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지중해식 인사
이강훈 글.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동네 서점에 들렀다가 껍데기부터 나의 마음을 자극하는 책이 있어 당장 샀다. 제목까지 나의 마음을 자극한 이 책이 바로 <나의 지중해식 인사>였다. 지중해...는 사실 나에게 가까운 곳도 아니고 친근한 곳도 아니었다. 해외여행하면 처음으로 유럽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지중해는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나 싶다. 내 주변에선 딱 한 사람을 빼놓고 '지중해'를 보고 왔다는 사람은 없고 지중해나 지중해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몇 해 전 조수미가 불렀던 '낙소스 아리아드네'란 곡의 낙소스가 섬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어쩌면 관심이 없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다.
적은 관심 때문이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그리스의 산토리니만 해도 너무 멀게만 느껴졌고,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너무나 달라보여서 아무튼 조금 신비롭고 나의 일상과는 많이 다른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책은 다른 여행에세이와 다르다. '여기서 이걸 보고, 저기서 이걸 먹었다'는 식의 에세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다. 아주 깊은 일상을 다루고 있고, 또 빠른 걸음으로 구경하기 바쁜 여행이 아니라 자리잡고 앉아서 눈으로 이것저것 다 담아낼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지는 여행을 상상하게 된다는 점에서 달랐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낯선 지중해의 작은 섬들에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첫번 째 이유로 쉽게 친구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타국으로 여행을 온 외국인이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친근하게 다가갔다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배워야 할만큼의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 중간 쯤 지중해 어느 섬의 항구 앞 작은 교회 벤치 앞에서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들끼리도 관심을 가져주고 친구가 되고 여하튼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친구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그런지 동네친구도 한 번 가져본 적이 없고, 또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도 자주 보는 초등학생 여자아이 한 명을 제외하고 누가누가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 잘 알지 못 하는 나에게는 참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생각해보니 몇 해 전 학교 선배가 신혼여행으로 그리스 산토리니에 다녀온 뒤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을 때 부터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말을 걸어주고 '너희 신혼부부니? 그렇다면 여기 근처에 있는 해변에 가봐', 혹은 '신혼부부라면 꼭 먹어야 할 음식이 있으니 꼭 먹어봐,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어', 심지어 기념품 가게 주인아저씨도 '여기로 신혼여행을 왔으니 꼭 오래오래 행복해야한다'며 사랑이란 단어가 가득 담겨있는 기념품을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관심이 지나쳐보이지도 않았고, 간섭한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으며, 정말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알려준 해변도 가보고, 음식도 먹어보고 그러면서 고마움도 느꼈고 또 금새 친구가 되었다고 자랑을 했었다. 그래서 나도 꼭 다음에 신혼여행을 가거든 산토리니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났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산토리니의 이아마을에는 주소가 없다고. '무슨 마을 김씨 아저씨 댁'이라고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실제로 지은이는 그렇게 적어준 주소로 한국에서의 소포를 받았다고 했다. 아!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나 마음에 드는 발상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정해준 반, 번호로 죄수번호같이 개개인마다 다른 번호를 만들어놓고 예쁜 이름 대신에 '몇 반 몇 번'으로 불리는 것이 너무 억울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건 너무 인위적이라고 생각했다. 비인간적인 짓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나는 숙제를 안 해왔거나 선생님께 뭔가 말씀드려야 할 때 '몇 반 몇 번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몇 반 아무개입니다'라고 했었다. 소심한 나만의 반항(?)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반번조차 인위적이라고, 비인간적이라고 그렇게 싫어했었는데! 무슨 마을 김씨 아저씨 댁이 주소라니! 얼마나 이상적인가!
이 책 표지에 보면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의 배낭 속 그림엽서 같은 이야기'란 글이 있다. 정말 한장한장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주 차분한 어조로 그린 일상생활과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었다. 한 장 한 장 내 머리 속에 꼼꼼하게 넣어놓고 싶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그림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지중해'하면 내가 떠올릴 이미지들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