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필요한 시절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규관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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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라 단정 짓는 일 없이 그냥 시절 기억 속에서 무 뽑듯 쏙쏙 뽑아 문학의 자리를 꿰맞추는 시간이다. ‘나’를 형성한 시간을 현재로 불러내는 일이 ‘고독’의 참여를 재촉하다가도 갑자기 들이닥친 ‘긍지’와 마주할 때면 바빠진다.

“긍지가 없으니 고독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오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 ‘긍지’를 찾는 일에 두서가 없다. 저자의 일침에 맞장구 아니면 대꾸하고 싶지만, 알코올보다 더 무서운 카페인의 위력에 머리가 어지러워 조용히 지나간다.


저자는 ‘썩음’을 가지고 비판하기에 앞서 책무와 언어의 공공재를 이야기한다. 썩고, 신생의 시간과 마주하든가 아니면 숙성되어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이때 문학은 거름일까. 사유하는 행위는 이성에 의한 것이다. 사유를 촉발하는 것은 상상력이기에 제도와 관습에 묶인 상상력과 감성을 해방시키는 일로 ‘시’를 내세운 저자지만(아무래도 시인이라) 문학 전체를 놓고 봐도 무관하다.


소를 키우면서 얻었던 산목숨에 대한 저자의 생생한 감각처럼 물신주의에 깊이 침윤된 언어를 회생 시키는데, 문학의 개입은 필요하다. 현재를 사는 아이들에게 생생한 감각은 어떤 것일까? 감각을 느끼는 게 아니라 각종 미디어의 노출을 통해 일방적으로 감각을 전달받는 시대에 그래도 문학이 사유를 내세워 감각을 깊숙이 흡수시키는 건 사실이다.


『 진정 창의적인 글은 빅데이터 되기를 거부하는 글이다. 빅데이터 되기를 거부하는 글은 언제나 ‘모름’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글이다. 앎의 극단은 모름이라는 영역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며 여기서 앎과 모름을 가늠하는 정신의 탐침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이 정신의 탐침이 떨리는 현상 속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

현재 챗GPT의 출현으로 인간 정신의 탐침마저 시스템화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린 사는 내내 문학이 필요한 시절을 보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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