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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구스 크루 사계절 1318 문고 41
신여랑 지음 / 사계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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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 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동의하는가? 만약 동의한다면 당신은 진짜 천재를 아직 못 만났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이 천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산뜻한 희망을 가진 당신, 아직까지 진정한 절망을 맛보지 않았기에 행복하다.

반대로 천재는 99%의 영감과 1%의 노력, 아니 99%까지는 아니더라도 85%이상은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으로 좌절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천재를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깝게. 그 천재 때문에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품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 그를 시기하고, 증오하고, 신을 원망해 본 당신, 난 그 이에게 이 책에 권하고 싶다.


신여랑의 ‘몽구스 크루’, 비보이를 소재로 했기에 참신하다고, 요즘 아이들의 문화와 입맛을 잘 맞춘 청소년 소설이라고 주목 받는다. 하지만 비보이는 소재일 뿐. 작가도 서문에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이 소설을 철저하게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 자신이 이제까지 몽구로 살아왔음을, 그리고 지금 역시 몽구처럼 수줍고 조심스럽게 우리 앞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구는 춤을 잘 춘다, 몽구스 크루의 다른 멤버가 아무리 춤을 잘 춰도 진구를 따라 갈 수는 없다. 그런 진구가 되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그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진구는 천재니까. 진구는 무대에만 나서면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유연하면서도 강한 동작으로 비트와 하나 되어 청중의 눈길과 호흡을 사로잡는다. 춤의 달인이다.

그런 진구를 형으로 둔 동생 몽구, 몽구는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비보이 나인’의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형을 감시하라는 엄마의 부탁으로 ‘몽구스 크루’에 들어갔지만 춤을 추면서, 진구 춤의 진가를 보게 되면서 형이 밉다. 춤만으로도 충분히 밉고, 볼 때마다 괴로운데 거기에 한 술 더 떠 사랑마저도 진구의 몫이다. 진내인, 몽구스 크루에 들어온 비걸, 도발적이면서도 어딘가 여린 구석이 있어서 몽구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버린 그 애가 진구를 사랑한다. 진구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선 것도 아닌데, 그녀가 진구를 사랑한다. 그럼 그렇지, 가진 놈은 다 갖고 없는 놈은 마지막으로 남겨 두고픈 하나까지도 끝내 빼앗겨 버리는 것이 비극의 전형 아닌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진구가 다른 비보이 클럽에 들어갔다가 불화가 생겨 이탈하면서 괴로워하자 몽구는 진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진구의 인간적인 나약함에 연민을 느끼게 된 몽구는 ‘몽구스 크루’의 자존심을 만회할 대회를 준비하면서 뼈가 으스러지게 연습한다. 그리고 몽구는 결국 해낸다. 작은 대회긴 하지만, 다른 이들은 ‘허접한 상’이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자신의 갈고 닦은 실력을 인정받는 계기이기에 더 없이 소중하고 뿌듯한 상을 받게 된다. 비로소 진구와 내인의 사랑도 축하해 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내인을 향한 짝사랑의 온기가 아직은 몽구의 마음을 덥게 하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몽구를 이해하고 공감하면 할수록, 내 안에 숨겨 둔 열등감을 확인하기에 마음이 불편하다. 열등감을 가진 이들끼리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내 상처도 버거운데, 타인의 상처를 만나는 것이기에 반갑지만도 않다. 작가는 열등감을 가진 이들을 위로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고, 바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몽구는 진구에게 품었던 열등감에서 해방되었을까? 작가가 첫 책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느끼는 불안함과 두려움처럼 몽구도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느낄 것이다. 춤도 시작이고, 글도 시작이고, 어쩌면 몽구와 작가는 더 큰 열등감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었는지 모른다. 그 전보다 겨뤄야할 사람이 더 많아지고, 넘어서려면 더욱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한 ‘진짜’들이 모인 세계로.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와 몽구에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몸부림치게 만든 열등감, 그 작은 씨앗은 지금 열매를 맺어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열등감의 씨앗을 품게 한다는 것을.

사는 게 다 그만 그만해 보이고, 무슨 일이 제일 재미있는지, 내가 뭘 가장 잘 할 수 있는지 몰라서 답답하기만 한 당신, 혹시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해도 안 되는데 그토록 샘이 나는 누군가에게는 ‘무엇’이 있음을 본 적이 있는가? 거기에서 출발하라. 그를 더욱 시기하라, 질투가 힘이 되게 하라. 간절한 구함, 그 곡진함이 기적처럼 1%의 영감을 주는 날, 그대는 99%의 노력을 미친 듯이 쏟아 내리라. 기필코 당신 이름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열등감의 씨앗 하나 품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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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마을 - 외국인 노동자, 코시안, 원곡동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국경 없는' 이야기
박채란 글 사진, 한성원 그림 / 서해문집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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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이제 올 겨울만 지나면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다. 마음이 급한 이웃 엄마들 중 몇몇은 진작에 아이 방을 바꿔 주었다. 새로 산 아이용 침대와 책상, 벽면으로는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 파스텔 톤으로 방이 바뀐 그 집 아이는 학교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두 달 후면 학교에 간다는 압력(?)만 있을 뿐, 우리 집은 새로 산 가구가 없어서일까? 딸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래선 안 되겠다, 나도 뭔가 아이의 방에 변화를 주어야지' 하고 산 것이 세계지도였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방 한쪽 면에 어린이용 세계 지도를 붙이고 나니, 아이보다도 내가 더 흐뭇하다. '5년 후면 둘째도 좀 클 테니까 미국에 있는 시누이 집에 가 볼 수 있겠지? 그 다음엔 프랑스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유럽 여행도 하고 싶은데, 10년 내에는 가능할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내 눈길이 머무는 곳은 지도에서도 미국이나 유럽 쪽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건대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가깝지만 너무 멀었다. 같은 땅(아시아)에 사는 이웃이라고 하기엔 내 마음의 국경이 너무나 높고 견고했다.

 '국경 없는 마을(박채란 글, 서해문집)'은 아기자기한 표지 그림부터 친근함이 묻어 났다. '외국인 노동자, 코시안, 원곡동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국경 없는 이야기'라는 부제는 '원곡동'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고등학교 때 읽었던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원곡동은 원미동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 시절 원미동 사람들처럼, 지금 원곡동 사람들도 땀과 눈물, 희망과 웃음을 모두 가진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불법체류자'라는 우리 사회 인권의 사각지대, 그 벼랑 끝에서도 '희망'이라는 풀뿌리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원곡동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집을 나간 엄마(아내)를 가슴에 묻은 채 내일이면 고향 인도네시아로 떠나는 여섯 살 띠안과 그 아빠, <코시안의 집>에서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눈치를 보는)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 주면서 훗날 그들의 기억 속에 따뜻한 한국이 떠오르기를 바라는 김주연선생님, 오른손이 프레스에서 으스러졌던 아픔을 겪은 친구 '초리'를 두고 혼자서만 고향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야 하는 '누리끼',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7년째 쉼터지기를 하며 쉼터 사람들에게 야박한 소리를 해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센터를 떠나지 못하는 재호아저씨, 학교에서 아이들과 싸울 일이 생겨도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쫓겨나게 될까봐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안산 최초의 몽골인 중학생 따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남편과 함께 이 곳에 왔지만 결국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와 아직도 다 갚지 못한 200만원의 빚뿐'이라는 조선족 아주머니 김복자씨, 작업장 안에서는 정리해고 0순위가 될까봐 숨을 죽이는 외국인 노동자이지만, 퇴근 후에는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며 돈보다는 외국생활의 경험을 더 소중히 여기는(월드컵을 보기 위해서 2달 동안 직장까지 그만 두었다는) 아름다운 청년 재키.
 
  쉽고 간결한 구어체로 씌어졌기 때문일까?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라면, 특히 인권을 말하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이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동화처럼, 각각의 이야기는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마주 앉은 그들이 각자의 육성으로 자신의 말을 하는 양 생생하다. 분명 표지에는 한 사람의 필자 이름이 적혀 있는데 말이다. 무엇엔가 홀린(?) 듯한, 그 신기함의 비결은 에필로그에서 밝혀졌다. '국경 없는 마을, 그 입구에서 출구까지'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는 8번째 단편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김주연 선생님이나 재호 아저씨처럼 '내국인'의 신분으로 원곡동에서 한달 넘게 그들과 같이 살았던 필자의 이야기가 내겐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감동적이었다. 단순히 책을 쓰기 위해서 만나고 인터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치를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가슴앓이는 독자에게 충분한 호소력이 있다. 필자가 거쳤던 험난한 마음 길은 독자가 이 책을 통해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선입견, 그 마음의 벽을 허물고 그들을 우리의 이웃, 내 아이의 친구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부는 원곡동을 떠나는 필자와 함께 아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무렵이면, '원곡동 사람들도 나처럼 외롭고 슬프고 이기적인, 그러나 법적으로는 나처럼 보호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그녀의 깨달음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도 다시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10년 가까이 살면서도 불편함이 없다던 한 이웃은 드디어 큰 아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강남 입성'을 결정했다. 나처럼 초등학교 학부모가 될 엄마들 중에도 '행여나,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내 아이가 절친한 친구가 될까' 두려워 취학통지서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주소지를 옮긴다. 그렇게 해서 한 동네에서도 특정한 학교에 아이들이 모이다 보니 내 아이가 다닐 학교의 학급당 인원수가 (인근 다른 학교보다) 10명 이상 많아졌다고, 나 또한 그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다. 우리도 이렇게 순간 순간 남보다 더 나은 조건과 기회를 원한다. '코리안 드림'은 외국인 노동자(불법 체류자)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꿈'을 가지고 산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 나보다는 더 나은 자식의 미래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꿈 꿀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나아가 그 꿈을 위해 우리를 이웃이라고 믿고 여기까지 찾아 온 그들에게 우리는 친구가 되어 줄 '의무'가 있다.

  학교를 들어가는 순간, 아이는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돈이나 외모로 사람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것, 피부색이나 언어의 '다름'을 차별의 이유로 삼지 않는 것,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기꺼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국경 없는 마을(원곡동)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아이에게 가르칠 것은 분명해졌다.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보면서 언젠가는 내 아이와 친구가 될 지도 모르는 원곡동 아이들, 그 아이들의 고향도 짚어보게 해야겠다. 아이는 분명히 학교라는 곳을 기대하게 되리라. 그 곳에서 만날 많은 친구들과 무엇을 하고 놀까, 벌써부터 고민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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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너에게
벌리 도허티 지음, 장영희 옮김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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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의학적으로는 어느 쪽에도 이상이 없다 하는데도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아서 애간장이 타는 부부가 있는가하면, 단 한 번의 관계로 아기가 생겨 그 존재를 확인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미혼부/모가 있다. 두 경우가 모두 당사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이지만, 같은 무게의 고통이라고 하기에는 주변사람들에게서 받는 시선이 너무나 다르다. 내 주변에서도 두 경우를 모두 보며 많은 생각들이 오갔던 차라, 청소년 소설에서 미혼부/모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참신한 충격이었다. 과연 그들은 그 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내 관심은 온통 그 '짐', 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부터 원망과 부정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한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가 있었다.

헬렌과 크리스는 고3이다. 음악학교에 가기로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똑똑한 여학생 헬렌, 그리고 영문학을 지망하는 순수하고도 따뜻한 심성을 가진 크리스, 그 둘에게 단 한 번의 '특별한 시간'은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세상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것은 비록 견디기 힘든 불안과 혼동의 시간이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된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연인을 만나) 집을 나갔던 엄마를 찾아 나서는 크리스나  헬렌이 외할머니가 무심결에 내뱉은 '나쁜 피'라는 말에 의문을 품으면서 가족사의 비밀이 벗겨지는 과정은 이 소설의 또 다른 굵직한 축이 된다.
엄마마저도 '그 짓을 몇 번이나 했냐'며 딸을 혹독하게 몰아치고 낙태 수술대로 오르게 하는 부분에서는 이 소설의 배경이 서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다. 소설의 시점은 크리스(미혼모가 아닌 미혼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1인칭 시점인데, 헬렌의 심리는 '이름없는 너에게'로 시작하는 (크리스가 받은) 편지로 인해 충분히 설명된다. 중심은 분명 크리스에게 있지만, 전체적으로 일기(크리스의 입장)와 편지(헬렌의 입장)가 교차하면서 두 젊은이가 한 생명을 자신의 책임으로, 자신들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눈물겹도록 치열한 과정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물론 원하는 대학 기숙사를 향해 짐을 꾸리는 크리스에게는 아이의 탄생이 큰 변수가 되지 않겠지만, 헬렌에게는 분명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이를 키우고 몇 년을 유예한 뒤 다시 시험을 치러 대학에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맨 마지막 장면(할머니 품에 안긴 아기가 가족들간의 상처를 꿰매주고 있는 것 같다는 구절의 상징)으로 볼 때 헬렌도 예정된 대학에 가고 아기는 할머니가 어머니가 돌봐 준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소설 이후, 그 아이를 누가 키우고 헬렌과 크리스가 과연 결혼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는 이 소설에서 부차적인 문제이다. 나는 과연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라면, 헬렌처럼 결단의 순간에 용기있게 아기를 선택하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크리스를 떠나게 할 수 있을까? 또 크리스처럼 여자친구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아기를 지키고 끝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어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아니라, 내가 고3때 이런 일이 생겼다면, 혹은 내 딸이 이런 일이 생겼다면 말이다. 어쩌면 너무나 상식적이고도 옳은 선택인 줄 모두가 알지만 소설과 같은 선택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내 주변에서도 (고등학생도 아닌,) 대학시절에 아이가 먼저 생겨 아이 때문에 결혼을 했지만 결국은 이혼을 하는 경우도 보았기 때문에 꼭 결혼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아마 헬렌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기는 지켜야 하지만, 아직 서로가 준비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혼이라는 끈으로 크리스를 자기 곁에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들의 성의식 속에 사랑=결혼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나 마찬가지일텐데, 어떻게 아기와 남자(아기의 아빠)를 분리해서 선택할 수 있는지, 나는 헬렌의 고3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판단의 성숙함과 현명함에 감탄을 했다. 헬렌은 부모나 남자친구에 의존하지 않고, 또 그 어떤 사회적인 편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할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인 것이다.
물론 크리스의 헬렌에 대한 사랑도 정직하고 순수하지만 나중에 고백하듯이 크리스는 아기보다는 헬렌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임신이라는 것이 남자에겐 간접경험이니까, 더구나 같이 살지 않는 여자친구의 임신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크리스는 아기의 탄생을 통해서야 비로서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준비는 둘째 치고라도) 자신의 삶을 위한 준비도 아직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작가는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결혼)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사랑이라는 미묘한 울림이 주는 공명의 효과-즉 젊은 남녀 둘 만의 사랑이 단지 그 둘의 지금 현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상대방은 물론이요, 각각의 가족(과거)과 그들이 책임져야할 또 다른 생명(미래)에 이르기까지-를 마치, 여러 개의 동심원을 그리듯이 잔잔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몇 년 전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 한 분에게서,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졸업 후 찾아와서 낙태를 한다고 돈을 빌려 달란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다. 이미 공공연한 현실로 인정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이 '미혼모', '낙태'라는 단어이다. 결혼여부를 떠나 '이름없는 너'로 인해 고통받고 그것이 상처로 남겨진 사람들이 이 책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특히 크리스처럼, 남자들이 본다면 조금은 더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미 비슷한 상황에서 새 생명을 포기했던 이들에게는 (오히려 죄책감을 증폭시켜) 치유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지라도, 지금 막 뜨거운 사랑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예방적(?)인 효과는 확실할 것 같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거리를 배회하는 비행청소년들에게만이 아니라 헬렌과 크리스처럼 밝고 맑은 심성의 여느 청소년들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이름없는 너'로 인해, 숨쉬는 것조차 버거워지는 순간이 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누구에게든 일어 날 수 있는 일이, 누구에게 일어나느냐에 따라 생명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되, 이 소설처럼 조금은 앞서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소설의 배경이 우리나라였다면?' 이라는 의구심을 애써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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