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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이향규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분량은 길지 않은 책이었지만, 책 속에 나오는 이들과 6·25 전쟁 및 그 이후의 긴 시간을 함께 거쳐온 것만 같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며 종전선언, 평화에 대한 기대로 온 나라가 부풀어올랐던 작년 봄, 머나먼 영국에서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의미를 찾고 싶었던 저자는, 6·25 전쟁에 참전한 영국 참전용사들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자녀가 다니게 된 학교의 참전용사를 찾던 중 전사한 졸업생 마이클을 알게 되고, 이제는 90대가 된 마이클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에 대한 기억도 듣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참전용사에 대한 이미지와 실제 마이클의 모습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길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의 모습 그대로 기억해주는 것이 맞다는 깨달음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에서는 마이클이 나왔지만 내게는 전장에서 사체수습팀으로 일한 짐 그룬디 씨와, 저자의 아버지가 강렬하게 남았다.
짐 그룬디 씨는 전투가 아닌 시신수습이라는, 참담하고 힘든 일이기에 대부분 꺼려하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업무를 최선을 다해 묵묵히 수행하고, 지금도 전우들을 기억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자신의 역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브룬디 씨가 한 이 말은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전장에 나간 병사들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기쁜 것처럼, 우리에겐 시신을 수습하는게 빅토리였습니다. 그건 전쟁터에 시신을 버려둔 북한군에 대한 우리의 빅토리였고,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어머니를 위한 빅토리였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한 것에 대한 빅토리였습니다."
짐 그룬디씨가 부산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스무살 경, 북한에서 온 피난민이었던 저자의 아버지는 열다섯살 소년으로 부산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책 전반이 저자가 최근 돌아가신 아버지께 해드리지 못한 것들을 뒤늦게 깨닫고 참회해가는 기록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나 또한 개인적으로 부친상을 겪은 이후 느끼는 감정의 결들 하나하나가 너무나 공감이 되어서 책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저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포장하지 않고 정확한 묘사로 그려내고 참회한다. 참전용사들에게 감사하는 '잔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대학생들을 보며 느낀 자신의 삐딱한 마음도, 숨기거나 포장할 수 있을텐데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자신의 부족한 면모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용감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이 저자는 이 책에서 정말 용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기억과 참회에 대한 이야기도 깊다. "당신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습니다"라고 하는 참전용사들에게 가장 참혹했던 것은 전장에서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이 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는 것, 아니 애초에 기억되지도 않은 전쟁이라는 점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돌아왔지만 영국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는커녕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을 환영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국가가 파병한 전쟁이었지만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았고, 심지어 참전기념비조차도 최근에야 세워졌을 뿐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이었더라도, 아직까지 그 의미에 논쟁이 있는 전쟁일지라도 기억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억되지 않는 것은 사라지고 마니까. 그것이 역사든, 인물이든 말이다.
이런 '기억'에 대해서는 앞서 마이클 이야기에서 보았듯 있는 그대로를 기억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영미 등 호주에서는 1차 대전 종전일을 추모일로 삼아 각자 가슴에 양귀비꽃을 달고 전쟁에서 스러진 사람들을 기린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형태의 추모든 정치적인 것과 연관되고, 기억되어야 할 모습의 정답을 정해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죽어간 이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할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억과 참회의 과정의 절정은 저자가 자신의 아버지와 뒤늦게나마 마음으로 화해하고, 아버지의 일생을 있는 그대로 담은 팸플릿을 제작하는 모습이었다. 정치적 의견 차이를 시작으로 아버지 생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음을 후회하고,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으며 그의 인생을 학술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모습이, 내 마음을 돌아봄으로써 변화하는 '참회'의 실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기억과 참회'의 의미를 묻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