다. 몽이 조커에 집중할수록, 그런 몽의 목소리와 행위를 지켜보면서, 수도 수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갔다. 연주 중에 수는 분장으로 자신들을 감춘 몽과 혜신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알던 친구들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존재들이었다.

 

‘가면 효과인가’

 

부풀어 오른 머리에 푹 눌러쓴 중절모. 검게 칠한 얼굴. 수답지 않은 옷차림. 관객 중 누구도 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무대 위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아닌 자신이 되는 것. 전혀 자신이 아니면서도 또한 철저히 자신이기도 한, 또 다른 자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가면 뒤에 숨은 수는 그대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아이들도 자신도, 그들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있었다. 한 번씩 몽과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수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잠시 악인을 흉내 낸 고등학생이 아니라 진짜 악 그 자체였다. 합법적인 음악으로 가장 비합법적인 악을 구현해내는 것. 몽은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며 감정의 바닥까지 가고 싶었는지 몰랐다.

 

Will you follow me, down

 

몽이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으며 1절 보컬파트를 모두 소화했다. 이제 기타 솔로의 시간이었다. 솔로라인을 연주할 땐 자신도 모르게 미리 연습해둔 멜로디 라인이 아닌 자신의 필링에 의한 즉흥연주가 튀어나왔다. 수많은 기타리스트가 보여주었던 라이브 연주는 어쩌면 이런 느낌에 바탕을 두었을지 몰랐다. 반드시 원곡과 똑같이, 연습한 시나리오대로 연주할 필요는 없었다. 꽤 긴 솔로부분을 연주하면서 수는 자신이 손가락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다만 그 움직임을 지켜보는 이에 불과했다.

 

수가 몽에게 가장 기대했던 곡은 두 번째 곡이었다. 콘(Korn)의 ‘프릭 온 더 리쉬(Freak on a leash)’는 언젠가 레게파마를 하고 나타난 서태지의 컴백곡이었던 ‘울트라맨이야’와 맥을 나란히 하는 곡이었다. 90년대 초 백인의 메탈음악과 흑인의 힙합을 합쳐놓은 듯한 하이브리드한 감성으로 등장한 Korn은 단연 하드코어 메탈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몽은 콘(Korn)의 보컬인 조나던 데이비스를 좋아했는데 그는 마치 정신이 분열된 듯한 모습과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늘어지듯이 몽환적으로 시작하는 이곡은 점점 상승 구조를 취하다가 곡 중간에 갑자기 괴상한 가사와 함께 아프리카 주술사와 같은 퍼포먼스가 돌출된다.

거의 신내림은 받은 것처럼 몽은 조커의 분장을 한 채로 사람들 앞에서 조나단 데이비스의 기괴한 퍼포먼스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지막 팀은 점프수트를 입고 머리엔 해골, 악마, 삐에로와 같은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밴드 슬립낫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멤버 소개에서 보컬이라 소개된 이는 몽이었다. 한 사람이 두 번 무대에 서는 건 원칙상 규정 위반이었지만 가면에 자신을 숨긴 채 몽은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밴드는 몽과 함께 시내 클럽에서 연주했던 실력파 아이들로 구성되었다. 선보이는 곡은 ‘듀얼리티(Duality)’라는 곡으로 엄청난 스피드와 파워를 자랑했다. 이곡을 위해 모히칸 머리를 한 드러머는 베이스드럼의 페달을 두 개 세팅했다. 본래 발로 밟는 베이스드럼은 하나의 페달을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스피디한 곡에선 두 개의 페달을 썼다. 마치 일반드럼이 경쾌한 조깅의 느낌이라면 더블베이스 드럼은 질주의 느낌을 만들었다. 특별히 이 친구를 섭외한 건 바로 이곡을 해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수는 몽이 이 곡의 뮤직비디오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몽은 외딴 집에서 밴드와 팬들이 모여 광란의 콘서트를 벌이는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곤 했다. 몽은 연주 도중 열광하는 관객들을 멈추게도 했고 자신의 신호에 맞춰 멈췄던 몸짓을 재개시키기도 했다. 마지막 부분에선 한 여학생의 뒷통수를 부여잡고 서로 이마에 맞댄 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모든 것은 뮤직비디오의 장면을 모방한 것이었다. 자기 것을 만들고 싶은 욕구 이전에 완벽히 따라하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그것이 모방이든 창조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어떠한 평가도 필요 없었으며 다음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테스트도 아니었다. 누구도 어설픈 공연을 실눈 뜨고 보지 않았다. 동시에 어느 누구도 팔짱을 끼며 방관하지도 않았다. 단지 아이들은 꾹꾹 눌러두었던 덩어리들을 꺼내 불을 지르고 발로 걷어찼으며 급기야 그것들을 함께 굴리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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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떻게 세 학교가 그런 기발한 무대를 만드는데 동의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가 다니는 신설 고등학교와 주위에 있던 외국어 고등학교와 예술 고등학교가 모두 역사가 짧고 인상적인 축제가 없다고 판단한 윗분들의 용단이 있었을 것이다. 일반 도시이기 보다 모든 것이 새롭게 지어지기 시작한 신도시라는 환경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 학교의 중앙에 위치한 시민공원에 구청과 함께 야외무대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학예회 무대에 비하면 과히 콘서트라 할 만했다. 마침 지역구의 축제가 겹친 것이다. 세 학교의 아이들 외에도 시민들도 함께 참여하는 공연이 된 셈이었다.

 

가장 바빠진 건 몽이었다. 졸업 후면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위해 벌써부터 시내 클럽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몽은 또 다른 쇼킹한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몽은 자신이 화려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글렘록의 신화, 데이빗 보위를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월이 흐른 후 이야기지만, 자신과 같은 각성이 당시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었고 시간이 흘러 레이디 가가 같은 인물이 뜨게 된 것이라는 괴변을 피력하기도 했다.

축 쳐진 눈은 여전했지만 스키니 바지에 부츠를 신고 괴상한 무늬의 셔츠를 자주 입었다. 심지어 연습실에서 혜신이 해주는 화장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더 자라나 이제 소년의 티를 벗었지만 감성은 자꾸만 더 어린 시절로 역행하는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선 몽과 가장 어울리는 건 혜신이었다.

 

둘은 활엽수와 같았다. 세상으로부터의 빛을 과감하게 받아내고 그것으로 자신을 꽃피우고 싶어했다. 몸 곳곳에 꽃과 잎들을 잔뜩 피웠고 물들고 싶을 땐 어떤 색이로든 물들었다. 반면 수와 썹, 두 침엽수는 더 꼿꼿하게 위로만 자라는 듯 했다. 좀 더 그늘지고 좀 더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내밀한 성장을 이어갔다.

몽은 당시 ‘슬립낫(Slipknot)’이란 밴드를 즐겨 듣고 있었다. 거칠고 스피디했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랩과 메탈을 섞은 사운드였다. 연주력이 매우 탄탄했다. 무엇보다 큰 특징은 전 멤버가 가면을 쓰고 나왔다. 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강렬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몽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몽이 그들의 뮤직비디오와 공연 영상을 보는 것이 자주 목격되곤 했다. 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립낫이 이번 공연의 중요한 키가 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와우, 슬래시 스타일!”

 

몽이 수에게 건넨 꼬불꼬불한 라면머리를 보고 혜신이 소리쳤다. 어디서 구한 가발인지는 몰랐지만 도저히 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썹이 재밌다는 듯 만지작거리더니 수의 머리에 기습적으로 씌워버렸다.

“야, 완전 잘 어울려. 완전 짱이야.”

혜신이 호들갑을 떨었다. 수는 몽과 혜신이 공통투자해서 구입한 밴드부 전용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춰봤다. 수가 쓴 웃음을 짓자 몽은 수 머리 위에 통이 긴 중절모를 올렸다.

기타를 좀 친다고 하면 기타리스트 ‘슬래시(Slash)’를 모르긴 힘들 것이다. 록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밴드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꼬불꼬불 파머한 머리에 커다란 중절모, 허리쯤에 걸친 기타를 칠 때는 끊임없이 말보로 담배를 피워대는 것으로 유명했다. 현란한 속주나 테크닉보다는 강렬하고 귀에 쏙 들어오는 연주를 들려줬다.

 

언젠가 넷은 나란히 그 유명한 건스 앤 로지스의 ‘노벰버 레인(November rain)’의 뮤직 비디오를 함께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오래 전에 만들어졌던 비디오였지만 넷은 각기 다른 이유로 그 비디오에 쏙 빠졌었다. 몽은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보컬 액슬 로즈의 카리스마에 이끌렸을 것이고 혜신은 미니 스커트로 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등장해 웨딩 케잌을 커팅한 칼을 혀로 핥는 장면에서 눈이 가장 커졌고 수는 장황했지만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슬래시의 기타 멜로디 라인에, 썹은 슬래시가 맨 깁슨 레스폴이 최근 자신이 가진 구입한 국산 일렉 기타와 똑같은 색깔, 디자인이라는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이들은 단지 귀로만 음악을 듣지 않았다. 테이프를 녹음하여 듣던 몽도 있었고 라디오를 듣는 수도 있었지만 혜신만 해도 MP3 플레이어가 여러 개였고 수도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음악적인 정보를 얻었으며 뮤직비디오와 공연실황을 통해 이전 세대들이 듣기만 하던 것에서 벗어났다. 들리는 소리와 보여 지는 이미지가 적절하게 결합할 때 비로소 한명의 아티스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코스튬 플레이라도 하자는 거야?”

혜신이 몽이 잔뜩 싸가지고 온 옷가지나 가발 등을 집어 보며 물었다.

“무대에 서는 건 고등학생들이고 관객들은 일반인들이 더 많을 거야.”

몽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의 장끼자랑, 그 이상의 것을 해보고 싶어.”

“이런 거 쓰고 한다고 특별히 달라질 게 있을까?‘

수가 모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비꼬는 듯이 말했다. 각자 악기를 만지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던 아이들은 슬슬 하나 둘 밴드부실을 떴다. 수마저 자리를 뜨려 할 때 기다렸다는 듯 몽이 수에게 다가왔다.

“난 이번 공연도 너랑 하면 좋겠어.”

역시 몽이 먼저 다가서는구나. 수는 자신이 먼저 한 방을 먹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과 달리 외부 팀과의 접촉이 많던 몽이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것은 고맙긴 했지만 혹시나 지난 정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꼭 너의 즐거워하는 연주를 보고 싶거든.”

몽이 꼬불 머리 가발을 들어보였다.

“장난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내 생각은 그래. 난 네 기타소리가 좋아. 나이에 비해 깊고 안정감도 있어. 그만큼 네가 투자했던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너의 기타엔 들어있지. 그런데 그건 단지 일부에 불과한 거 같아. 거기에 비해 썹은 말이지.”

썹 이야기가 나오자 수는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썹은 그래. 너만큼이나 조용하고 나서길 싫어해. 근데 갠 벌써 기타가 다 말해줘. 너도 알잖아. 썹이 치는 기타와 노래를.”

그건 그랬다. 썹이 연주하는 음악은 그만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너무 드러나 있어 문제였다. 그런 면에서 몽과 썹은 닮았다.

“그런데 네가 만드는 소리는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이야. 그냥 한 번 해방이 되 보라고.”

몽이 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말할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왜 꾹꾹 누르려고 하지?”

이번엔 몽이 가발을 들어 빙글빙글 돌리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발은 좋은 도우미가 될 거야.”

몽이 먼저 밴드부실을 떴다.

 

수는 공연곡 후보곡이라며 몽이 건넨 MP3 파일을 계속해서 들었다. 모두 아는 밴드들이었지만 정작 알고 있는 곡은 없었다. 챙겨서 들어본 적은 없는 밴드들이어서 그저 대표곡 정도만 알았다. 몽이 보여줬던 분장도구와 음악의 컨셉을 매치시켜보니 몽이 하려고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몽이 고른 곡은 하나같이 인상이 강한 곡이었다. 화려한 고음이나 꽉 짜여진 연주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다. 특징이 강해서 한 번만 들어봐도 기억을 할 것 같은 곡들이었다. 어떤 곡은 악기의 연주에서, 어떤 곡은 보컬의 음색이나 창법 등에서 그랬다.

또한 관객들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언젠가 몽과 설전이 벌어지면 꼭 꼬집어주고 싶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몽이 건넨 음악을 듣다보면 자신도 그러한 상상에 끌리는 것을 발견했다. 몽이 원하는 대로, 이끄는 대로, 자신도 한 번 맘껏 자신을 던져보고 싶은 충동, 그런 것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기만족으로 음악을 한다고 해도 화끈하게 달아오른 관객들을 지켜보는 것은 아무래도 짜릿한 일이었다. 결국 수는 몽과의 공연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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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날도 썹과 수만이 밴드부실에 남아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수가 썹의 연주를 보는 동안 수의 시야 속으로 가늘고 흰 다리가 들어왔다. 두 다리는 약간 벌려져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수는 다리의 라인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더는 짧게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여진 교복치마를 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아이가 팔짱을 낀 채 썹의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광 속 아이의 얼굴은 썹을 바라보고 있는 청중이 아니었다. 두 남자 사이에서 시선을 이끌어내는 주인공으로 비춰졌다.

마침내 연주를 마친 썹을 향해 여자아이가 박수를 쳤다.

“야. 너 짱이다!”

 

당황한 썹과 수를 뒤로 하고 여자아이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가 걸어가는 벽 쪽으로 비스듬히 세워진 기타가 보였다. 그녀가 기타커버를 벗겨내기 위해 몸을 굽혔다. 더 이상 짧을 수 없는 치마가 더 올라가는 순간 수는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남자 둘을 두고 그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수는 뭔가 불안하고 팽팽한 기운이 밴드부실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 보다 좀 더 작은 여자아이가 가져온 기타는 그들이 가진 기타보다 좀 더 컸다. 마침내 커버가 벗겨지고 하얀색 바디의 기타가 드러났다. 몸집은 컸지만 줄은 오히려 네 줄 밖에 되지 않는 기타였다.

 

“드디어 베이시스트가 오셨네.”

언제 등장했는지 몽이 벽에 기대어 한 마디 거들었다.

 


누군가 혜신에 관해 물었다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모델한다는 아이 말이야?’

혜신은 어릴 적부터 아역 모델로 데뷔하여 모델의 생활을 이어갔다. TV에 나오는 정도는 아니었다. 주로 잡지의 광고모델로 등장하곤 했지만 그나마도 주연급도 아니었다. 인지도 높은 연예인 대신 평범하지만 또래에 비해 예쁜 청소년1,2,3을 주로 모델로 쓰는 생리대나 주니어 화장품 광고에서 혜신은 모델2나 모델3에 해당했다.

 

그러나 미디어 바깥에서 존재하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볼 때 그녀는 돋보이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수의 귀에도 혜신의 이야기가 들렸었다. 하지만 그녀가 큼직한 베이스기타를 메고 밴드부실로 출몰한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혜신의 경우, 그 시기의 얼짱들이 그렇듯 셀카 찍기나 미니홈피 꾸미기 같은 것들에게 신경 쓰며 그와 비슷한 부류의 아이들 혹은 일진과 어울리는 등의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이나 언행은 늘 또래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수가 당시에 보기에 혜신의 외모는 빤히 들여다보이는 미모였다. 오똑한 코와 동그란 눈, 사춘기 아이답지 않은 늘씬한 몸매는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얼짱들의 전형일 뿐 뭔가 가슴을 건드리는 부분은 없었다. 마치 성적인 자극을 주지 않는 바비 인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혜신의 미덕은 자신의 미모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이었다. 수가 보기에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진 이는 대게 타인과 만날 때 자신의 평균치 이상의 외모를 중요한 포인트로 설정한다.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진 대부분이, 제가 뭐 예쁘나요? 저보다 예쁜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따위의 말로 자신을 낮추지만 그들의 행동, 이를테면 남자를 앞에 두고 말을 하는 자세, 연속해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 등을 관찰했다면 그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를 염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혜신에게 그런 면은 없었다. 그녀의 행동은 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말하는 중간중간 남자 아이들의 어깨나 팔을 함부로 잡거나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종종 짧은 치마를 입고도 바지를 입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썹이나 수 같은 아이들에게는 곤란한 일로 다가왔다. 반면 몽은 혜신을 대함에 있어 혜신만큼 자연스러웠고 그것으로 혜신은 더욱 밴드부 안으로 들어왔다.

6

 

수의 기억으로는 썹의 얼굴이 그날따라 더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던 같았다.

매주 밴드부에서 연습이 끝나면 혜신과 몽이 몰래 숨겨온 맥주를 하나씩 비우곤 했다. 썹은 원래 술을 못하기도 했거니와 그날따라 유난히 기분이 오른 혜신이 썹의 연주가 멋졌다며 썹의 등에 찰싹 달라붙으며 장난을 쳤다. 그 뒤로 썹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혜신은 얼마 먹지도 못하던 썹의 맥주까지 마셨다. 몽은 두 통을 비우면서도 자신은 요즘 ‘장자’를 읽고 있는데 음악생활을 계속 한다면 결코 약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며 명상이나 단전호흡으로 무상무념 상태를 유지할 거라며 떠들었다.

 

몽의 엉뚱함은 어느 정도 이골은 났지만 수는 혜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가 보기에 썹은 혜신이 다가올 때마다 흔들렸다. 아마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썹이 연주 과제를 열심히 준비해오는 건 혜신 때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사내 등에 자신의 가슴을 철석철석 부딪치는 혜신을 볼 때 뭔가 결핍된 어린 시절의 흔적 같은 것이 보였다. 가끔 철없이 오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썹 같은 친구에게 그러면 안될 것 같아 수는 자신도 모르게 함부로 깡통을 우그러뜨렸다.

 

깡통이 쪼그라드는 소리는 몽과 썹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혜신에겐 들렸을 것이다. 그렇게 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듯 보이다가도 급격하게 그늘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누구보다 혜신이 먼저 알아차린다는 것을 수는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러기에 수에게만큼 혜신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알코올 기운이 약간 돌고 난 뒤 수는 다시 기타를 드는 적이 많았다. 밴드부 생활이 1년 정도 되어갈 무렵 수에겐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세븐스 코드였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코드는 3개의 음으로 되어있다. 도와 미와 솔이 만나면 가장 기본인 C코드를 이룬다. 여기에 한 음을 더 올리면 바로 C세븐 코드가 된다. C코드가 교회 성가대에서 울리는 명징하고도 밝은 색채라면 C7코드는 교회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고 걸어가는 반항아의 느낌이다.

그런 세븐스 코드를 섞어서 진행을 시키면 록의 기본이자 블루스의 기본이 된다는 것을 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코드진행에 어울리는 음들을 익히고 그런 음들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이 ‘잼’이라는 것도.

 

정식 레슨을 받지 않고도 수는 혼자서 ‘잼’을 했다. 물론 둔탁하고 거칠었지만 기타 줄을 밀어 올려서 마치 목을 조르는 듯한 소리를 내는 ‘초킹’이나 망치질처럼 손가락으로 줄을 때리는 ‘해머링’같은 테크닉까지도 능숙하게 쓰고 있었다. 라디오 등에서 들었던 수많은 연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되어 온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연주, 그저 홀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순간, 대부분 홀로일 때가 많았지만 썹이 지켜볼 때도 있었다. 썹은 옆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그거 좋은데, 정도의 호응만 해주었다.

수는 그런 블루스의 음들이 일방적인 밝음 혹은 일방적인 슬픔이 아니라 밝으면서도 어둡고 어두우면서도 밝음을 포함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모호하고도 마력적인 음들을 연주할 때마다 그저 귀로 들렸던 음들이 가슴 위로 툭툭 떨어져 심장을 아릿하게 만드는 때가 있었다. 음악에 관한한 썹이 가장 넓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썹은 수에게 블루스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뮤지션을 소개했다.

 

“지미 헨드릭스를 들어본 적 있니?”

“응.”

“넌 그런 음악을 해봐야 해. 헨드릭스적인 음악.”

“헨드릭스적인 음악?”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로 하는 음악 말이야.”

“스미스적인 음악과는 다른 건가?”

“그것과 좀 달라. 난 네가 좀 더 격렬하고 다이나믹하게 연주할 수 있을 거라 상상해.”

그 뒤로 둘은 말을 더 잇진 않았다. 왜 썹이 수에게 지미 헨드릭스를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술이 조금 취해서 그랬던 걸까. 다만 고개만 끄덕이던 썹이 어떤 지향점을 이야기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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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몽과 수가 함께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신도시에 지어진 신설 학교였다.

무엇 하나 물려받을 전통이 없는 것이 흠이라고 어른들은 말했지만 기존의 질서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몽과 수에겐 장점이었다. 불필요한 교육전통은 물론이고 선배들의 폭압에서도 해방이었다.

 

‘풍선사건’ 이후 몇 번의 무대를 경험한 몽은 ‘밴드부’부터 만들 생각을 했다. 학교에 허락을 얻어내고 동아리 방을 배정받고 공간을 꾸몄고 곧 아이들이 몰렸다. 몽이 신청했고 학교가 허락한 ‘밴드부’는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하고 싶은 아이들이 모이는 곳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몰려든 부류는 ‘록 키드’들이었다. 록이라는 정체성을 갖지 않고 단지 노래를 부르고 싶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싶었던 아이들은 분위기만 살피고 발길을 돌렸다.

 

수는 딱히 록커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기타를 좀 쳤고 무대에 서본 적이 있다고 하면 모두 록을 좋아하는 걸로 받아들였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의 인사는 밴드 혹은 가수, 장르에 관한 취향을 묻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취향을 묻는 것 보다 타인이 자신만큼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테스트였으며 상대가 말하는 밴드와 음악을 통해 상대의 수준을 결정했다.

성적 위주, 등수 위주의 대한민국을 비판하며 그건 록의 정신이 아니라고 부르짖던 록 키드들은 연습실 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며 기타리스트나 밴드의 서열을 따졌고 그 등수를 놓고 서로 충돌했다.

 

4

 

몽이 신체적 특징에서 따온 별명이라면 ‘썹’은 형섭의 섭에서 따온 것이 분명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썹과 마주친 아이들은 ‘하이 썹’ 혹은 ‘헤이 썹’ 하며 힙합 스타일로 불러주었다. 삭발을 한 듯 짧은 머리, 바짝 마른 체형, 또래에 비해 큰 키. 그런 썹의 외모를 보고 외계인이라고 말하는 녀석들이 많았지만 썹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외계인이라 불렀을 것이다.

 

썹은 밴드부로 가장 먼저 찾아왔다. 몽이 오지랖이 넓고 자신만의 독특한 사교 기술이 있다면 썹은 수처럼 내성적이고 나서길 싫어했다. 그러기에 썹은 수와 잘 맞았다. 함께 기타를 다루는 것도 그렇고 나이에 맞지 않게 진지하게 음악에 임했다.

 

당시 키가 부쩍 자라난 수와 썹이 함께 서면 두 그루의 침엽수를 보는 듯 했다. 햇볕이 내려앉은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을 때 둘은 그늘막이 진 한 켠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음악 이야기였고 기타이야기였다.

썹은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되면 썹은 밥 대신 초코바 하나를 물고 기타를 치곤 했다.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

 

수는 가장 좋아하는 곡을 물었지만 어쩐지 썹은 자신의 인생관을 말하지 않았나 싶었다. 수가 썹을 만났을 때 썹은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의 음악에 빠져있었다. 수는 썹을 통해 처음 그런 음악을 접했다. 듣는 순간부터 기분을 가라앉히는 음악이었다. 그것은 끝없이 아래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 음악에는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넘어 불길함도 있었다. 그대로 심취했다가는 그 우울함이 자신을 끝없이 갉아먹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들었다던 썹은 몽이나 수에 비해서도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또래가 보유하긴 조금 버거운 마틴 기타를 가지고 있었다.

주로 화려한 악기 편성 없이 어쿠스틱 기타 하나와 우울한 목소리로 노래했던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들을 썹은 그대로 배껴냈다. 필사를 통해 문학을 배우는 문학도처럼. 초기엔 기타반주를 정확히 카피해내는 것에 목표를 두고 노래는 웅얼웅얼 이어가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타소리 만큼 노래 소리도 또렷해졌다. 또렷해졌다고 해봐야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은 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음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수에게 아버지가 없었다면 썹에겐 어머니가 없었다.

수는 부성 보다는 모성의 결여가 훨씬 치명적이라는 걸 썹을 통해 알았다. 썹은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밥을 챙겨 먹거나 목소리에 힘을 주거나 자신감이 있는 척 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결핍된 자아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너무 밥을 먹지 않는 것이었다. 늘 초코바나 라면 따위를 먹었다.

한번은 수와 썹이 중국집에 간 적이 있었다. 수가 짜장면을 시켰을 때 썹은 울면을 시켰다. 끈적끈적한 국물 속에서 면발을 집어올린 썹이 말했다.

“이것 봐 온통 ‘울’밖엔 없어. 그래서 울면이야. 그렇지?”

 

입을 씰룩거리며 썹은 차근차근 면을 씹었다. 그 이후로 썹의 목소리를 들으면 울면 맛이 났다. 그야말로 ‘울’밖에는 남지 않은, 오로지 ‘울’만 남기고 싶어 하는 목소리였다.

썹은 ‘울’로 충만한 목소리와 마틴을 들고 신도시에서 가장 큰 공원으로 갔다. 거기서 홀로 노래를 불렀다. 밖으로 잘 퍼져나가지도 않는 성량으로 자신을 닮은 노래를 불렀다. 썹은 주변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수와 몽이 썹의 노래를 듣기 위해 공원을 찾아 갔다. 동전 몇 개가 기타 케이스 위에 뿌려져 있기도 했다.

 

썹의 목소리는 썹에서 나와서 그대로 썹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누구의 몸도 귀도 거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음을 멈추고 썹의 음악을 들어주지 않았다. 귀를 세우고 들어야만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썹은 왜 이런 곳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걸까? 썹의 뒤에서 바라볼 뿐 수는 그런 절절한 이유는 묻지 않았다. 다만 우울한 에너지가 마음 속에서 자라나면 그걸 자란만큼 꾸준히 잘라 내버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수는 우울함이란 갈아도 갈아도 계속해서 자라나는 설치류의 이빨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끝없이 자라나는 이빨에 자신이 찔려서 죽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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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썹 그리고 혜신

 

 

 

 

Elliott Smith,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

Guns N‘ Roses, November Rain

Stone Temple Pilot, Down

Slipknot, Duality

 

 

 

 

 

 

 

 

 

 

   1

 

방에서 보내는 하루는 빨리 지나갔다. 온전히 하루로 느껴지던 시간은 이틀 분을 보내서야 하루치만큼 느껴졌다. 퇴사 후 꼬박 일주일을 집안에서 보내기도 했다. 수는 한동안 TV만 보았다. 수십 개의 채널을 리모컨으로 재핑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도 있었고 드라마도 있었지만 대부분 뉴스나 시사에 관한 것들을 보았다. 재밌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걸 보는 이유는 어떤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세상을 어떻게 봐야할지 그런 걸 배운 적도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경제와 정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 특히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에선 훨씬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격앙되어있었고 현실은 온통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 문제들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혹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며, 그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질타했다.

수는 아이팟으로 팟캐스트도 들었다. 거기에서도 TV와 마찬가지로 격앙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엔 TV에서 질타를 당하던 대상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역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반대생각을 가진 이들을 질타했다.

수가 느낀 불안감은 그 어느 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했지만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깊이는 너무나 얕았다. 그렇게 몇일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이 지겨워지면 사람들이 만든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다가 문득 불안해지면 다시 TV나 아이팟으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쪽은 결론을 내고 규정을 내리며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또 누구인지를 분명히 가르는 소리였다. 한쪽은 결론도 없고 규정도 없으며 도무지 우리와 우리가 포함된 모든 세상이 모르겠다고 말하는 소리였다.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수는 드디어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방에 틀어박혀 있던 한 달 동안 단지 너무 답답해 졌기에 나오는 거라고 자신에게 말했지만, 사실, 그동안 어떤 회사로부터도 연락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을 떨쳐보기 위한 거였다.

딱히 만날 친구도 지인들도 없었다. 방에서 지내던 때와 달리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더디게 갔다. 목적 없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는 것 인줄 수는 일찍이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는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의미 없는 행동이나마 하지 않으면 자신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2

 

늦은 밤 서울에서 신도시로 향하는 광역버스의 뒷자리에서 수는 앞좌석으로 향하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밀려서 버스 뒷자리로 쪽으로 걸어가던 수는 스치듯이 한 여자를 보았다. 얼굴의 반을 가린 커다란 선글라스와 곱슬곱슬한 긴 머리에 스카프를 칭칭 두른 여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잠이 들어있었다.

‘혜신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로 만난 적이 없었지만 수는 그녀가 혜신임을 직감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졸업식 날 어색하게 헤어진 후 둘은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나마 몽이 군대로 간 이후론 모든 친구들의 연락을 끊어져버렸다.

 

그동안 가수로 데뷔는 한 건인지. 서울을 벗어난 버스가 수가 사는 신도시의 초입 쪽으로 들어서자 수는 궁금함을 넘어 조바심까지 들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수는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고 혜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잠든 여자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를 옆에 앉은 여자가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주 깊은 잠에 들었음이 분명했다. 막 흔들어 깨우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며 그녀 옆에 자리를 지켰다.

잠깐 수가 밖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버스가 멈춰 섰고 혜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뒷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수도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랐다. 혜신은 스카프 자락을 휘날리며 걸었다. 치렁치렁한 치마 역시 바람에 흩날려 지나던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뭔가 유행을 앞선 것도 같고 반대로 유행에서 아주 멀어진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수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빨리 걸었다. 마침내 수의 목구멍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이혜신.”

 

길을 가던 그녀가 멈춰섰다. 천천히 몸을 돌려 수를 바라보는 그녀가 선그라스를 벗었다.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혜신은 창백한 얼굴을 가리던 치렁치렁한 머리를 쓸어올리곤 수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샷 하나 더 추가해줘.”

진한 카페모카에 샷을 하나 더 추가해달라는 혜신의 주문은 의외였다.

“요즘 계속 잠만 자서 말이야.”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내미는 동안 수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장기간 다이어트를 한 탓인지 얼굴은 놀랄 만큼 작았고 상대적으로 눈과 코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보였다. 혜신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를 잠이 덜 깬 몽롱한 눈으로 쳐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집에 오는 길인가 봐.”

수가 묻자 혜신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주 와버렸어. 집에.”

 

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기획사 소속 연습생이 칼로리 높은 카페모카를 마시고 그것도 샷까지 추가하는 건 뭔가 수상했다. 그 옛날 뻥과자를 먹고도 과식했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무엇보다 발랄하고 거침없던 기운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몸 안의 모든 피를 흡혈귀에게 받치고 돌아온 이처럼 창백했다.

“너도 집에 오는 길인가 봐.”

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커피만 마시다 이내 커피숍을 나섰다. 수는 혜신이 걷는 방향으로 한동안 걸었고 곧 헤어졌다. 전화번호만 서로 교환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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