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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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34개월 동안 (중략) 해병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했다. (중략) 그 기간의 대부분을 빅 비즈니스(대기업)와 월스트리트와 은행들을 위해 일하는 고위 폭력배로 보냈다. 요컨데 나는 자본주의를 위해 일한 사기꾼이자 폭력배였다. (중략) 알 카포네가 3개구역(시카고)을 누비며 사기를 쳤다면 나는 3개 대륙을 누비며 사기를 쳤다.(스메들리 버틀러)

 

지상에서는 톱질전쟁 즉, 톱질학살, 공중에서는 무제한 초토화폭격의 대량학살이 바로 한국전쟁임을 알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80년대에 10년에 걸친 엄청난 우여곡절 속에 중요한 결과물들(‘1950년대의 인식해전사 인식’)이 나온 후 90년대 말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 부터다. 50년 당시와 4·19혁명 직후 민간인집단학살의 진실규명을 요구하다가 5·16 군사정권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아 오던 일부 유족회들, 그리고 경남지역 몇몇 선구적 기자들, 극소수 개인들과 지식인들을 포함한 시민단체들(대표적으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참고로 위원회보고서가 200511월에 나왔는데 나 또한 소장하고 있다)의 활동결과,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온 정부기구로서 활동이 2004년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2006년부터 2010년까지 위원회의 상반기 및 하반기 보고서들은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언제나 볼 수 있음)..

 

그 전까지 50 여년, 비공식적 기억들은 억압받고 탄압 당한 채 공식기억(공식해석 즉, 예속된 앎, 압제하는 앎 - ‘전쟁과 사회’, 김동춘) 만이 존재할 뿐. 그 외에는 빨갱이’! 지금은 종북이란 말까지 얹혀서 ... 얼마전 우연히 어느 분의 인터넷 강좌에서 최근 선거결과를 현 정부와 연결지어 비판하면서 빨갱이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인터넷 댓글들에는 말할 것도 없고 ... 초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정 및 검인정교과서라는 것(공식기억 및 공식해석)을 통해 배운 지식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그리고 이후 제반 미디어를 통한 반복적 각인화로 완벽하게 우민화 즉, 실질문맹은 물론 공범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대다수인 사회. 수정할 기회도 의지도 없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서 자기이익만을 도모하는 사회(특히 그동안 사회모순들을 적극 등에 업고 축재하고 계급유지를 해 온,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 저자의 지적대로 21세기 대한민국정부는 물론 사회구성원의 대다수가 여전히 그렇다. 한국전쟁은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행동으로는 물론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반복강박으로 대물림하면서 굳건히 현재진행형이다. 총칼만 없지 개별적 및 집단적 학살도 만연한다. 피난사회의 모습으로... 아니 적극 조장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누가?’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나는 수시로 크게도 작게도 이걸 체험하고 있다. 진실을 밝히는 작업(그리고 이를 계속 알아나가는 공부)은 멈추어서는 안되는 계속되어야 할 한국전쟁을 종결짓는 첫걸음이다.

 

진실화해위 보고서들에서 이명박정권이 들어선 후인 20072월까지 미군관련 학살피해사건의 45.3%가 규명불능처리되었다는 저자의 지적처럼 - 명백히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리지웨이나 벤플리트, 클라크 또한 마찬가지 - 미공군이 적으로 간주하여 무차별 폭격학살한 흰 옷 입은 사람들피난민 피해사례들 또한 제한된 조건에서 일부만이 밝혔을 뿐, 거의가 미군정이 키우고 미군에 의해 도구화된 군경 및 우익청년단(친일·친미·월남·기독교·반공)에 의한 후퇴시기 사전학살(보도연맹, 형무소재소자 등) 및 수복시기 사후학살(부역혐의자 등)을 다루고 있다. 그것도 남한지역에 국한해서 홍보지원 없는 1년의 피해자 신고기간을 통해서 일부만을 ... 특이한 것은 미군에 의한 집단학살은 널려 있어도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한 점령기간 남한 민간인 학살이 단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민군에 의한 학살처럼 조작하고 과장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위가 통하지 않은 이유라고나 할까?

 

이 책은 - 진실화해위에서 다루지 못했던 - 미공군에 의한 공중에서 3년 내내 저지른 시공을 초월한 무제한 대량학살을 남북을 가로질러 집중적으로 분석한 10년간의 결과물이다. 낙동강으로 밀렸을 때는 폭격선을 설정해서 - 북폭은 일상적이고 - 폭격선 바깥의 남한지역 까지도, 북진했다가 밀려 내려올 때는 폭격선 개념이 사라진 전선의 북쪽은 상시 초토화폭격 남쪽은 사전파괴 개념의 폭격으로 한반도 전체에 걸친 초토화폭격 대량학살! 이미 한국전쟁 시기 북한주민들에 대한 미공군의 무제한 무차별적 폭격에 의한 대규모 파괴와 대량학살은 알려져 있었지만, 발발시점에서 정전협정 그날 밤까지 이루어진, 정책결정자들로부터 조종사에 이르는 전쟁기계들과 현지주민(피난민·재해민)의 피해상황에 이르기까지 문서(자료)와 사진들을 꼼꼼히 교차검증을 하면서 진실을 체계적으로 밝혀낸 연구는 없었다. 저자의 지적처럼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는 전쟁발발 2개월의 시기를 인민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기술하는 기존 연구결과들은 물론 공식기억들은 불가피하게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는 피해자라는 인식까지 각인·주입시켜 왔지만(발발 즉시, 이승만과 고위관료들을 선두로 해서 전선의 사단들은 별 저항없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아래 쪽으로 내려온 것과 호남지역은 아예 방치하다시피한 이유에 대한 근거있는 논란들이 있지만),

 

실제 그 두 달 동안(7-8) 북한의 대다수 주요 도시들은 한번에 수십대의 B-29 중폭격기를 동원해 고공폭격(일명 레이더폭격으로 부정확 무차별 성격의 맹목폭격)을 거의 매일 퍼붓다시피 해서 산업 및 민간시설 파괴는 물론 광범위한 인근 인구밀집지역에 대량학살을 저지른 것은 구체적으로 이야기된 적이 거의 없다. 그나마 이때까지는 파괴폭탄(일명 GP폭탄, 폭탄의 위력은 폭발 후 지면에 남긴 구멍의 지름이 9-10 미터, 깊이는 2.1-3.6 미터, 부피는 약 461 제곱미터로 물 46만 리터 양)을 사용했으나, 11월 부터는 - 1945년에 항복선언 시기까지 약 5개월 전후의 기간 동안 매일 폭탄을 쏟아부은 토쿄폭격(‘잊힌 대학살’, 50만 명 사망)에 사용된 M-69와는 다르게 - 마그네슘분말의 산화특성(나는 이것이 타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어서 그 잔혹성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을 이용한 M-79 소이탄과 네이팜탄으로 폭발후 화재가 지속적으로 번지는 진화가 안되는 폭탄과 진화작업을 방해하는 기총소사는 물론이고 시한폭탄(일명 지연폭탄)을 사용해 이전에 폭격했던 도시들은 물론, 중소 도시와 인근 마을들까지 소각시키는 초토화작전을 정전 시까지 사용했다는 것 등등. 19517월은 북한에서 40년만의 비라고 해서 북부지역에 대규모 수재가 발생했던 시기로, 이를 이용해 19526월까지 차단작전 명분의 교살전(질식전)과 이어진 무분별·무차별적 집중폭격작전, 19527월 이후로 정전협정 체결 당일까지는 항공압력전략이라고 해서 포로송환원칙의 문제에서 제네바협정을 무시한 채 심리전·이념전의 승리라도 챙기려는 미국측의 안에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무작위적 건물파괴와 대규모 인명살상을 목적으로 한 완전파괴작전으로 압력을 넣는 것으로서, 그 시작이 북한지역 수력발전소댐들(에너지, 동력, 수해)의 전면 파괴와 F-51(무스탕)F-80 전폭기와 B-26경폭격기를 동원한 나머지 지역의 지속적인 민간시설파괴, 535월부터 시작된 식량생산의 기반인 농경지파괴(전년에 보리고개를 간신히 넘기고 막 모내기를 끝낸 상태)와 인근 철도와 도로를 목표로 한 대량의 물을 저장하고 있는 저수지폭격 파괴작전 등등 ...

 

내가 북폭의 잔혹성을 알게 된 것은 2000년 대 말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총서, 2008, 원작은 1986년 출간)’을 읽고서, 커밍스의 저작들을 추적하다가 브루스 커밍스의 북한, 김정일 코드(2005, 원작은 2004)를 접하고 나서다. 이 책에 북한 폭격의 실상이 당시에 알 수 없었던 내용들(저자의 책에서 상세하게 설명된 내용들의 골격이 모두 언급됨)이 구체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어 엄청 가슴이 쓰라림을 느낀 적이 있다(사실 울었다). 전쟁 발발 60년 후에나 이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 이미 506월부터 10월 말까지 사용된 네이팜탄이 약 328만 리터이고 첫 번째 목표물을 찾을 수 없을 때는 두 번째 목표물에 엄청난 양의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고, 2003년에 이라크에 사용한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진 TNT 1만 팔천톤급의 모압폭탄이 당시 강계폭격에 12천톤급 타존폭탄으로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 514월에 트루먼이 2만에서 4만톤급 마크 4라는 원자폭탄을 사용하라는 명령서에 이미 서명했다는 점(실제 당시의 워싱턴 내부의 혼란 상황에서 사용하지는 못했다고), 519월과 10월에는 핵탄두만 제거한 원자폭탄과 대단히 육중한 TNT 폭탄들을 평양상공에서 시험투하를 했다는 것(일명 허드슨만 작전), 댐발전소와 저수지폭격에는 선교사들과 일본기술자들의 협력이 있었다는 것 등은 이 책에서는 생략된 사항들이다. 커밍스 책에 소개된 영국의 저널리스트 레지널드 톰슨의 한국을 통곡함(Cry Korea)를 구입하려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지만 절판된 지 오래되어서 구입 못하고 있다. 사실 저자의 이 책 폭격은 커밍스를 통해 그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혹시나 잠시 잊고있는 동안 절판될까봐 출간되자마자 구입했지만 최근에 와서 읽었다.

 

몇가지 의문사항들이 있어 알고 싶으나 사실과 다르게 보이거나 의문점들 중 두가지만을 나타내 본다.

 

(1) 4512월에 조선의용군 5지대에 입대해서 466월에 입북하여 50년 전쟁발발 당시 2사단 2연대 작전참모였고, 19517월에는 연길에 있는 인민군 항공(공군)학교로 가서 공군참모학교를 만들고 총장을 했던 장한철(1930년 출생)의 구술증언에 의하면 19517월 당시 인민군 공군사령부도 아직 제자리에 서지 않을 때라고 한다. 전쟁 후에도 글라이더와 뽀드바(소련제 비행선) 밖에 없다가 50년 말부터 그 항공학교에서 야그 18과 미그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인민지원군(중공군) 또한 50년대 말부터 부분적으로 동원되었다고 증언한다(‘중국 조선족 증언으로 본 한국전쟁’, 정현수 외, 2006).

 

(2) 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회고에 의하면 지원군 공군사령부와 조중(중조) 공군연합사령부가 창설된 것은 513, 국민당 장개석 군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49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마지막 남은 하이난 섬 즉, 해남도전투는 505월에 마무리, 잔여세력과는 여전히 전투중) 바로 11월에 인민해방군 공군사령부가 창설되고 50년 말부터 514월까지 9개 항공병사단을 만들고 미그 19기를 보유하게 되어 소련공군기술자들과 중국교관들이 비행훈련을 기르치고 교관이 함께 타는 식으로 훈련하여 50-60시간 정도만의 조종기술을 익혀 곧바로 참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51121일 처음으로 미공군과 공중전을 개시했고, 128일에는 최초로 미공군전투기 격추도 언급한다. 519월부터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정식 참전 단계로 들어 갔다고 한다. 9월과 11월의 공중전에서 미전투기들의 격추사실들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이러한 참전으로 B29폭격기가 야간공습에 나서야 했음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 2008, 원작은 1991)/

 

3) 저자는 이 책에서 5110월부터 북한영공에 미그기들이 활발하게 활동해(10월 중 미그15기와 교전만 2166, 10월 마지막 주에만 B-29 다섯 대 상실, 8대 손상을 입었다고 함) 미공군의 제공권이 위협받아 비관적 전망까지 나왔다고 말한다(물론 그 전에 무선유도장치인 쇼란이 개발되었고, 미그기들이 미공군에 피해를 주기 시작하면서 M-79 소이탄과 네이팜탄을 사용한 B-29의 쇼란야간고공폭격만 수행하였다고 한다).

 

(4) 1950629일 오전 6시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있었고, 이곳에서 우연히 북한 야크기와 무스탕기가 공중전을 벌이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때 맥아더가 제공권장악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것.

 

(5) 또한, 저자는 이 책과 다른 책에서는 북한공군이 한국전쟁 초기 총 226대의 항공기를 보유했고 미공군은 전쟁 발발 후 수일동안 북한 비행장 곳곳에 은닉된 북한공군 항공기들을 파괴하는데 주력하여 이를 통해 한반도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소련국 총참모부 작성 자료라고 하는 국사편찬위 자료를 인용해 전달한다.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한국역사연구회 편, 2010). 육사에서 낸 한국전쟁사부도(수정판, 2013)’에도 전력비교에서 북한공군은 야크 9 210대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 외 책에도 200여대 정도.

 

이 다섯 부분을 차근 차근 비교해 볼 때, (4) 맥아더가 1950629일 오전 6시 수원비행장에서 야크기와 무스탕이 공중전을 벌이는 것을 보고 제공권장악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는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증언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 현장에서 맥아더에게 북한공격을 청해 승인받고 바로 그날 29일 오후 평양비행장을 폭격했다고 함). (1), (2), (3)은 각각 조··미의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증언들인데 비해, (4)(5)(1), (2), (3)의 증언과 비교해 볼 때 시기와 상황 자체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5)의 전쟁 발발 초기에는 226(또는 통상 공식 전력비교들로는 20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기는커녕 인민군(지원군 조차)은 야크기 한 대 조차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를 리가 없는 대통령의 사전허가 없는 공격을 의식한, 전쟁을 통해 공적을 쌓으려는 욕망에 찬 스트레이트마이어의 공격명분용 덧붙이기식 사후 거짓진술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다. 또한, 전쟁발발 초기 밀릴 수 밖에 없는 당위성과 불가피했던 피해(‘부수적 피해라는 언어조작을 통한 정당화와 같은 부류로서)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듯하게 보이는 발발 당시의 전력비교에서 아군의 열세를 강조하는 야크 200여대라는 공식기록, 그리고 실적(공로)과시와 발발 초기 군인으로서의 개인적 공명심과 어우러진 무차별 폭격과 폭격의 명분을 더욱 굳건히 하려는 듯이 보이는, ‘미공군이 전쟁 발발 후 수일동안 북한 비행장 곳곳에 은닉된 200여 대의 북한공군 항공기들을 파괴를 통해 제공권을 장악했다는 공식기록들은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과 유사하게 - 실적(공적)은 조작해서라도 만들고 책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회피하는 정치가와 관료들 및 지배층의 기록과 같은 부류일 가능성이 높다. 공식기억과 공식해석이라는 것의 본질과 같은 성격의 것! 진실화해위에서 가해자의 기록을 찾아 진실을 교차검증하고 더욱 세부적으로 파악하려고 그렇게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여전히 모두 파기했거나, 파기하고 배타적 비협조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도 천안함과 세월호 등 많은 의혹사건들이 온갖 방해로 인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 이유이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민주화항쟁 조차도(북한군개입 조작과 헬기기총소사 은폐 등등) ... , 북한공군이 전쟁 초기 2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력비교 공식자료란 전쟁책임을 모두 상대에게로 바라보게 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들의 동원 아니겠는가라는 의구심이 든다(남침이냐 북침이냐의 이분법적 논쟁을 설정하고 공식해석을 강요하는 것도 단적인 예). 전쟁 발발 당시 조차 수많은 의혹들(일례로 발발 직후 초대육사교장 이형근의 10대 불가사의의 제기)과 이해 불가능한 현상들에 대한 논란이 많았던 것도 이것(‘공식의 문제점들)을 암시해 준다. 지금까지도 논란 중이다. 미군정기 자료를 미국립문서청에서 지속 발굴하여 분석하는 당사자들에게 당시 미군정 요원이었던 사람은 그걸 믿느냐? 나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낳을 것이라고 한 말에서도 느껴지 듯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서라고 모두 사실(증거)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가해자의 기록은 있다고 하더라도 갖은 책임회피와 정당화 등 곳곳에 삽입된 거짓말의 기록일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따라서 문서는 반드시 피해자들의 구술증언으로 보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은 약 50년간 압제된 앎(빨갱이 몰이)’ 속에서 2000년대 이후에 와서야 구술증언 당사자 되는 분들은 삶을 마감하는 시기에 일부 구술증언을 통한 기록들이라도 남겨서 그거라도 건졌지만 많이 아쉽다.(저자 또한 여러 인터뷰를 통해 사실 파악과 검증을 했듯이) .. (‘전쟁과 사회’, 김동춘, 2008;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김동춘, 2013; ’전장의 기억 냉전의 구술, 김귀옥, 2008; ‘전쟁과 사람들‘, 표인주 외 7, 2003).

 

다른 하나는 기능주의적 전쟁기계(정치적 요소들의 교육이 배제된 비행술과 폭격술 뿐인 조종술제일주의)로 양성된 미공군조종사들의 전투동기가 개인적 출세와 성공 같은 원인들에 기반하고 있으며 2차대전기의 상당수 조종사들의 나치에 맞서는 숭고한 정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문헌을 인용하며 나타낸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선발과정에서 검증과정에서 학위나 전통 학문과 인문학적 사회학적 측면(지식)을 지적하면서 한국전쟁 시기 미공군은 가장 교육을 적게 받은 장교집단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마치 그것이 전쟁기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와 갸우뚱 하게 한다. 저자가 대학학위나 학문과 인문학적 사회학적 지식 등이 자본주의적 계급분리와 그 지배계급의 옹호·유지성격의 이데올로기적 프로파간다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 1차대전 이후 미국의 대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중요한 요소로서 국가에 부속되게끔 재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자본)의 확대재생산 기지로서 대학의 산업화, 군학(군산학)복합체로서 설립되는 등, 이후로 60년대 이후까지 이런 양상이 강화되고, 그 이후로는 이러한 과정은 심화·고착되어 자본축적과 이에 따른 국방의 필요성에 대학이 완전히 종속되어 함께 움직이는 형태로 진화했다는 것. 과연 이러한 곳에서 학문이란 무엇이고, 학위는 뭘 의미하며, 무엇을 위한 인문학적 사회학적 지식이 생산될 수 있을까? 당시 비판적 견해(혹은 저항)를 보인 많은 이들이 추방되거나 해직되었다는 것과 자본과 국가의 지원을 맞교환하는 식으로 이론의 틀을 가장한 거짓된 지식판매(그리고 다양한 각종 무기개발과 기업의 대리인 역할, 3세계를 겨냥한 지역학, 개발학, 심리전 등)를 통해 그들의 이익과 이데롤로기에 복무하는 바탕이 되고 있는 대학(, 제국의 인력양성소)의 학위와 그 보다 등급이 낮게 분류하여 교육을 적게 받은 것이 과연 기능주의적 전쟁기계와 관련(차이)이 있을까? 경험 측으로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 ... 저자 또한 자본주의 계급혜택의 세례를 받아 온 입장에서 체제유지방법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의 요소 중 하나인 학벌주의(, 계급구별, 계급분리, 쉽게 말해서 차별’, 또 다른 말로 현대판 봉건신분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듯하게도 보여서 ... 전투동기가 개인적 출세와 성공 같은 원인들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학위나 학벌이나 교육을 덜 받아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 내고 운영해 나가는 제체의 본질에 가까운 것! 맥아더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방어적 행위로 즉, 지위와 명성을 보존하기 위해 3차대전도 불사한 인물.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최고지휘부로부터 일선의 조종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전쟁(실적)을 이용한 자들이라는 점은 체제 자체의 본질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서 잔혹할 수 밖에 없는 것! 보다 근본적으로는 전쟁은 가장 오래된, 가장 쉽게 큰 이득을 남길 수 있는 사기, 대기업들(자본)을 배불리우는 수단! 19세기 말에 나타난 강도귀족들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출세와 성공(, 돈벌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성은 이곳에서도 일백년 이상 익히 보아왔던 체제의 본질!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 클라이드 바로우, 2011, 원작은 1990; ‘대학과 제국’, 브루스 커밍스 외, 2004, 원작 1998; ’전쟁은 사기다‘, 스메들리 버틀러, 1935).

 

인민군과 지원군 출신 조선족(지금은 재중동포가 맞는 말이지만, 해방된 지 5년이라는 시점에서 당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정체가 항일과 조선인이고 자신이 속한 나라는 조선으로 생각했다고 함. 그래서 조선의용군은 모두 자기의지로 입대한 지원병. 이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제3자의 분석은 와다 하루끼의 한국전쟁’, 1995)의 모든 증언들에 의하면 중국군대(일제 당시 팔로군과 국공내전 이후 인민해방군), 조선의용군, 조선인민군, 인민지원군(중공군)에는 ‘3대규율 8항주의라는 규율(관병일치, 군민단결의 개념)이 있고, 규율의 지킴 여부를 검사하는 부대규율검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규율은 장개석의 쿠테타와 함께 공산당원들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데 대한 마오(모택동)의 봉기가 군사적으로 패배하면서 징강산으로 들어가 1927년 마오가 장시소비에트를 건설 때부터 시작해서, 장개석군대의 초토화식 대규모공격에 대패(독일 군사고문의 전면전 고집이 원인)하고 1934년 가을 대장정(최초 약탈없는 군대, 점령지역 토지개혁과 문화사업 등 물고기는 물 없이 살 수 없다는 논리와 경험 위에서 구축된 규율)을 거치면서 확립된 후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군대의 사상이자 규율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국제주의와 함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중국에서는 해방전쟁’)에서 농민(인민)군대의 기반이자 승리의 기반인 듯! 내용은 백성들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지주집에 무단으로 들어 갔다가 총살된 경우가 있다고 함). 돼지, 닭 등, 백성의 물건은 뺏거나 약탈하지 못한다(인민의 것은 바늘 하나도 훔치지 말라). 식량 등이 필요할 경우 빌리거나 다른 물건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한다(‘역사 앞에서의 김성칠 일기에서도 여러 번 나오고, 홍학지 회고록에서도 여러 차례 나옴. 심지어는 지원군의 경우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조선백성에 팔아서 그 돈으로 식량구입. 지원군 1차전역에서는 4병단 38군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강계를 거쳐 희천으로 진입하는 작전이 피난민 늪에 갇히는 바람에 행군이 늦어져 제시각을 놓쳐 국군이 퇴로를 벗어난 후 도착해 화가 난 팽덕회 사령관에게 엄청 혼났다는 증언). 여자를 겁탈한 경우 총살. 포로를 학대하지 못한다. 병사를 함부로 때리거나 인격을 무시하지 못한다. 상하관계가 아닌 형제와 동지관계와 평등관계이다(군대 내부에서는 정치위원과 군사지휘자는 있어도 계급은 없다). 엄하다는 것은 호령이 아닌 자각성에 의한 엄함을 의미한다는 점. 모주석은 조선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다치게 하지말라는 명령을 내린 반면, ‘조선인민군, 노동당, 민주당파, 김일성 동지에게 우애와 존중의 뜻을 나타내야 하고 군사규율과 정치규율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명령도 내렸다는 점. 조선의용군(조선족) 출신 병사나 인민군이나 지원군 병사들이 대학을 나오거나 학위가 있거나 교육을 많이 잘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체제의 본질과 차이점. 체제를 운영해 나가는 방법과 본질의 차이다.

 

(교보 개인블로그에 2020-05-17 작성 올린 글입니다.)

http://booklog.kyobobook.co.kr/sonfathrer/2040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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