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랬었다. 그저 아닌 듯한 착각이었을 뿐 ...

 2014-05-25 17:21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한겨례, 등록 : 2014.04.23 20:54 수정 : 2014.04.24 09:20
 
세월호 참극의 현장을 이틀에 걸쳐 보고 온 박명림 교수가 통절한 심정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야. ○○야….” 목 놓아 딸 이름을 부르며 대답 없는 칠흑의 바다를 향해 “내가 저 배 속으로 대신 들어가겠다”고 울부짖는 엄마가 지금 내 옆에 있다. “저 조명 불빛 아래 찬 바다 밑에 내 딸이 누워 있다”고 오열하는 엄마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
풍어를 기원하고 만선을 기다리던 항구는 그렇게 사망자 명부를 응시하고 자녀의 시신을 기다리는 통곡의 장소가 되어 있다. 엄마아빠의 넋 나간 눈동자들과, 가슴을 후벼 파는 외마디 비명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신음 소리조차 목에 걸리는 이 단말마적 비극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가, 왜, 어떻게 이런 통곡의 바다를 초래했는지 우린 반드시 물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진도의 절규를 처절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사람 사는 사회, 좋은 나라를 위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숱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대참사가 또 터졌기 때문이다.
꽃다운 젊음이 가라앉는 걸
눈뜨고 지켜보는 나라
한국호의 참담한 민낯이 보였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 선진국이라는 자만에 더해, 전자·반도체·조선·철강·자동차를 포함한 첨단산업들이 세계 선두권이라고 자랑해왔다. 금번 사태를 야기한 조선산업과 해운산업 역시, 전자는 주요 국제비교지표(수주량, 수출액, 수주 선박당 평균 표준화물선 환산톤수)에서 장기간 세계 1위였고, 후자는 세계 5·6대 강국을 넘나들었다. 속도의 상징인 통합전자정부지수와 인구 백만명당 인터넷 가입 건수도 세계 1위였다.
기술과 산업, 첨단화와 정보화의 이 휘황한 세계 선두권에도 불구하고 급박한 인간위기상황이 도래하자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안전지침, 초기 연락, 위기 대응, 인명 탈출 안내, 구조작업, 정부의 합동 대처는 리더십과 책임감, 신속성과 첨단성, 통합지휘체계의 어느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우왕좌왕 상태에서 배가 ‘가라앉고’ 꽃다운 생명들이 ‘죽어가는’ 실제 상황을 눈뜨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상황의 긴박함, 가족들의 절실함과는 달리 정부는 지리멸렬하였다. 생사를 가를 결정적인 상황 초기, 정부는 지휘 중심도 책임 핵심도 없었다. 전시도 아닌데 서로 미루고 허둥대다 눈앞에서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실황을 지켜보고 있는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실종자 가족들은 선실의 학생들처럼 오직 정부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결과는 죽음이었다. 어려운 ‘수중인양작업’을 통해 ‘시신’을 건져내는 데 최선을 다하면서도, 촌각을 다퉈 ‘생명’을 구출해야 하는 ‘수상구조작업’이 절실할 때는 왜 사력을 다하지 않았는지 거듭 통탄하며 묻게 된다.
시시각각 늘어나는 팽목항의 사망자 현황판은 시대의 대표 아픔을 증거한다. 최초 승선 시의 탑승자에서 생존자와 구조자로, 다시 실종자로, 그리고 끝내는 사망자로의 창졸간의 급변은 정부의 유능과 무능이 국민들의 생과 사의 갈림길임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23일 오전 경기도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세월호 침몰사고 단원고 희생자를 위한 임시 합동분향소가 마련돼 조문객들이 ‘대한민국 미워요’라고 적힌 조화 앞을 지나가고 있다. 안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 못난 나라의 ‘패덕’을 부디 용서하지 마라
아직 신원을 몰라 인상착의만 쓰여 있음에도 금방 알아차린 엄마는 상황판 앞에 그대로 무너지며 지상에서 가장 슬피 통곡한다. 집안 경제가 어려워져 수학여행 경비를 출발 직전에야 이웃에게 꿔서 낸 한 아빠는 “내가 딸을 죽였다”며 흐느꼈다. 체육관에는 탈진하여 링거를 꽂은 가족들도 계속 늘어갔다. 한 아빠는 수술로 아픈 몸을 이끌고 내 아이를 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다.
어떤 아빠는 안산에 대기하고 있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여보, ○○이 나왔어” “어머니, ○○이 나왔어요”라고 전화를 건 뒤,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트린다. 아빠들은 그렇게 초인적 의지로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이토록 큰 슬픔을 도대체 어떻게 참는지…. 한 아빠의 짧은 답변이 모두를 대변했다. “아이가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 그거 하납니다.” 그 하나의 간절한 소망조차 모두 빼앗아버린 게 우리의 정성이요 능력이었다.
처음 배 안의 시신 3구를 인양했을 때 체육관 전면 전광판을 일제히 응시하는 눈빛들의 숨죽인 긴장과 초조는 지금껏 내가 경험한 가장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나라의 무능과 억울함에 가슴이 미어져 굵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배 안 세 ‘시신’의 첫 ‘인양’ 직후 ‘생명’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은 마침내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박근혜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내 아이를 살려내라! 살려내라!” 엄마아빠들의 행진 외침은 심야의 섬 공기를 갈랐다. 결국 총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반복하던 총리는 대화를 중단하고 차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경찰청 차장이 나타나, 가족들에게 불법이니 도로점거를 풀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가족들은 청와대 행진을 막지 말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총리에게 차에서 내려 대화를 하자고 했다.
총리는 문도 안 연 채 대답이 없었다. 가족들은 새벽까지 기다렸으나 차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경찰청 차장은 다수가 도보로 이동하는 것은 위험해서 허가할 수 없다며 대표를 뽑아 출발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버스로 가면 허락하겠습니까?” “대표들만 출발하면 청와대행을 보장하겠습니까?” 경찰청 차장도 답이 없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고, 총리의 답변을 포기한 가족들은 며칠째 한숨도 못 잔 몸을 이끌고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불통이었다. 슬픔과 분노를 넘는 가족들의 자제와 사려에 가슴이 더 저며 왔다.
가족들의 팽배한 불신은 정부의 극도의 무능과 혼선과 불통 때문이었다. 특히 정부를 철석같이 믿고 기다리다 자식들을 죽였다는 분노와 자책 때문이었다. 정부는 속히 조치해야 한다.
첫째, 이번 참사는 결코 국가안보도 국가기밀 사항도 아니다. 국민생명의 집단죽음이다. 따라서 어떤 정보도 숨겨선 안 된다. 사실 조작과 유언비어를 제외하곤 어떤 의견과 정보도 통제해선 안 된다. 모든 정보를 가장 정확하고 가장 신속하게 공개하라.
둘째, 유족 대표들이 대통령 또는 청와대와 직접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직통 채널을 개설하라. 대통령과 청와대가 직접 통합지휘를 해야 할 중대 사안이고 위급상황이기 때문이다.
셋째, 속히 합동분향소를 확장 설치하라. 진도, 안산, 인천, 서울은 물론 전국의 주요 도시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하여 학생과 국민들의 조의의 장소로 삼아야 한다.
넷째, 현지에 파견된 경찰을 축소하고 사복경찰들은 철수시켜야 한다. 지금 진도에는 너무 많은 경찰이 진주해 있다. 또 경찰은 가족들의 대화에 개입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 경찰은 가족들의 안전과 편의를 제공하는 최소 역할에 그쳐야 한다.
선장의 경악할 행태는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그는 위기시 한국 사회 최고 책임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재연했다. 몽골의 고려 침략, 일본의 조선 침략, 한국전쟁 때, 절체절명의 국난에서 국가 지도자들은 늘 국민에 앞서 먼저 도망을 갔다. 심지어 북한의 침략 직후 대통령은 금번 선장과 똑같이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을 서울에 남게 한 뒤 자기만 먼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럴 때마다, 위난과 전화에 버려진 민초들의 죽음과 고초는 극에 달했다.
천안함 때도 장교 7명은 전원 생존한 반면 사망한 46명은 모두 사병과 부사관들이었다. 당시 국가 최고위직들-대통령, 총리, 국정원장, 대통령 비서실장·정책실장, 감사원장, 여당 원내대표, 재경부 장관-은 군대를 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선박직 15명은 전원 생존하였고, 사망자들은 하위직과 일반승객들이었다. “내가 힘이 없어 아이를 죽였다”는 아빠들의 회한은 이 사회의 본질을 찔렀다.
한국 사회는 꼬리 자르기가 법치와 책임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전국민적 공분을 야기한 사건들도 처벌은 항상 실무급들 몫이었고, 책임자는 권력의 보호 속에 건재했다. 자기 진영과 자기 이념의 유불리만을 따져 처결하는 행태의 반복 속에 국가기강은 뿌리째 무너졌다. 행정·정보기구·군·경찰·기업·금융을 막론하고 동일했다. 지도층들은 바른 애국심과 참다운 공적 윤리는커녕, 법적 책임조차 거의 지지 않아왔다. 무너진 기강, 골병든 나라, 그 썩어문드러진 표출이 지금 진도의 통곡이다.
진도는 근본이 무너진 나라의 참혹한 표상이다. 공직사회의 책임윤리는 파탄나고, 대통령의 어떤 영(令)도 서지 않으며, 사회는 온통 권력과 돈의 힘만 난무해온 모습의 압축판이 세월호 침몰과 사후대처가 폭로하는 한국호의 민낯이다. 이게 과연 나라인가?
근대정치학을 개창한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잘 조직된 공화국은 언제나 시민에 대한 상벌제도가 분명하여, 공적을 세웠다고 해서 결코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일반국민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에 비하면 한국 지도층들은 국가기여를 명분으로 갖은 죄를 면탈받아왔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그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반공과 국가안보에 헌신했어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유린했으면 엄벌해야 한다. 경제발전에 기여했어도 위법했으면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정권 기여와 자기 진영이면 책임도 처벌도 없었다. 거기에서 국가는 안으로부터 무너져갔다.
“내가 자식을 죽였다”며 목놓아우는 이 단말마적 비극은 대체 무엇인가
사회지도층이 생명위협 무릅쓰고 국민 지켜왔다면 선장 선원이 아이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탈출하는 짐승만도 못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누가, 왜, 어떻게 이 통곡의 바다를 초래했는지 우린 반드시 물어야 한다
이 죽음들을 참되게 위로하는 길은 사람 중심 나라를 만드는 것뿐이다
지도층이 생명 위협에도 국민을 끝까지 보호하고, 추상같은 기강을 보여왔다면 나라의 근본이 이리 처참하게 붕괴되지는 않았고,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학생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들만 탈출하는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모태는 이 사회였던 것이다.
세월호 침몰의 또 한 본질은 돈·기업 제일주의와 신자유주의다. 무리한 출항, 안전 불감증, 점검 소홀에 일관된 현상은 기업의 이익추구와 규칙·규제의 작동불능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 허용된 선령 연장의 목적도 기업이익의 보장이었다. 기업친화정책의 한 결과는 진도의 참상이었다.
규제는 규칙이다. 규칙은 자유와 평등, 인간안전과 생명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기 때문에 완화해선 결코 안 된다. 외려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법조·세무·교육·금융·해운·건설·문화·언론… 한국의 모든 부문과 영역에 만연한 낙하산과 전관예우는 기업과 전관들의 결탁과 이익을 보장하는 반면 규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공공성을 철저히 파괴한다. 꼭 금지해야 한다.
금번의 경우 한국해운조합의 38년에 걸친 낙하산·전관예우는 정부-조합-기업의 강고한 결탁을 통해 국가의 기업에 대한 합법적 규제를 불가능하게 했고, 끝내는 국민을 죽음의 바다로 몰아넣었다. 세월호 침몰은 전관예우, 관경(官經)유착, 규제완화, 규제작동 불능의 총체적 귀결이었다. 기업들과 은행들의 방만경영, 비자금 조성, 도덕해이, 규칙위반이 초래한 대재앙인 환란으로 인한 고통을 치렀으면서도 또 규제완화인가? 부동산 투기, 족벌경영, 문어발 확장과 자영업 붕괴, 카드대란, 저축은행사태도 모두 규제완화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비정규직의 확산은 이제 국민안전을 위협하는 핵심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보안·경비·건설·철도·해운·운수와 같은 안전 관련 직군의 비정규화와 외주화는 우리네 일상 삶의 안전을 파괴한다. 이번에도 선장은 1년짜리 계약직이고, 핵심선원 17명 중 12명이 비정규직이다. 개별 삶의 불안정성이 타자의 생명과 공동체의 안전파괴로 연결되는 무서운 현실이다. 극소수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모든 삶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오직 각자도생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자영상태·자연상태가 도래한 것이다.
자연상태와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이 결합된 한국적 삶에서 반(反)생명화와 반인간화는 이제 기축 현실이다. 자살률, 저출산율, 산업재해사망률, 교통사고사망률, 직계존속살인율… 즉 주요 인간지표와 생명지표들은 모두 세계 최악 수준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인간안전을 뜻하는 문명상태·국가상태(=정치상태)에 반대되는 의미의 야만상태·자연상태(=전쟁상태)에 돌입해 있다. 문명화는 모든 사람이 국가 안에서 안전과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시민자격부여, 즉 시민화(civilis)를 뜻한다. 모든 사람의 평등한 인간화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문명화는 산업화·물질화·정보화의 급진전과 반생명화·불평등화·반인간화의 극심화라는 양극단을 치달았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2003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자살 숫자는 같은 기간 이라크 전시 사망자보다 더 많다. 한국은 평시 자기살인이 세계 주요 전쟁국가 사망보다도 더 많은 전쟁상태의 삶인 것이다. 믿기 힘든 충격적 현실이다. 타인살인, 군내 사망, 산업재해, 교통사고를 합치면 한국의 인간지표는 세계 최고의 야만성 자체다. 우리는 한국을 보며 국가발전경로에는 후진·중진·선진(先進)국뿐만 아니라 선진(善進)에 반대되는 악진(惡進)국도 있음을 알게 된다.
금번 참사를 계기로 우린 선진(善進)으로 대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정신과 영혼의 본래 뜻은 몸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숨·바람·호흡이다. 이제 우리는 이 사회의 숨·바람·호흡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혁명이다. 돈과 물질, 권력과 허세로부터 인간과 생명, 자유와 평등을 향한 새 기풍을 진작하지 않는다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다. 아니 팽목은 이미 한국의 압축판이고, 세월호는 대한민국호의 다른 이름이다.
절대적 비극에는 절대적 반성이 필요하다. 절망적 상황에는 전면적 개혁만이 살길이다. 이 죽음들을 참되게 위로하고 바르게 기리는 길은 한국 사회를 사람 중심 나라, 생명 우선 사회로 환골탈태시키는 것뿐이다.
청년들은 이 못난 세대, 불행한 조국의 현실을 기필코 혁신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나라를 발본적으로 뜯어고치라. 이 패덕의 세대, 야만의 국가를 부디 광정하라.
 
●다시 묻는다, 이게 진정 나라인가?
등록 : 2014.05.05 19:51 수정 : 2014.05.06 09:17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②
 
대통령은 하야를 각오할 정도의 ‘책임 윤리’를 보여야 한다
인간의 어떤 말도 비극적 죽음을 위로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의 갑작스런 강제분리는 얼마나 큰 고통인가? 팽목항 상황판에서 기록해온 이름들을 안산 합동분향소의 위패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며 절절히 깨닫는다.
특히 분향대 중앙에 다다른 순간 ‘흡’ 하는 신음과 함께 호흡이 멎고 말았다. 시신 발견 직후 팽목의 아빠가 안산의 엄마와 할머니에게 불러주었던 ○○ 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저 해맑은 눈이 죽었다는 게 지금 현실인가?
삶과 죽음을 강제로 갈라놓은 집단참사가 건국 이래 너무도 많았지만 이런 꽃다운 영혼들은 아니었다. 주기적인 전국민적 상복 착용과 문상 행렬은 언제 끝나려나? 우린 마음의 상복을 너무 자주 입어오지 않았는가? 슬픔과 비극의 크기는 참회와 변화의 크기로 이어져야 한다.
소조기가 끝나도 시신을 못 찾자 한 엄마는 “아이를 못 찾으면 난 여기서 우리 애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통곡한다. 다른 엄마의 절규는 내가 팽목에서 가장 깊게 심장을 베인 말이다. “○○를 못 찾으면 나를 팽목에 묻어줘요. ○○가 누워 있는 이곳에서 내 넋이라도 애를 보며 지내게.”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절대감정을 결코 담지 못한다. 나는 그 엄마의 슬픔을 표현할 능력이 없다. 인간에게 부모란 대체 누구이며 자식은 또 무엇인가? 아! 신은 지금 이 엄마의 절규를 듣고 계시리라.
삶에서 자연재난은 때론 불가항력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재난이 인간적 요인에 의해 재앙으로 바뀔 때다. 세월호 참사는 재난 단계에서 충분히 수습 가능했으나 끝내 재앙으로 변전되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점은 바로 인간요인에 의한 재앙이다. 죽음에 값하는 보상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요인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통해 최소한의 속죄라도 해야 하는 이유는, 재앙의 공동죄인들로서 재발 방지의 엄숙한 소임 때문이다. 생명피해의 규모에서 금번 사건은 4·19 혁명 및 5·18 민주화운동보다 크다. 이 아픔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비극을 잊는다면 재앙은 자녀들 시대에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인간에 의한 재앙
정부의 ‘총력구조’ 반복 약속에도
가족들이 보기엔 지켜진게 없었다
다시 묻는다, 이게 진정 나라인가?
이번엔 제대로 아파야 한다
적당주의 만연한 한국사회서 ‘개혁하는 척’ 관습과 결별 않으면 국민안전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가장 시급한 일은 희생자 가족들의 치유다. 유족에 대한 개별 위로와 치유는 정녕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치유는 본래 삶의 전체적인 온전함의 회복을 뜻한다. 따라서 완벽한 진상 규명과 철저한 책임자 처벌, 국가의 확실한 보상과 지원, 젊은 영혼들의 희생을 바르게 기릴 추모시설 건립,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는 세상을 만들 확고한 대안 마련이 꼭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인 치유는 불가능하다.
우선 공동의 기억체계와 사회체계를 구축하자. 단발성 반성을 넘기 위해 침몰일인 4월16일을 국가지정 ‘국민안전일’로 만들어, 모든 안전사건들을 함께 기억하고 위로하자. 동시에 국가와 국민 모두 매년 안전의 규칙·제도·예산·의식을 철저히 점검하는 계기로 삼자.
또 ‘국민안전관’을 건립하여 건국 이래의 지상·해상·공중에서의 수많은 안전사고로 인해, 국가와 사회가 지켜주지 못했던 희생자들의 명편들을 안치하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며, 주요 참사일에 기억행사를 가져 국가 반성과 국민 각성을 위한 확고한 마음 판으로 새기자.
끝없는 사건·사태·재난·재앙의 통계와 기록은 한국에서의 안전한 삶은, 제도와 체제보다 요행과 기적 때문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무서운 현실이다. 따라서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나도 언제든 희생자가 될 수 있다. 19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메스트르는,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특히)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언명한다. 정부와 지도자의 수준은 다시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명심해야 할 점이다.
구조활동에 가장 좋다는 소조기 끝 날 저녁이 되도록 성과가 적자 시신 망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내 아이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신 수습이라는 마지막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려 하자 미만한 슬픔은 침몰 직후보다 더 애절했다. 분노한 엄마 아빠들은 팽목항 가족대책본부에 해양수산부 장관과 해양경찰청장 및 차장을 앉혀놓은 채 “대통령이 가족들 전화는 언제든 받는다고 했으니 연결해 달라” “살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은 자식 꺼내 달라는 것도 못 해주냐” “애 몸 망가지기 전에 꺼내 달라. 제발 한번만 안아보게”라며 울부짖었다.
며칠 전처럼 다시 대통령 호출이었다. 사건 현장에서조차 대통령을 계속 찾는 이 불행한 상황은, 국민 생명은 계속 죽어가는데 누구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국가기강 붕괴의 총체적 귀결이었다. 한 아빠의 외침이 정답이었다. “대통령이라도 오라고 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나랍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대통령이 다녀가도 생명구조·기강확립·문제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왔다 가도 똑같아요.” 옆 아빠의 끝없는 절망은 이 사태의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었다.
즉시’ ‘신속’ ‘최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력구조’의 반복 약속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초기 구조작업의 완전 실패로 인해 정부 불신은 하늘을 찔렀다. 가족들이 보기에 매 단계 매 상황마다 정부의 약속은 하나도 지켜진 게 없었다. 게다가 위기 현장은 아직 100명 이상 바다 밑에 갇혀 있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청와대 안보책임자는 청와대가 재난관리의 사령탑이 아니라고 발언하는 부도덕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위와 아래 모두 능력과 책임의 붕괴는 상상 이상이었다. 또 묻는다. 이게 진정 나라인가?
이번에는 제대로 아파야 한다. 한국 사회는 만연한 적당주의와 ‘척 문화’와의 단호한 단절을 요구한다. 개혁하는 척하는 기존 관습과 완전 결별하지 않으면 국민안전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특히 경제 때문에 국면을 전환하자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대증요법의 반복은 한국 사회와 경제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고 인간안전과 국가근본을 갉아먹은 주범이기 때문이다. 근본적 개혁을 해야만 한국적 삶과 사회는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다.
대통령은 책임윤리 의식 보여라
호통자에서 국정당사자로 내려와 무능·무책임 국가조직 개편하고 법적 정치적 책임 물어야한다
국민이 사적문제에 빠져 있다면 삶은 점점 더 남의 지배를 받는다
공적 시민이 돼 똑바로 보고 말하며 병든 제도와 관행 전부 뜯어고치자
우선, 대통령은 하야를 각오할 정도의 책임윤리를 보일 필요가 있다. 국가 호통자에서 국정 당사자로 속히 내려와야 한다. 너무 많은 말바꾸기·약속파기·책임회피는 국가기강의 빠른 붕괴로 연결되었는바 기강 회복을 위해 서릿발처럼 솔선해야 한다. 국가의 전 영역에 걸쳐 박근혜 정부에서 내려보낸 낙하산과 전관예우는 전원 교체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낙하산·전관예우의 근절 의지를 믿는다. 극도의 무능과 무책임을 노정한 청와대·내각·해경을 포함한 국가 주요 기간 조직은 전면 개편되고 엄히 법적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민관결탁의 고질적 부패 고리도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국가혁신은 뿌리를 혁파해야 가능하다. 첫째, 이념주의와의 분명한 결별이다. 한국에서 반공이념은 종교에 가깝다. 국가의 최고 생존요소인 안보는 결코 약화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반공주의는 안보 영역에 한정해야 한다. 좌경·용공·친북 사건으로 탄압받은 독재 시대 주요 민주화운동들은 오늘날 무죄 또는 조작사건으로 판결되고 있다. 똑같이, 오늘의 인권 강화, 복지 증진, 평등과 공공성 제고, 경제 민주화와 규제 강화, 관료·교육·언론·검찰 개혁…모든 실질적 개혁 요구를 친북·용공·좌빨·종북이라고 공격하는 한 국가개혁과 선진국(善進國)은 불가능하다. 즉 반공주의와 개혁담론의 분리만큼 한국은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둘째, 성장만능주의, 기업제일주의의 종식이다. 충격적이게도 한국은 지금 10대 재벌의 매출액과 자산규모가 모두 국가 전체 총생산(GDP)을 넘는 완전 재벌국가다. 기업소득률, 기업저축률, 사내유보금 비율도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면 빈부격차, 노동시간, 비정규직, 노조조직률, 노동분배율, 학력별 임금격차, 남녀 임금격차, 자영업 비중과 폐업 주기, 대학등록금…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악 수준이다. 즉 한국에서 개별 삶의 안정성과 안전성이 최악 수준인 이유는 개인요인이 결코 아니라 사회구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계속 성장제일, 기업친화를 외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저출산·산업재해·교통사고 역시 한국민들이 특별히 자살이나 출산 거부의 본성을 타고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체제의 산물이다. 오이시디 선진국들은 대부분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못살 때부터” 평등성, 공적 지출, 노조조직률, 복지비용이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계속 발전하여 선진·안전·자유·복지·평등 국가를 건설했다. 즉 발전 속도와 수준이 아니라 방향과 경로가 문제다. 노동·평등·복지·공공성의 강화가 안전사회·지속발전·복지체제·인간국가로의 첩경이라는 점이다.
셋째, 금번 사고처럼 일상의 삶은 이제 국가보다 법인과 훨씬 더 많이 만난다. 따라서 인간 안전은 나날의 삶에서 만나는 법인 및 조직과의 관계 문제다. 이제 법인과 개인의 관계를 인간 중심으로 변혁해야 한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조차 원래 뜻은 인간을 말한다. 우리가 늘 대면하는 기업·학교·조직·관료·경찰·병원·은행은 개인보다 훨씬 강하다. 따라서 국가가 법치를 통해 ‘법인규제-개인보호’를 강화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설정해야 한다.
넷째, 무너진 법치의 회복이다. 그러나 정설인 ‘법 앞의 평등’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본시 ‘법 안의 평등’을 뜻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도 이것이다. 법 앞의 평등은 ‘법 이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유지하고, ‘법 안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강화하며, ‘법 이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영구화한다. 즉 법 앞의 평등은 허구다. ‘법 안의 평등’이 바로 법치다. 법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로 구성되는 국가=정치=문명 상태의 통치규범과 제도를 의미한다. 즉 ‘법치’란 ‘법 안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추구되어온 것이다. 폭력=전쟁=자연 상태에서 법은 침묵하며, 인간은 결코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빠들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냐” “착하게 살아온 나한테 대한민국은 왜 이러냐”며 분노했다. 그들은 그런 국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 말이 문제의 한 본질이었다. 즉 국민으로서 세금 낸 만큼 요구·감시·비판했으면 국민을 이렇게 헌신짝 취급 하지는 못했다. 국민이 국가에 회초리를 들지 않으면 국가가 국민에게 회초리를 든다. 아니 국가는 종종 회초리를 넘어 몽둥이를 들며, 때로는 금번처럼 아예 죽음을 선사한다.
국민·시민으로서 세금을 낸 뒤 사인·개인으로 돌아가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해온 우리들의 익숙한 관행이 문제였다. 이유는 공공과 사사의 분리 때문이다. 동서양 모두 사적, 사사라는 말은 원래 ‘박탈’을 뜻한다. 즉 공적 영역, 국가의 일에 참여할 자격을 박탈한다는 말이다. 노예·여성·아동·야만인·장애인에게는 먹고사는 데 집중하게 하는 대신 국가의 일에 참여할 공적 자격을 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서민들은 오직 먹고사는 데만 매달리게 하는/매달려야 하는 지금 시대도 그러하다.
사적 영역은 먹고사는 문제, 즉 가정관리=경제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사적 문제에 빠져 있다면 공적 일은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여 내 삶을 좌우하게 된다. 공적 문제를 멀리할수록 나의 경제=사적 영역=가정=삶은 점점 더 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모두에게 공적 문제에 참여할 자격·조건·능력을 주는 것이 바로 문명화·시민화·인간화인 것이다. 문명화는 곧 모든 개인의 자유화·평등화·공공화다. 자유·안전·복지·평등을 이룬 선진국들은 모두 참여(투표율)와 조직화(노조조직률)가 높은 나라들이다.
공화국의 출발 원리처럼 인간들은 국가 안에서 똑같이 자유로우면 안전하고 행복하다. 즉 전체 차원의 평등한 자유야말로 개인안전과 국가안정의 보장 장치다. 공공과 사사는 하나다. 가장 좋은 정치는 민중의 자기지배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간 각자의 자유와 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정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체제(isonomia)다. 결국 자유는 평등이며, 평등은 자유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면 평등할 수 없고, 평등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은 불의와 혼란의 시대다. 극도의 부정과 혼돈에서 르네상스라는 전혀 새로운 정신혁명과 제도혁신이 나왔듯 이제 한국적 사유혁명과 제도창신을 시작하자. 그리하여 국가의 정명(正名)과 정도(正道)를 찾자. 사려하는 공적 시민이 되어 똑바로 보고 똑바로 말하자. 똑바로 참여하고 똑바로 연대하자. 그렇지 않다면 똑바른 삶도 똑바른 나라도 가질 수 없다.
인간들은 좋은 체제를 경험하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모른다. 자유롭고 평등한 복지국가=삶의 안정국가가 얼마나 좋은지 함께 꿈꾸자. 2천년 전의 지혜를 떠올려본다. “어느 누구도 새로운 법과 제도로 공화국을 개혁했던 사람들만큼 그렇게 높이 찬양받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신들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찬양을 받았다.” 오늘의 패악을 참회하고, 반드시 좋은 나라를 물려주어 훗날 신 다음으로 칭송을 받자.
낡고 병든 제도와 관행을 전부 뜯어고쳐 자유와 평등을 멋있게 제도화하자. 그리하여 사랑과 정의가 넘실대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자. 그 소명에의 응답은,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무릎 꿇고 써야 할 참회록’인 동시에 ‘신 다음으로 칭송받을 국가창신’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박근혜 대통령, 심판자·호통자·포고자에서 내려와라"
입력:2014.05.02 10:18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1. 시인도 죽었고 선생도 죽었습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메시지와 달리 우리 한국 사회는 소위 ‘교수’들로부터 어떤 영감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키팅 선생이 ‘오늘을 살라’고 역설하며 학생들에게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런 모습 찾기가 힘듭니다.
2. ‘세월호 침몰 사고’로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가 드러났습니다. 대통령은 “적폐(積弊·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라고 품위 있게 말씀하셨는데 사실 학자들이 먼저 지적했어야 합니다. 적폐를 쌓기 쉬운 권력이 스스로 적폐라고 말을 하기까지 이 땅의 지식인들이 입 닫고 지냈다는 거죠.
3. ‘세월호 침몰 사고’ 때 보여준 지식인들의 태도에서 희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누구 한 사람 ‘광야의 목소리’로 적폐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해양 관련 학자들은 어느 시점부터 ‘알아서’ 인터뷰를 거절합니다. 그것이 권력으로부터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앞세우기보다 그 학자들은 그저 일신의 안전을 위해 회피한다는 거죠. 권력이 제스처만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중국 사상가 루쉰이 지적한 지식인의 자세, 한완상 선생이 저서 ‘민중과 지식인’에서 설파한 지식인의 책무가 새삼 일깨워집니다.
4. 그 지식인들이 권력의 적폐에 눈감아 버리니 권력 스스로가 “내가 적폐였다”고 자기 고백을 하고 적폐를 강화하는 블랙 코미디와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학계가 지식 장사꾼들에 의해 ‘죽은 지식인의 사회’가 되고 만 거죠
5. 2일 중앙일보 ‘중앙시평’에 연세대 박명림 교수(정치학)가 지식인으로서 일갈했습니다. 에둘러 말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습니다.
그는 ‘세월호 참사와 박근혜 정부’라는 제목을 통해 “과연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궁극의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정치학자로서 박근혜 정부의 네 가지 잘못을 지적합니다.
6. 첫째, (박근혜 정부는) 건국 이래 전직 대통령 2세가 이끄는 최초의 정부이다.…세계적으로 2세 정부들의 업적은 나빴다. 이러한 보편성을 딛고 한국적 예외를 보여줄 수 있을지 크게 주목되고 있다.
둘째, 최고 정보기관을 포함한 국가기구의 대선개입 논란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자체가 정당성의 도전을 받으면서 합법성·합헌성·정통성 문제를 야기한 민주화 이후의 최초 정부다.
셋째, 국가 정보기관이 간첩 증거조작을 위해 외국 국가문서를 조작한, 건국 이래 최초의 정부다.
넷째, 민주화 이래 최대의 해양 재앙을 기록한 정부다.
7. 박 교수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국가 추락과 위기 심화를 막기 위해 현재 가장 중대한 요인은 결국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속히 심판자·호통자·포고자에서 내려와야 한다. 시급하다. …포고와 호통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힘으로 찍어 누를 때 가능했던 과거 독재와 권위주의 통치 방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8. 지금 이 시점에서 이 같은 목소리를 낼 지식인이 몇이나 될까요? 단 한마디라도 권력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면 좌파로 몰아가는 세상에 박 교수의 지적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는 일성이 되었습니다. 사회가 부여한 지식인의 책무를 버리고 숨기 바쁜 이들이 결국 세월호 참사를 불렀습니다
9. 그 적폐가 그 아까운 청춘들을 사실상 학살했습니다. 지식 사회의 정의와 양심이 죽어 우리 사회 신경과 핏줄이 모두 말라 썩은 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전체선택 장바구니에 담기

전체선택 장바구니에 담기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