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희생
마거리트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 코러스(KORUS)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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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인의 국민성을 깊이 파 들어가면,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오직 단 하나의 질문, 즉 그것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올 것인가에 대한 답에서 찾아왔음을 알게 된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어니스크 드 샤브롤에게 보낸 편지(183169); 모리스 버먼의 인용구절 -

 

외국과의 전쟁은 유산계급이 생각하기에 이득이 생길 것 같을 때만 일어난다. - 조지 오웰 -

미국에게 전쟁이란 국민을 속여 대기업을 배불리는 수단이다. - 노엄 촘스키 -

 

전쟁은 사기다. - 스메들리 버틀러 -

 

한국전쟁 관련 수십 권의 서적들에서 히긴스의 언급은 딱 한 권에서 미군사고문단 장교와 지프차을 타고 철수하는 종군기자로서 스쳐 지나가듯 언급될 뿐 대다수는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언급이 거의 없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최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다. 마거리트 히긴스의 6.25라는 제목으로 KBS 역사스페셜에서 - 생뚱맞다고나 할까 - 방영한 것 같다(텔레비젼이 없기도 하고 KBS 공영방송은 관심을 끊은 지 아주 오래되기도 해서 유튜브 관심 강좌를 찾다가 스쳐 지나듯이 알게 됨. 약간 들추어 보았지만 내용이 여전히 그렇고 그래서 전체 시청은 안함). 이어서 동아일보에서 왜 기사화했는지 모를 정도로 별 내용도 없이 6·25 종군 여기자 히긴스 아시나요의 제목으로 또 다시 등장했지만 ...

 

이 보다 이전에 전쟁의 목격자 - 한국전쟁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 전기라는 도서가 출간되어 관심을 갖고 보았으나 책소개에서 나타난 특징들(히긴스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거나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친구, 동문, 직장 동료, 가족-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증언을 통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작성한 글이라는 점과 또 다른 종군기자들의 시각과 관점이 너무 대조를 이루기에) 때문에 구입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최근 홍보와 기사를 접하면서 허긴스가 직접 기술한 종군기록 도서인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홍보하는 자유를 위한 희생(한국어 제목이 원문충실 개념에서 많이 벗어난 임의적·자의적이고도 아주 잘못 됨. 실제목은 ‘War in Korea’)을 구입, 당시의 상황(예로 시민으로서 한국전쟁의 당시 45.12 - 51.4까지 경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유일한 형태인 귀중한 일기로 기록한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에서 처럼)을 간접경험을 해 볼 겸 그리고 종군기자로서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점과 함께 또 다른 시각에서 전쟁상황을 기록한 종군기록과 비판적 비교가 된다는 점들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전쟁이란 정치적 행위, 전쟁수행방법은 그 정치적 민주주의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피측은 물론 특히 아측의 전쟁수행방법들에 관한 감시역할도 중요한 것이 종군기자(전시언론)의 의무라고 본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히긴스의 자국이익 중심의 고집적인 편견과 의도적인 왜곡들과 망상에 가까운 공산주의 체제의 악마화를 접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여 던져 놓으려다가 ...

 

역자후기에서 역자가 바라보는 - 매혹적이고 끼있는 - 히긴스(그리고 미국)와는 다르게, 우선 히긴스가 전쟁 발발과 함께 내보인 시각(이후 내내)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세계관으로 보인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동아시아지역 특파원이라면 당시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대다수의 국가들은 물론 심지어는 영국 조차도 한국전쟁발발을 내전으로 평가해 (유엔 집단안보 협약에서 벗어난) 참전을 꺼려했음 - 영국은 미국의 채찍과 당근외교정책으로 결국 떠밀리다시피 하면서 참전함 - 을 알고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마산과 부산간 남쪽해안도로 진동리 전투에서 실제 자기 병사들의 전투상 어려움 측면에서만 내전을 언급할 뿐, 내전에 참전 자체가 부당성·불법성이라는 생각은 아예 안하는 듯) 히긴스가 보는 남한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최후의 비공산주의(, 반공) 전초기지이자 보호국이었다면서, 내전을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라는 냉전식 이분법적 강한 대결의식(자유주의 국가 외에는, 공산국가는 독재국가라는 인식 즉, 적으로 설정하고 이후 타자의 완전한 부정 혹은 악마화)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출현하기 시작한 미국의 대외정책의 변화(, 니츠의 군사적 봉쇄정책, NSC-68)와 정확하게 들어맞는 주장들(일례로 핵무기 이외에 재래식 무장증강과 강인한 보병확충·육성의 필요성 주장.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발발은 미국에게 이를 일깨워 준 것으로 차라리 잘된 것이라는 주장. 대공산국가에 대응한 강력한 군사주의를 반복해서 주장)을 한다. 소련군보다 6개월 이상이나 지연된 49년 미군철수에 대한 시각 조차 비공산국가(반공)의 보루로서의 한국에 대한 옳지 못한 정책이라는 시각을 무초의 노력을 내세워 언급한다(그리고 히긴스의 희망 대로 전쟁발발로 대규모로 다시 들어 온 미군은 철수하지 않고 수십년 동안 지금 현재까지도 주둔하며 원치 않는 이상한 역할들을 하고 있다). 히긴스와 같은 이러한 인식들(제국주의 사고)이 바로 내전의 자체적 빠른 종식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국제적 상식(과 협약) 및 미국내 법률적 위법성에서도 벗어나 타국(혹은 외세, 히긴스의 입장에서는 자국)이 내전에 주도적 개입을 하게 하여 3년이나 끌면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는 물론 그 휴유증과 풀 수 없는 족쇄를 지금까지 채우고 있는 것! (‘한국전쟁과 유럽: 유럽의 냉전과 영국참전의 함의’, 박계동, ‘유엔과 한국전쟁’, 2004에서;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신화’, 박태균, 2006)

 

더욱이 소련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북측을 파악·묘사할 때 히긴스가 보이는 편협한 시각들과 허구와 전도된 시각들이 적지 않게 거의 전체를 관통해서 나온다는 것(허구를 사실로 하나하나 교정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의 지휘를 받는 북한침략군이 외세의 도움없이 단독으로 남침을 강행했다면 - 사실상 미군사고문단이 장악해서 지휘하고 있는 - 한국군이 국경에서 격퇴했을 거라는 주장 (‘남침이라는 어휘와 마찬가지의 국경용어의 문제점! 미국 남북전쟁에서도 남침·북침의 개념과 남북의 국경개념이 있었을까? 후술한 바에 의하면 히긴스는 38선이 국경이란 국제법적 의미가 없음을 말하면서도 당시의 미국적·제국적 개입 시각에서 38선을 국경으로 기정사실화한다). 중공의 팔로군 출신의 조선족병사들을 뽑아 전력을 강화해 15개 사단 이상으로 1000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했다는 허구적 침소봉대 등등. 한편, 히긴스는 로버트 준장의 말을 인용하면서까지 미군사고문단이 497월부터 한국군에 대한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고 진술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 한국전쟁 발발 20일전인 - 195065일 히긴스가 소속되어 있는 뉴욕헤럴드 트리뷴지와의 회견에서 한국군은 미국의 이익을 지켜주는 충성스러운 번견이고, 미국의 납세자로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군대다. 우리는 불과 500명의 미군장교를 이용해 우리를 위해 대포를 쏴줄 10만명의 한국인을 훈련시키는데 성공했다라고 말한다(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 히긴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는데도 왜 위와 같이 아전인수적 허구를 진술하고 있는걸까? 계속 알아본다면 ...

 

히긴스가 보이는 편협한 시각들과 사실과 다른 허구 및 전도된 시각들은 북한군을 파악·묘사할 때 뿐만이 아닌 전쟁발발 전 남한의 경제 즉, 인플레이션을 묘사할 때 조차 심각한 정도로 나타난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한국정부의 무책임한 정부지출과 화폐발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례! 실제는 해방 직후 수개월 동안 본국으로 귀환하는 일본인들의 엄청난 조선은행권 남발(미점령군의 묵인)과 이어진 미점령군이 통치비용(, 점령정책 수행비용)- 현지조달 측면에서 인민위원회 등 자치기구들이 접수해 관리하고 있던 적산들을 몰수해 신한공사를 통한 일률적 지세(소작료) 징수와 미곡공출도 모자라서 - 주로 한국은행권의 무차별적 남발에 의존했다는 것이 지속적으로 폭증하는 인플레이션의 주된 요인으로서, 점령군의 통치는 점령지의 인민의 경제나 후생정책이 아닌 점령정책(군사적목표달성을 위한 정책)의 수행 차원이라는 정책적 차원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은행권이라는 현지조달로 수행했던 것이 주원인인 것! 더욱이 전쟁 발발 전 - 히긴스가 49-50년도 ECA원조를 퍼부었다고 언급하면서 이 원조를 무기로 한국정부의 무책임한 정부지출과 화폐발행을 엄포를 주어 통제했다고 주장하지만 - 미군의 철수에 따른 점령정책 수행비용(한국은행권 남발)이 제거되고 이승만 정부의 재정안정계획으로 인플레이션을 가까스로 꺽기 시작하자마자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내내 미국의 전쟁비용은 또 다시 현지 한국은행권을 대여 받아 수행하는 유엔대여금으로 인한 엄청난 화폐발행은 인플레이션을 지속적으로 폭증시켜 특혜층들을 제외한 인민들(대다수 농민)은 누구나 할 것 없이 50년대 말까지 절량농가와 보리고개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는 점은 말하지 않는다. 전쟁 발발 전의 남한의 상황(경찰국가, 1950년 선거, 이승만에 대한 평 등)에 대한 서술 또한 그 배경과 핵심들(미군정의 정책 즉, 자기 책임)을 모두 빼 버리는 식의 반공의 보루인 보호국 수반과 관련 옹호식 변명조의 겉͕핥기식 시각을 나타낸다. 히긴스의 적반하장식 발언(여러 차례에 걸쳐 반공의 보루로서 보호국이라는 시각 아래서 옹호하면서도 미국의 관점에서는 아래로 깔아놓고 보는 사실을 왜곡하는 시각)은 히긴스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듯, 도서 전체에 걸쳐 보이는 전반적인 현상이다.(‘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한국전쟁’, 박태균, 2007; 문답으로 읽는 한국경제사‘, 정태헌, 2010)

 

더욱이 종군의 궁극적인 목적이 미군이 전투에서 어떻게 방어하고 죽어가는지 즉, 미군들이 처한 상황들을 사실 그대로 목격하고 알리기 위해서라고 진술한다(스미스 부대의 오산전투에서 새드릭 이등병과 지연작전 임무로 천안에 투입된 24사단 정찰대 시거스 소령의 전사 등으로 시작해서, 대전전투와 딘소장의 영웅성에 이르기 까지 8월 말까지 미군의 사기저하 등등 계속됨). 그래서인지 73일의 미군의 평택오폭(?)사건 조차 폭격으로 사지가 절단된 수십명의 피난민 시신들과 개천과 논에서 피난민 시체들의 썩는 냄새 등을 단순히 관찰자(, 구경꾼) 입장에서 운이 없는 정도(‘불운한’)로 말하는데 그친다. 더욱이 73일 당시 평택역 화물열차에서 17연대 병사들이 74일 오산전투에 쓸 탄약과 보급품을 하역하던 중이었고 이 폭격으로 많은 사상자(200)가 발생한 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연대장인 백인엽도 다리 부상으로 오산전투에 참여 못함). 그의 주관심사인 오직 아군 전투기에 의한 미군을 향한 맹폭격(명시하지도, 발생하지도 않은 미군의 피해)일 뿐, 히긴스의 시각은 보편적 시각에서 벗어난 전형적인 자국중심적·자국몰입적 시각이 많다는 점! ‘흰옷 입은 사람들, 피난민은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하라는 맥아더의 지시와 함께 미지상군은 물론 특히, 미공군 전투기들의 목표물로서의 무차별 대량학살은 이미 널려있었음에도 히긴스의 청각과 시각과 영혼을 자극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대표적으로 50725일부터 3일간 벌어진 미군의 의도적이고도 계획적인 전폭기 조준폭격과 기관총 학살인 노근리 철로와 쌍굴다리 대량학살사건 등등). 히긴스의 피난민 인식 역시 스스로 병사들이 들려주는 얘기에 의해 전염되었다고는 말하지만, 미군병사들은 물론 히긴스가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는 맥아더의 인종차별적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게릴라와 구분 안되는 제거대상 집단! 히긴스 자신의 시각인 탱크를 운전하고, 박격포를 쏘며, 기관총을 발사 할 수 있는 동양의 농부라는 동양의 적’! 아마도 이러한 인종차별적인 히긴스적 사고가 밭에서 일하는 그리고 논에서 소를 부리며 일하는 농부들에게 재미삼아 기총소사와 포탄, 네이팜탄을 퍼붓는 미군의 전쟁수행방식의 잔혹성 기저에 놓인 영혼일 것(빙산의 일각일 뿐이지만 최근 뉴스타파에서 나라NARA에서 발굴한 일부 영상 https://newstapa.org/article/8t77O). 이러한 히긴스의 시각과 부합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들에 대해 구역질을 내보이며 이를 전세계에 알린 영국 종군기자 레지널드 톰슨(한국을 통곡함, Cry Korea), 헝가리의 티보 메라이 기자 등의 시각과는 완전하게 차원을 달리하는 것. 화가인 피카소 조차도 511월에 조선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고발한 신천대학살(50.10-12 사이 북한점령 기간 중 미군의 대량학살과 미군의 지시에 의한 남측 군경을 중심으로 서청 등의 우익청년단의 군민대량학살)을 당시 장진호까지 올라간 히긴스가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이후 1951년과 1952년에 각각 국제민주여성연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들의 미군범죄 조사결과 보고서를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히긴스는 이에 대해 여전히 침묵했다. 진동리 전투에서 체크중령대대가 도로에서 낮잠을 자던 인민군 일개 소대를 생포해서 학살한 사건 진술에 대해 제네바협정 위반이라던가 그 야만성에 대한 이의 제기없이 그냥 사살했다는 사실만 서술하고 지나간다. 반면, 인민군의 미군부상병학살(직접 목격이 아닌 다른 이로부터 들은 얘기)이나 남한군의 공산주의 혐의자 즉결처형(히긴스가 목격했다고 서술, 혐의자일 뿐인 자의성을 함의)은 잔인성과 야만성을 꼭 덧붙여 언급한다. 한편 히긴스는 중공군의 ‘8개 전투수행규칙(정확하게는 ‘3대규율 8항주의’)‘의 엄한 규율을 통한 포로에 대한 대우를 하나의 전술로만 폄하하고 이것 저것을 들면서 매도하기 바쁘다. 이러한 사고와 정신적 태도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근본 심성으로 느껴진다. 중대나 소대 단위에 소속되어 미군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홍보하는 그의 역할에는 보편적 세계관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보편적 세계관과 전쟁수행방식은 민주주의의 수준을 헤아릴 수 있는 척도 중 하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신기철, 2014;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황성환, 2018; ‘폭격-미공군 공중폭격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2013;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신경득, 2002; ‘전쟁과 사람들’, 표인주 외, 2003; ‘브루스 커밍스의 북한, 김정일 코드’, 2005, 원작은 2004; ‘전쟁의 그늘’, 한화룡, 2015)

 

히긴스는 미군이 화력이 약한 전쟁 초기에 중공군이 개입을 왜 안했는지 남쪽으로 후퇴할 때 조차 개입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의아해 하면서 그 이유로 인민군이 자력으로 이길 수 있는 한 전쟁과 거리를 두려고 했으리라는 자국중심 제국적 세계관에 갖힌추정을 한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중공의 영향력은 처음부터 상당했다고 하면서, 이를 507월 한국군 전초기지에 중국어를 구사하는 포로가 잡혀왔으며 호주머니에서 중공군 군사교범을 발견,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 중공군 사령관 주덕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을 그 논리의 토대로 설명을 한다. 또한 북한이 중공과 소련의 보호국이라는 자국식의 미국적·제국적 인식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바로 이러한 힘의 논리에만 의존하는 시각들과 세계관들이 미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에치슨 주도의 발빠른 움직임으로 25일 당일 유엔안보리 소집(결의문 82), 27침략으로 규정하고 군사개입 결정(결의문 83)하여 3일만에 개입(29일에는 38선 이북을 넘어 평양비행장 폭격)하게 한 기초로서 이미 집단안보체제라는 유엔(협약)의 권위와 역할을 추락시키고 이후 미국의 거수기 노릇으로 전락시킨 배경이며 이 전쟁이 유엔의 이름을 단 유일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것.

 

히긴스가 의아해 한 발발 초기 7-8월 중공군이 내내 개입하지 않은 것은 모주석의 28일 연설과 주은래 총리의 성명에 나타난 그대로, 영국과 마찬가지로 유엔협약에서와 같이 국가간의 문제가 아닌 국가 내의 내부의 문제 즉, 내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힘의 논리로만 본다면 미국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했겠지만, 그것 조차 내부 문제인 사항을 북조선이 용납했을지는 미지수이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한 전쟁이란 정치적 행위에서 외세의 개입은 그 발언권 즉, 주권의 일부를 허용하는 것. 전황이 위급했을 때 북조선의 요청으로 중국의 참전은 휴전협정에 중국이 함께 서명하게 된 요인이 된 것처럼 ... 남한은 휴전협정에 서명 조차 거부된 것은 발발 초기에 외세에 의한 작전권·통수권 자체가 넘어가므로서 전쟁의 판도 자체에서 발언권·주도권 자체의 차단을 초래한 것. 작전권 이양이라는 대전협정이 이승만의 편지 한 장으로 이루어졌다고들 알려졌지만, 무초의 반협박에 가까운 강요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 지금까지도 이러한 상황이 그 이후로 내내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 요즘 입에 오르내리는 한미워킹그룹처럼 ... 이것이 히긴스의 보호국 개념의 모습이다.

 

인천상륙작전 후 38선을 넘지 않도록 중국이 사전 경고한 것도 유엔의 집단안보협약 개념에 기초한 38선 원상회복을 주장한 것으로서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원래의 유엔헌장의 일방적 파괴(8월 이후 안보리에 소련이 복귀함에 따라 안보리에서의 통과가 어렵게 되자, 38선을 넘는 군사행위의 정당성을 사후 11월에 평화단 결의라는 편법과 서방국들의 거수기 노릇으로 38선 원상회복이라는 원래의 유엔협약 정신을 부정하는 결의를 말함. 38선 넘는 군사행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29일 평양비행장의 폭격을 시작으로 중국의 개입 이전에 이미 7-8월 기간 B-29중폭격기를 거의 매일 동원한 무차별 38선 이북의 폭격으로 북한의 도시들은 초토화시킨 상태)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의 입장에서 완충지대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고 더구나 당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사회주의 특유의 국제주의적 협력관계를 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중국혁명 즉, 국공내전 승리)과 관련된 역사적 관계다. 그럼에도 중국은 여러 면에서 유엔협약(내전 불개입 원칙과 38선 원상회복)을 한계선으로 설정했음은 분명하게 보인다(인민지원군의 참전 후 한강 이남의 안성?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더 이상의 남하에 전력집중을 중단하고 38선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에서 오르내리는 전선을 유지했다는 점 등).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 이 저작을 쓴 511월 이후에도 히긴스에게는 그 세계관과 시각으로는 안보이겠지만 ...

 

모택동을 독재자로 보는 시각은 참으로 역사와 (적으로 상정하고 독제체제로 설정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무지이거나 왜곡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그리고 히긴스가 독재자라고 하는 모주석은 동북을 조선인의 땅으로 두어 차례 시인한 바 있다. 구한말 이전부터 조선인이 거주하던 땅으로 조선인 파출소까지 있었던 것을 일본제국이 힘을 내세워 간도를 제 멋대로 팔아먹었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승리)과 관련된 역사적 관계란 항일전쟁에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의 역할과 만주에서 김일성의 조선혁명군 및 이후 항일연군(중국의 해방 후, 조선의 해방이라는 국제주의)과 일제해방 이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 해방후 귀국 중이던 - 수 백명의 조선의용군의 주도로 모집·편성된 대규모 동북조선족 의용군의 활약과 북조선의 전폭적 국제주의적 협력지원이 동북으로 진출한 (미국이 대량물량으로 지원하는) 국민당 군대를 몰아내면서 관내로 확장하는 형태로 중국혁명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 히긴스가 말하는 중공의 팔로군 출신의 조선족병사들이 아니고, 당시 조선의용군 소속 동북조선족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조국은 조선이라는 정체성(독립과 해방에의 열망 - 히긴스는 이를 정치적 세뇌교육의 결과 지적판단장애로 평가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 중 일부가 해방 직후와 전쟁발발 바로 전에 조선의용군 부대 그 자체로 조선인민군에 합류했다는 것은 여러 증언과 입증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지금은 중국국적의 재중동포이지만 당시는 북조선과 중국의 이중국적이 부여되었다고 함. 그리고 그 이전에는 모주석이 인정한 바와 같이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거주하는 조선인의 땅이었다. 휴전 후에 국적은 각자 원하는 대로 선택). 이런 사실은 점령 전의 미정책결정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중국어를 구사하는 포로가 잡혀왔으며 호주머니에서 중공군 군사교범을 발견,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 중공군 사령관 주덕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을 한국전쟁에서 중공의 영향력은 처음부터 상당했다고 하는 것으로 연결짓는 것은 미국이 자기 보호국과의 관계로 보는 시각으로서 아마도 미국인들이 오로지 힘의 논리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한, 실재와 실체를 보기란 어려울 것! 히긴스의 단순한 서술을 순진하게 수용한다고 치더라도 그들은 전쟁 바로 전에 북조선에 합류한 조선의용군 소속 조선족 인민군이라는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바 있다. 동북조선족과 중국인민과 북조선구성인민은 20년대 말, 30년대 초부터 함께 한 사람들이라는 것! 하나의 통일된 사상(국제주의를 통한 독립과 해방)을 갖고 국공내전(중국혁명전쟁)에서 조선의용군 소속 동북조선족의 전투력(전쟁경험)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당시 인민들은 모주석은 물론 김일성 총사령관에게도 진정한 존경심을 보였다는 것이 공통사항이다. 그들의 관계를 인민지원군 참전 바로 직전에 모주석은 조선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다치게 하지말라는 명령을 내린 반면, ‘조선인민군, 노동당, 민주당파, 김일성 동지에게 우애와 존중의 뜻을 나타내야 하고 군사규율과 정치규율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명령도 내렸다는 점이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하겠다. (중국 조선족 증언으로 본 한국전쟁’, 정현수 외, 2006;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2008, 원작은 1991; ‘한국전쟁’, 와다 하루끼, 1995; ‘한국전쟁 비화’, 조세프 굴든-‘정전체제 60, 덫에 갖힌 한반도’, 한승동, 녹색평론 132호에서 재인용)

 

히긴스는 한국전에 투입되는 중공군의 병력규모는 200만명으로 5개 야전군으로 편성되어 최초 투입은 임표가 이끄는 제4야전군이고 이어서 투입된 중공군은 진의가 이끄는 제3야전군이라고 말한다. 히긴스가 제시하는 자료들은 근본적으로 오류이거나 왜곡된 것으로 거의 적(인민군, 중공군)이라고 명명한 부대는 숫자에서 과장하거나 전술에서는 폄하하고 아군(미군)은 수에서는 과소되거나 전술에서는 변명하거나 미화되는 현상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편견이 역력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임표는 508월 당시 제4야전군 사령관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자리를 이미 옮긴 상태인데다가 조선출병에 계속 반대해서 주은래의 비판을 받은 사람. 이후 아프다는 핑계로 빠짐. 모주석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제1야전군 및 서북군부 사령관이었던 팽덕회가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및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어 제3야전군 9병단 예하 3개 군과 제4야전군 13병단 예하 6개군 총 약 41만 병력으로 각 군 사령관의 지휘 하에 3개 루트로 압록강을 넘었고, 지휘는 야전관 사령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팽덕회 총사령관을 정점(물론 최종 모주석의 의견이 중요)으로 두 병단사령관과 더욱 중요하게는 9개 군 사령관과 정치위원들과 참모들이 지휘의 주축으로 이루고 있었음은 홍학지 회고록을 통해서 잘 파악이 된다. 이 중 9병단의 3개 군은 비교적 날씨가 좋은 산동성 주둔 병사들로서 전황의 다급함으로 인해 동북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참전통지를 받고 월동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개마고원을 거쳐 장진호전투에 투입된 병사들(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약 15만의 병사들이 미군정찰기를 피한 행군). 어렵기는 미해병 1사단 병사들과 똑 같은 상황. 최악의 정치적 선택이 아닌, 거듭해서 차선의 정치적 선택을 고려해 보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군복입은 보통 시민들을 대량살육 현장으로 내몰고 용맹·용감하다느니 해병은 전진은 있지만 철수는 없다느니와 같은 군사주의적·영웅주의적 구호는 몇 줄을 읽기도 전에 질린다는 점도 함께 적어본다.

 

이외에도 일일이 사실을 적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허구와 왜곡으로 곧, 거의 일방적이고도 신앙 수준의 타자 즉, 적으로서의 공산주의국가들의 악마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내용이 많아 정말 징글징글하다. 이렇게 해서 당시 한국전쟁의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는 히긴스식 의식과 사고는 이후에도 내내 군사주의와 전쟁국가로 지속연결되고 소련과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도 또 다른 명분을 만들어 확대일로라는 것,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지경을 이미 오래 전(아마도 한국에서의 전쟁 War in Korea’이 넘어서서는 안 될 그 한계선이었지도 모른다)에 넘어섰음을 의미하는 것! , NSC-68 자체가 - 1930년대 대공황 즉,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과정을 일시에 극복하게 한 2차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 군비증강을 통한 경제활성화(, 자본의 축적)를 목표로 한 것이듯이, 펜타곤 체제라는 군산복합체를 중심으로하는 영구군비경제 형태라는 것! 미국의 역사 자체가 전쟁국가라는 사실(전쟁은 대기업 즉, 자본의 배를 채워 주는 수단이자 방법으로, 전쟁 자체가 끝없는 신용창조와 팽창에 기반을 두는 자본주의의 지탱 수단임이 2차대전으로 입증된 것)은 미국이라는 연방국가(의 경제)가 유지되는 뼈대와 골격으로서 포기하기도 피하기도 어려운 외통수로 보인다. 그 아래에 예속형태의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된 히긴스가 말하는 자유세계는 끝없는 무시무시한 신용팽창과 군비증강으로 아마도 그 결말이 자크 아탈리와 촘스키 등이 우려하는 인류의 절멸이 아닐까? 자본주의(, 제국주의) 동력은 일단 시동이 걸리면 - 그것이 자본과 국가가 연합체 혹은 일심동체인 한은 - 멈추게 할 수단과 방법이 없다고 선각자들이 이미 오랫동안 지적해 왔듯이, 그 동력의 모습은 히긴스식 의식과 사고 그리고 역자의 한 술 더 뜬 그것들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미래의 물결’, 자크 아탈리, 2006;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 자크 아탈리, 2011; ‘사상의 향연’. 노엄 촘스키, 2003; ‘국가 대 시장’, 하먼 M. 슈워츠, 2015, 원작은 2010)

http://booklog.kyobobook.co.kr/sonfathrer/2073784

 

(교보 개인블로그에 2020-07-04 작성 올린 글입니다.)

http://booklog.kyobobook.co.kr/sonfathrer/206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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