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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차 세계대전때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약속에 의해 가족과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은이 가족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첫번 째 강제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던 어느 유대인이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여기 왜 왔어? 대체 여기 뭐하러 왔냐고? 아무것도 모른단 말야? 우리가 잡혀온지 4년이 지났는데!"
그리고 병자와 스프와 빵을 주기 아깝다고 판단하게된 허약자는 굴뚝, 화장장안에 들어가 불살라진다.
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매일 타죽는다.
건강한 유대인은, 노동, 작업반같은데에 들어가 강제 노동을 한다.
<노동은 자유를 준다>
거기서 유대인은 약한 자들이다. 하느님에게 믿음을 구하며, 기도하며 불살라진다.
지은이, 엘리 위젤은 유대인의 종교에 깊게 심취한 소년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침묵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말 그대로 거기서 겪고 일어났던 일들은 지금으로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장면이 나와도 머릿 속으로는 상상이 될뿐, 정작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그랬다. 이건 끔직한 일이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던가 하는건 아니지만.
그랬다가 결국 서로를 의지하던 부자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지은이가 양심의 안에 있는 '이젠 자유로워졌다' 에서, 거기서 모든 것이 올라왔다.
성악설이 맞는 말일까. 인간은 원래부터 악하다는. 아니, 어쩌면.
지은이는 그런 걸, 아버지의 빵과 스프를 가로채야 되는데.. 라는 감정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낀 후에, '나는 평생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대사가 조금 달랐는데.
지은이는 처음 수용소에서 엄마, 누나들과 떨어졌다. 여자들과 떨어졌다.
그들이야기는 그 후부터 안나온다. 끝나갈때도 언급이 없는 걸 보면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후에 겪은 일중 몇 가지를 지은이가 조사해봤으니까, 거기에 대한 걸 책에도 써줬으니까.
여기서도 느꼈다.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무섭다.
지은이가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아버지때문이다. 그 둘은 마지막순간까지 서로를 놓지않았다.
지은이가 죄책감과 괴로움을 겪으면서까지 아버지를 챙기려고했다. 겉으로나, 때론 진심으로나.
침묵은 결과적으로 가해자를 도와줄뿐이라고, 연설문의 일부에서 발췌한다.
따로 옮긴 이가 인상깊어한 구절을 적어본다.
우리는 희생자 앞을 지나갔다. 두 사람은 이미 숨이 끊어졌다.
그들의 혀는 축 늘어진 데다 부풀어 오르고 푸르스레했다.
그러나 세 번째 밧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가벼운 그 아이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소년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우리는 가까이서 소년을 보아야만 했다.
내가 지나갈때도 소년은 살아 있었다. 혀는 아직도 붉었고,
눈도 여전히 감기지 않았다.
내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사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그날 저녁 수프는 시체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