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지음, 이종인 옮김 / 북길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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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가 책머리에 자본주의는 생존할 수 있는가?’ 제목의 내용에 이 책의 중요내용(슘페터의 주장)을 압축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선명하게 빠짐없이 논하고 있으므로, 본문의 내용요약은 - 마르크스 학설과 자본주의에 국한해서 조차 비판적 접근을 할 수 밖에 없고 그것만도 엄청난 양이 될 수밖에 없어서 - 모두 생략하고 소감과 꼭 짚어야 할 부분을 비판적으로 제시하고 싶다. 체제유지의 본질상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문가, 대가, 석학 등으로 치장·포장·선전하는 경우(대개는 체제찬양적 영웅만들기에 의한 대중의 우민화와 유사한 측면)를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수용·의존하지 말고 회의적·비판적 시각으로 볼 필요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슘페터의 글과 주장들에 계속 몰두하다 보면 그 태도와 성향의 반복(슘페터의 말로 자주 반복되는 단순한 강조‘)에 의해 동화되기도 쉬운 프로파간다적 성격(모든 저작들이 그런 특성이 있지만 이 성격은 사실과 허구라는 구분을 경계로 허구에 기초한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틈틈이 내용의 커다란 줄기와 지나온 과정들의 사실들 그리고 역사 속에 기억을 되짚어 보며 다른 실례들과 함께 살펴야 한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옮긴이에 의하면 슘페터는 오랜 직물제조업을 한 가정에서 자라서 상류계층은 아니지만 부르주아적 문화를 경험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귀족신분인 의붓아버지의 인맥 덕분에 귀족, 고위장교, 고위관료 양성학교(테레지아눔)에 입학해서 귀족적 매너, 습관, 취미를 체득하고, 평생 정신적으로 빈의 상류계층문화를 몸에 지니고 살았으며, 부르주아 생활가치를 수용하며 적극 대변하였다고 한다. 빈 대학의 봄-바베르크(한계생산성 소득분배이론에서 자본을 수량화하는 척도를 정식화 노력.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의 착취라는 자본개념을 결정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자본을 자본가의 절욕개념 - 시니어의 기다림개념의 반복 - 으로 주장, ‘절욕 혹은 기다림의 대가라는 것)에게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활동도 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법학도 공부. (-바베르크에 대해서는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E. K. 헌트와 마크 라우첸 하이저, 2011)

 

이 책의 내용과 시대배경 설명을 옮긴이가 책의 앞머리와 말미에 별도로 압축요약해서 보여 줌으로서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나, 개인시각이지만 슘페터의 출신배경과 관련된 지배층의 세계관 혹은 사고유형으로 보이는 무리한 주장들(명제라고 하고 입증했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주장으로 보이고 따라서 일종의 편견 내지는 왜곡으로도 보임)과 추측성 발언들과 이면의 사실과 기저에 깔린 근원을 파악하기 보다는 틀(프레임)을 설정해 놓고 이에 가깝도록 서술하려는 문장형식들, ‘우리를 대비해서 적 혹은 그들에 대한 비하와 폄하, 훈계, 무시, 거부, 오만함과 엘리트 분리주의적 사고 및 의식의 봉건성까지 느껴지는 부분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비상식적(슘페터의 말로 넌센스’) 주장에 대해서는 남들도 그렇게 볼 거라는 또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미리 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변명이라고나 할까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쓰다 보니 말이 길게 늘어지고 간결성·명확성을 습관적으로 배제하는 듯한 문체들로 - 더하여 옮긴이의 번역에서도 원문에 충실하려고 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통의 번역서에 나오는 문제점들로... 그러나 바로 원문충실 그런 점을 독자에게 맡겨 판단하도록 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기에 그냥 비판만 하기에도 적절치 않아 - 인하여 독해하는데 스트레스가 쭉쭉 올라가 내려오질 못하게 힘들게 하며 인내 또한 엄청나게 필요하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이데올로기 필요성에 의해 내세우는 결론을 난해한 수학식들로 엄청나게 덧칠해 일반인은 거의 알 수 없게끔 하는 것과 유사한 생각이 들 정도로 ... 혹시 이와 똑같은 이유로 쉽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닐런지??? ‘지식인들은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물든 사람들,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글을 쓰는... 난해한 문장으로 이론적인 냄새를 풍기는 .. 그것은 허세일 뿐입니다라는 촘스키의 말이 갤브레이스의 허영심(옮긴이의 말미의 글 중에서)이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우연일까? 슘페터도 지식인론을 펼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아 탄생한 지식인이 자본주의의 불안을 부추킨다는 식의 논리 그게 전부. 기득권적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그의 직업 및 아비투스(특정 환경에서 성장해 온 결과로 각인된 구조적 성향, 예로 대중을 보는 시각이 해밀턴의 야수’, 리프먼의 짐승떼와 다르지 않을 것임)로는 그런 논리(, ‘우리’)를 넘어서 대중과 함께라는 생각은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1999).

 

슘페터를 이르기를 저명한 경제학자라는 말이 따라 다니는 데, 지배층(지배적인 경제이익집단)의 입장에서의 치장·포장·선전인 듯 보이고 - 혹은 슘페터가 애용한 실체가 모호한 용어인 부르주아의 정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 보편적인 상식의 입장이 아닌 듯 (슘페터의 말로 넌센스’) 하게 보이는 수많은 내용들에 의아해 했고, 옮긴이가 책의 앞머리와 말미에 설명한 내용으로 그 이유(, 자본주의의 신비화 혹은 신성화)를 그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옮긴이에 의하면 슘페터의 이 저작은 1980년대 구소련과 동유럽이 체제 전환을 하면서 대립구도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환희를 외쳤던 시기에 자본주의의 장기적 발전을 이론으로 내세운 것으로부터 새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그 이전엔 관심 밖의 상태) 2011년 기준해서 최근에는 그를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문명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자(이른바 자유방임 주장자들)로 보고 그의 이론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결국은 그도 미국 주류 사회학자들에 의해 냉전시대 이데올로기로서 이용할 가치있는 학자로 포장되어 숭배된 막스 베버처럼, 1980년대 구소련의 붕괴로 인한 자본주의에 대한 우월성과 2000년대 나타난 대규모 경제위기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필요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대중에게 숭배(홍보 즉, 프로파간다를 통한 청조적 혁신기업가의 연결고리와 자본주의 장기발전성)에 가깝게 다가온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는 것(‘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 키어런 앨런, 2004).

 

슘페터는 이런 말을 한다. ‘경제학자들은 ... (중략) ... 그 판단은 대체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 이익, 동정, 또는 반감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경제학이 물리학과 같이 사실을 기술하는 과학이라고? 이 두 주장이 서로 어울리는 말일까? 자신이 자신에게도 전적으로 해당되는 말(전자)을 정당화하는 방법(후자)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니면 자신의 이 책이 과학적 깊이와 정밀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혐오했다고 하는 말을 술회했다는 것을 보아서는 보기에 따라서는 자신만은 전자와 같은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혹은 전자와 같은 부류라고 말하는 듯 하게 들려 ... 옮긴이의 말미 설명에서 언급한, 진정으로 대중에게 저명하면서도 진실과 지혜를 전달하는 갤브레이스의 말이 전적으로 와 닿는다. ‘대중을 위한 책을 쓰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선택된 독자(슘페터가 늘 달고 다니는 우리‘)를 위한 책을 쓰기를 원했다... 이 말의 함의는 누군가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파악된다는 것!

 

책을 읽다 보면 경제학자로서의 슘페터의 우상이 대중에게 너무나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을 정도이고, 이 책의 장점으로는 - 슘페터를 인용하거나 요약해 놓은 책들에서는 절대로 그 실체를 볼 수 없는 - 바로 직접 읽으므로서 과장된 면들이 무언인가를 철저히 느끼게 되었다는 것. 스트레스 저항력와 인내를 가져야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아울러 ... 배버나 슘페터나 모두 당시 오스트리아 학파(1950년대 미국의 시카고 학파로 알려진 신고전파 후생경제학의 미제스와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으로 이어짐. 아마도 미국에서 당시 제3세계 지배와 관련해 나온 지역학과 발전경제학처럼 전후 소련공산주의 대항 즉, 반공 이데올로기적 필요성 때문에 시카고 대학에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사람들이기도 하고 모두 마르크스 이론(노동자 관점 및 대변)에 대한 경쟁 내지는 비판·극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이기도 ……. 대학이란, 대학의 역할이란 원래부터 그런 것이었음. 교육체계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 유지와 강화(재생산)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중요한 핵심 수단은 학교(교육) 그리고 미디어(홍보와 선전). 출세주의를 포기하고 지배층에게 미움 살 일이지만 정직한 누군가가 슘페터의 오만과 편견이란 주제로 해서 슘페터의 말로 사실을 기술하는 과학을 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

 

신고전파 경제학 이론의 중심축은 - 시니어의 교리(자본주의 사회는 가난한 이의 궁극적인 이익과 재산소유한 부유한 이의 이익이 일치하며, 모든 계급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계급갈등이 없는 사회라는 주장)를 발라의 일반균형분석에서 시작하여 마셜의 부분균형분석을 거쳐 대규모 기업연합(콘체론)과 독점기업(카르텔)의 형성이 거의 완료된 1900년 초 시카고 대학의 클라크가 완성시킨 - 한계생산성 (소득)분배이론인데, 간단히 말해서 각각의 생산요소는 그 한계생산물의 가치와 동일한 소득을 얻는다. , 자본가와 노동자에게로의 보상은 일치한다. 수탈할 잉여가 없으므로 착취가능성은 있을 수 없다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현상유지 합리화 및 옹호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이데올로기용으로 엉터리 이론(지배층의 후원을 입으면서 50년 이상 지배적 이론으로 행세)이라는 것이 1960년에 스라파에 의해 케임브리지 논쟁을 통해 밝혀졌음에도(-바베르크의 자본개념의 붕괴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교육받고 세뇌되어 온 대중은 전혀 인식도 못하는 가운데 여전히 망가진 거짓 이론으로 역시 지배층의 지원과 혜택을 입으면서 50년 이상을 지배적 이론으로 행세하며 지금에 이르렀고, 이른바 정통혹은 주류로 행세·행동·교육하며 불리고 있다(‘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E. K. 헌트와 마크 라우첸 하이저, 2011; ‘권력자본론’, 심숀 버클리, 조나단 닛잔, 2004;

클라크 및 논쟁 관련 요약부분 http://booklog.kyobobook.co.kr/sonfathrer/1751065)

 

정통주류란 현대대중에게는 보편적 정당성(슘페터의 말로 사실을 기술하는 과학’)으로 와 닿지만 그건 허구이고 실제로는 지배계층(지배적인 경제이익집단)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 및 옹호를 대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 슘페터는 노동가치론에 대한 한계생산성 분배이론의 우월성을 주장했지만 1960년대 당시에 생존(1950년에 사망)했다면 이 허구이론을 사실을 기술하는 과학이란 명분으로 또 어떻게 주장했을까? 당시 신고전파 경제학 대부인 새뮤엘슨은 적어도 이를 거듭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후 신앙으로 계속 끌고 가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 슘페터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그리고 지배층과 경제학을 포함하여 전분야에 걸친 주류정통이라는 것)은 우선 자기자신들이 먼저 조지 오웰의 신어인 이중사고의 덫에 빠진 이들로서 이렇게 불분명한 정신상태(예로 추정 혹은 허구와 사실 사이를 헤메는 상태. 다른 이를 기만하려면 우선 자기자신부터 속여야 한다는 진리처럼 자기자신을 속이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서 대중에게 그 이중사고를 주입해 온 것은 아닐는지??? 슘페터는 제도주의 경제학자들을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자들로 폄훼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종교라고 단언하는데 사돈 남말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건 왜일까?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E. K. 헌트와 마크 라우첸 하이저, 2011; ‘1984’, 조지오웰, 1948)

 

(용어구별상 한 가지 추가)

부르주아(계층)의 개념이 모호한데, ‘혁신을 기업가에게 연결하기 위해 기업가라는 말을 선택하여 전용하는 관계로 서로 혼동하게 하기까지 한다. 혁신의 당사자인 기업가가 성공한 경우 부르주아계층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성공한 기업가와 그 가족을 계층흡수한다고 하며 - 바로 이 계층이 자본주의의 동력이라고 - 이 양자 사이에 산업가, 상인, 금융인, 은행가로 불리는 중간단계가 있다고 하면서, 다른 서술에서는 산업가와 상인을 기업가로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본가라는 용어가 (기업가와) 부르주아와 구별이 없어 갑자기 튀어 나와 혼용되면서 부르주아계층에 속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별도의 계층인 듯 보이게 하기도 ... 아무튼 부르주아 정신은 기업가 정신이고, 부르주아 생활방식은 기업가의 생활방식으로서 혁신으로 연결되게끔 되어있고, 부르주아의 자극은 혁신(그 기저에는 부르주아 가족이라 함)을 일으키게 하는 것. 또 슘페터가 주장하는 사회적 환경 등 몇 가지 원인으로 이 자극을 소멸시키므로서 자본주의는 아주 장기(여기서는 한 세기 조차 단기임. 단기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성공적 질주를 달성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 이런 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추측)에 걸쳐 쇠퇴하고 장래에 사회주의가 어렴풋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 1935년도에 집필된 내용으로는 - 그 전에 인류가 제국주의 전쟁의 공포 속에서 다 타버릴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한다. 슘페터는 마르크스의 제국주의 해석을 비판적 시각에서 '자본가의 이익(착취)이 없는 제국주의'를 말하기도 했는데, 그 파멸적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제국주의 전쟁의 근본원인은 무얼까라는 생각도 든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가 제국주의'라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류의 파국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는 제국주의'임을 인정하고 또, 그 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파멸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바로 슘페터의 이중사고를 보이는 것 아닌가?.

 

부르주아 용어는 원래 새 공동체를 형성하는 상인집단’, 도시에 준하는 공동체의 길드체제 내에서의 장인과 고용주와 장원을 연결하는 상인, 선대제에서는 상인-자본가가 길드체제의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 상인-자본가에 대한 대응으로 - 노동자의 지배하에 있던 - 생산수단을 수공업길드의 장인들이 통제·지배하여 대두한 생산자-자본가와 같이 산업시대 이전에서 상인-자본가 집단 및 생산자-자본가 집단을 칭하는 것이나, 슘페터는 상업사회는 신용창조의 관점에서 부르주아사회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선대제는 대토지귀족에게 차용했든, 그동안 축적된 상업자본으로든 당연히 선지불이 가능한 대자본이 있어야. 그러나 대토지귀족에게 차용하는 경우가 되면 그가 자본가이고 자본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슘페터의 자본주의 원칙상 제외되어야 하고 상인-자본가도 마찬가지. 그러면 선대제는 역사 속에 없었다는 얘기인지? 이후 산업혁명 시기까지 가격혁명과 상업혁명과 관련된 아프리카, 인도양, 아메리카 등의 약탈무역 등과 관련된 약탈자본은 모두 논외로(무시 혹은 거부) 해야 슘페터의 주장에 장애물이 없게 되는 것.

 

기업가(산업가와 동일한 것인지는 구별 안 됨)란 생산수단의 공업화(산업혁명)와 함께 개별산업의 초기단계에 - 자본가로 변신한 대토지 소유귀족을 제외하면 - 기업시작 재원은 은행에서 창조한 예금(다른 이들의 저축)으로부터 부르주아에 의해 조달되어 .기업가를 통해 혁신을 이루기 시작할 때의 개념으로 순수한이라는 용어를 삽입한 부르주아(사회) 개념은 이때부터인 것으로 나타낸다. 축적은 기업이윤으로부터 나오고 이때부터 자본가가 등장하는 것. 그러나 당시 은행이란 사적소유인데다가 슘페터가 말하는 개인들의 저축에 의한 예금은 어디서 나온 걸까? 노동자의 임금? 아니면 혹시 약탈자본을 포함한 상인자본, 생산자본, 토지자본 등도 포함되어 있었을까? 개인들의 저축의 신용만으로 그 거대한 산업자본주의를 일으키는 자원이 되었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들과는 거리가 먼 것은 아닐까? 더욱이 신용(은행)의 기초가 되는 환어음(당시 결제수단, 외국송금, 대출수단 등)의 사용은 상업사회에서 바로 상인들(상인-자본가들)에 의해 매우 활발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일례로 에스파냐를 상대로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에서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서 함대급 규모의 선박제조, 대포제작 등과 관련한 전쟁재원으로 신용으로서의 환어음의 대규모 활용). 대중 독자(일반인)가 보기에 -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솔직히 지나가는 생각에서 자신의 주장을 하는 곳들에서는 자기 식으로 그냥 지어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 ... 슘페터는 여론(과 대중)을 가볍게 보는 성향도 있음은 물론이고 ...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2013, ‘돈의 발명’, 게오르그 짐멜, 1889)

 

역사의 연속성 관점 하에서는 약탈자본을 포함한 상인-자본가집단이 생산-자본가 집단으로 다시 산업자본가집단으로(그리고 대토지소유집단이 변신한 대자본가로) 진화한 것이 부르주아계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슘페터는 마르크스적 자본과 자본가 개념(잉여의 착취를 통한 축적)을 피하고(부르주아와 기업가와는 달리 자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음. 당연히 은행으로부터 차입해서 기업개시했으므로 그 이전의 자본의 축적 같은 상황은 없는 것임) 혁신과 기업가 개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또는 무시나 부인? - 일례로 오스트리아 학파의 일관된 특성이 무시 혹은 거부) 은행의 신용창조(산업시대 시작점)를 기점으로 구분을 함으로서 그 기점에 기업가가 성공한 경우 들어가게 되는 부르주아계층은 어떻게 미리 형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모호성과 혼동이 온다는 점. 현대에 이르러 이 용어가 보통 대중적으로 쓰일 때(특히 학교에서)는 막연히 유산계급으로 쓰이고도 있지만 ..

 

(교보 개인블로그에 2020-01-12 작성 올린 글입니다.)

http://booklog.kyobobook.co.kr/sonfathrer/199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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