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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름대로는 책을 꼼꼼하게 고르는 편인데 이 책은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들어 구입하게 되었다. 내 나이가 10대나 20대였다면 절대 이 제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직 밥벌이가 지겨울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 밥벌이를 지겨워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의심을 갖게 되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피식 웃고 지나가버렸을 제목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내 나이와 함께 이 시대 남자라는 위치가 주는 중압감이 아닐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지만 여권은 나름대로 향상의 길을 걷고 있는데, 부권(父權)은 아버지의 힘없는 어깨와 내려간 눈꼬리에서 보여지듯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을 똑같이 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의 글을 접한 적이 없는지라 제목만큼 기대하지 않았는데, 저자의 날카로운 세상보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제까지 써왔던 글을 모은 것이라 일관성을 보이기보다는 조금 산만하긴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쉽게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그의 몇 가지 '특이한' 생각은 나도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것과 유사했다. 특히 "나의 동쪽은 당신의 서쪽"에서 애국심과 민족적 정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동해라는 바다 표기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집착’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데, 일본이 일본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우리가 동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동해가 동쪽에 있는 바다지만 일본에게는 서쪽에 있는 바다가 아닌가?
또한 "치욕"에서 반민족, 친일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의 신분과 역할로 일제시대를 살았다면 우리가 반민족으로 친일로 매도하고 있는 사람들 이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약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일제시대를 끝까지 항일 독립투쟁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지배계층은 대부분 한반도를 벗어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일제시대 한반도내에서 지도층의 삶이 얼마나 굴곡이 심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인간의 삶이 역사의 질곡 속에서 얼마나 변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친일과 반민족에 대한 비판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 시대를 살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은 얼마나 우리를 치욕의 역사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게 할지 모르겠다. 치욕의 역사 때문에 일본에 대한 일이라면 뭐든 반대하거나 이겨야한다고 생각하며 국수주의적 깃발을 치켜드는 우리에게 저자는 여러 면에서 열린 시각이 가져오는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