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의 시선
서미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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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뒤로 갈수록 궁금해서 손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게 읽었지만 우연과 운명 그리고 초자연현상에 너무 기대서 아쉬웠던 책. 


소설보다 오싹했던 작가의 말을 보고 어느 정도 납득했지만 그래도 개연성과 상관없는 세 가지 요소에 너무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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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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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크리스티에게 처음으로 실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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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윈터 리미티드 에디션)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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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완전한 삶을 욕망하다

- 파스칼 메르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프라두가 던진 질문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누가 봐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그들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죠.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다. 누구나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죠.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저마다의 고민이 있죠. 과연 프라두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사람이 존재할까요? 제 생각에는 누구도 자신의 삶이 완전하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저 또한 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우리는 왜 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까요? 완전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01.

그 중 하나는 욕망입니다. 흔히 쓰는 말로 인간의 욕망엔 끝이 없기 때문이죠.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필요하고, 또 하나가 충족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곧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게 됩니다. 욕망의 대상이란 우리가 소유 가능한 유형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사랑, 우정, 분노와 같은 무형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프라두는 욕망의 대상 중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 자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자화상은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뜻합니다. 프라두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인생이 어떤 상(像)으로 충족되길 바라는 욕망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고차원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만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페르소나란 타인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자신이 알고 있는 본인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가면을 쓰고 있는 거죠. 


이는 이 소설이 제시하고 있는 핵심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 주관적인 의견입니다만 페르소나는 자화상말고도 또 다른 욕망과 얽혀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문화적 욕망과 말이죠. 문화적 욕망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자신도 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쁘고 멋진 연예인이 입은 옷을 나도 입고 싶다거나 TV에 방송되고 있는 음식을 보고 나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페르소나와 문화적 욕망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이유는 페르소나가 ‘닮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닮고 싶은 모습의 가면을 쓰는 것이죠. 


하지만 페르소나 또한 완전하지 않습니다. 본연의 자신이 아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일 뿐이기 때문이죠. 이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두 주인공,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가 괴로워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 사실 자화상이 충족된다 해도 이 둘의 괴로움은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욕망이 그들의 머릿속을 헤집을 테니까요.



02.

이 외에도 중요한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먼 욕망이죠. 바로 삶과 죽음입니다. 이는 완전한 삶을 이루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이 왜 완전한 삶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될까요? 우리 삶은 유한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죽을 운명이라는 인식은 종이로 만든 느슨한 끈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어 피부에 거의 닿지 않는다.` 이게 바로 죽음이죠. 언젠가는 죽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아주 멀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SNS를 보며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또 다른 인물, 조르지는 자신의 삶을 죽음에서부터 보며 괴로워합니다. 삶을 죽음에서부터 계산하며 살아간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공포에 떨며 모든 시간에 연연하게 되겠죠. 프두의 말처럼 인간은 인생이 가볍든 힘들든 가난이든 부유하든 관계없이 더 많은 삶의 요소를 원하며, 또 죽고 나면 모자라는 인생을 더 이상 그리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삶과 죽음은 매우 멀리 있는 것 같아 제대로 생각해 보기도 전에 바로 눈앞에 있는 문제에 얽매이게 됩니다.



03.

사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완전한 삶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습니다. 한 세기 전에는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저보다 더 쾌적한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좋겠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획일화된 사회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데 유리한 페르소나를 만드느라 혹은 문화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급급한 나머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거죠. 그런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면서도 사회의 행렬을 따라 그저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철학자 페터 비에리(필명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소설입니다. 철학자가 쓴 만큼 인문학적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딱딱하기만 한 소설은 아닙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프라두의 인생 그리고 리스본을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진 않더라도 내 삶을 채우는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내가 가장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여행하며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실 때에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씹어 삼키시기를 권합니다.

http://me2.do/xeD1tg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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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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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기억이 잘못된 기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가끔 하나의 상황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한 순간인데도 혼란스러울 그러한 일이 매일 일어난다면 어떨까.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주인공 김병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일을 매일 겪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자신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고 독자는 김병수의 기록을 통해 김병수라는 사람을 알아간다. 김병수의 기록이라는 것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김병수의 기록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그의 기록이 사실인지 꼼꼼히 따져보며 읽어야 한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곤 했다. 두 번째 읽을 때에서야 기시감의 정체를 발견했고, 책 속의 미묘한 모순들을 찾기 위해 열심히 앞 페이지와 뒷 페이지를 번갈아가며 읽어야 했다. 독자는 발견할 수 있는 모순을 김병수는 발견하지 못한다. 끝까지 자신의 기록을 맹신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기록들이 미묘하게 어긋난다는 것을 눈치 채면서도 스리슬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믿고 싶은 것을 기록하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있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는 숱한 반전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반전은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김병수의 기록만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책을 덮으면서도 어느 것이 진짜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마지막 반전도 김병수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허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김병수의 기록을 잘 살려냈다. 자칫 산만해 보일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문장자체는 잘 읽혔다. 김영하 작가의 문장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면서도 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읽어 보면 이 소설이 어떻게 김영하 작가와 대중들과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면
☞ http://cafe.naver.com/bstac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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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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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미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베로니카는 제목처럼 시작됩니다. 베로니카가 자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죠. 하지만 베로니카의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베로니카는 빌레트 정신병원에서 보호받게 됩니다. 소설의 배경이 정신병원인 만큼 독자는 미쳤다는 단어를 자주 보게 됩니다. 정신병원이란 곳은 본인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모아두기 위해 만든 곳이니까요.  그렇다면 `미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합니다. (제 주관적인 시점에서 본 것입니다.)

일단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구분법으로는 남들과 같은 방향을 보느냐, 다른 방향을 보느냐입니다. 다른 방향을 보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죠. 본인들이 생각하는 `보통`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미쳤다고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쉽게 적으로 간주하고 무리에서 밀어냅니다. 본인들과 다른 사람을 무리에서 밀어내는 게 `보통`인 거죠. 이처럼 사람들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간단하게 적과 아군을 구분지어버립니다. 


 소설에서는 이것을 넥타이로 형상화했습니다. 정상인은 넥타이를 넥타이로 인식하지만 미친 사람은  그저 알록달록한 천조가리로 인식하죠.  재미있는 건 `보통`과 같아도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바로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또 다른 구분법이죠. 바라보는 방향 자체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만, 숨기느냐 드러내냐에 따라 정상인이 되고 미친 사람이 됩니다. 숨기는 사람은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을 욕망하면서도 아닌 척, 고결한 척 연기를 합니다. 미친 사람이 넥타이가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고 물으면 아무 쓸 데도 없는 물건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말이에요. (넥타이에 관한 것은 여러 관점으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무 쓸 데도 없다고 볼 수도 있고, 미친 사람에게 있어서 쓸데없는 물건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얼마 전 재미있는 실험 동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는데, 군중심리를 실험한 동영상이었어요. 실험은 간단합니다. 4~5명 정도의 사람들을 엘리베이터에 배치합니다. 그리고 그 엘리베이터에 실험 대상이 타면 배치된 사람들 모두 똑같은 행동을 하는거죠. 예를 들어, 우리는 보통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리베이터 입구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실험에 배치된 사람들에게 입구 반대쪽을 바라보도록 지시했죠. 모든 사람이 보통과 다른 방향을 보고 있음에도 실험 대상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향을 바라봤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어요. 엘리베이터에 혼자 있을 때는 아주 당연히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실험 대상이었는데, 엘리베이터에 한 두 사람이 타더니 결국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입구 반대쪽을 바라보자 불안해 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이 실험이 보여준 것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가 보여준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소설 속 정신병원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레트 정신병원은 아주 보안이 아주 열악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자유롭게 탈출할 수 있죠. 그럼에도 빌레트를 탈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직 변호사였지만 공황장애로 빌레트에 들어오게 된 마리아는 자신의 병이 다 나았음에도 빌레트를 나가지 않습니다. 시도해 보려고는 했지만 결국 빌레트 병원의 이고르 박사를 찾아가 다시 공황장애에 결렸다며 입원하기를 원합니다. 마리아 뿐 아니라 빌레트에 입원한 모두가 빌레트에 있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빌레트 안에서의 자신은 남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빌레트 밖에서의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만, 빌레트 안에서는 미친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거기에 소속감을 느끼고 안도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강연을 듣거나, 무리를 짓고, 토론을 하는 등 빌레트 밖에 생활과 똑같은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빌레트 안의 생활이 쾌적하다고 믿고 있죠.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마리아는 본인이 느낀 것들을 쪽지에 써서 전하지만 그들은 마리아가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말할 뿐입니다. 미친 사람이 보통인 그곳에서 완전히 미친 사람은 그들과 다른 사람인거죠. 빌레트 밖에서 보통 사람들이 본인들을 미친 사람 취급했듯이 말이에요.


사람은 다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고결하면서도 가장 천박한) 성적인 욕망은 더더욱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같진 않겠지만 적어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겉으로 내보이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지금 미쳤다고 생각하는 해괴한 행동이라도 모든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되겠죠. 과거 미쳤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화가가 타계한 뒤 각광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죠. 


저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이고르 박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고르 박사가 독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알고는 있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이고르 박사가 정신 병원 환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이 책이 미쳐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그런지, 읽고 나서 나도 미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0.1초 정도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뿐이고 저는 베로니카가나 에뒤아르가 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죽을 때까지 넥타이를 맨 이고르 박사로 남겠죠. 


 이번에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고 파울로 코엘료작가에게 또다시 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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