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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앙감정(참된 신앙 감정) 이란 참된 영성 혹은 진정한 신앙은 "영혼이 가진 의지와 성향이 역동적이고 생기 있게 움직이는 마음의 열렬한 활동" 곧 감정이라고 에드위즈는 정의한다.

신앙 감정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요, 그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실제가 없는 사람이다 - p69

위의 말을 요약해 본다면 이렇다. 기도와 찬양과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성도는 감정으로의 감화가 오며(되며),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표현으로 나타낸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말이다(신앙 체험). 1740-1742 1차 대각성운동으로 알려진 때 조지 휘필드의 설교와 에즈워드가 살고 있든(노샘프턴)의 사정과 사건(성도들의 신앙 체험) 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신앙 감정론이라는 이 책의 배경과 에즈위즈의 신앙고백의 글도 함께 있어 접근하기가 조금은 쉽게 여겨진다. 그런데 어렵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같은 명제를 사용하면서도 한 가지 답이 아닌 이중적인 명제의 답으로 서술하는 것이 특이하면서도 이해를 못 하는 부분도 있어

 어렵다고 느낀다. 몇 번이고 더 읽어 봐야 하는 부분인듯하다.(더 읽어 봐도 모르겠음 정말.... ) 감정의 표현을 성경에 근거로 제시하고 있어 마음은 그런 거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지만 사실 에드워즈의 설명은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 더러 있다. 어려운 것이 다른 것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두고 사건, 체험 종교적 현상과 같이 부정적인 표지들을 제시하면서도 이러 표지들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결론 내려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성령 역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또한 인간의 연약함이나 감정의 불안정에서 비롯되었거나 부흥사들의 조작의 산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또 성경은 이런 일들에 대한 판단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신학자 샘 스톰즈의 해설이 우리 신앙인의 바른 감정의 자세를 제시해 준다

우리 교회와 부흥

회에서 참된 회심의 증거로 자주 여겨지는 것들은, 외적인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데서 오는 자의적인 기쁨이거나 영혼에 있는 영적인 불안함을 잠재우려는 일종의 심리적 진정제일 뿐이라는 것. - p 217


사람의 감정은 어떠한 사물이나 어떠한 말에 귀 기울일 때 그 감정이 표현으로 행할 때가 많다 가령 행복하고 칭찬의 말을 들을 때, 아름다운 사진이나 그림을 보았을 때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든지, 노래와 함께 춤을 춘다든지 등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인간의 감정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의 내주하심 일 때에는 믿음에 대한 순종(감정의 표현)이 난타 나야 한다는 것,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신다. 더욱이 베드로 전서 1:8에 언급한 "기쁨"에서 나타나는 신앙인의 감정을 말하고 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경의 근거한 여러 가지 사람의 여러 가지 반응(표현, 행동) 감정들을 잘 정리하여 이 시대에 올바른 신앙의 감정이 무엇인가에 답하고 있으며 또 진정한 감정과 그 감정이 성령님의 내주함심,(성령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감정들을 대조적으로 잘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들에게 분별하게 해주는 참 좋은 길잡이의 책이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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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을 것인가 -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가 전하는 올바른 신앙의 길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한국교회에 우려와 염려가 가득 담긴 이야기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과 모든 종교인들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특히 기독교에 관련하여 잘못된 신앙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준 교훈과는 사뭇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도 이야기한다. 자신에 평생을 살면서 겪은 일들을 통하여 고치고 바라는 바를 잘 지적해 주어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될까 하는 염려 서러움까지 느껴진다. 교회 목회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학자도 아닌 평범한 학자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진심 어린 충고와 함께,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공동체적 화합하며 살아가는 교회의 역할 그리고 기독교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및 자질, 그리스도인이 실천하여야 할 사회참여, 봉사 등 ( 말하자면 이웃에게 대한 봉사 참여,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 다만 조금 아쉬운 건 지나칠 정도로 인문주의(humanism)에 대한 애찬을 담고 있어 기독교의 본년의 이념을 망각하게 하는 착각의 글로도 보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우선 전제되는 것이 이 글에는 빠져있어 아쉽게 생각한다.

신앙과 교회를 정치의 수단으로 여겨선 안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흔히 선거철 때면 정치인들이 종교계의 지도자들과 만남을 TV를 통해서 접하기고 한다. 정치인들이 종교계의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어떠한 의미로써는 좋게 보지 않는 시각도 더러 있다.

기독교의 상하관계란 있을 수 없다. 장로나 목사나 역할의 차이일 뿐 신분적 차이는 아닌 것이다.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다 평등하다.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하는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성도들의 인식도 높아져야 할 것이다. "맹신"은 "믿음"보다도 더 위험하다. 이 글의 저자는 폐쇄적인 교회주의를 걱정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교회당(예배당)에서 소비하는 것을 염려한다.

"교회생활의 행사가 지나쳐 사회 일을 소홀히 한다든지 인간적인 성장에 지장을 준다면 교회는 더 좋은 방법을 알려주며 그들이 유능한 하늘나라의 일꾼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인간적 성정과 사회적인 기여를 덜 해도 좋다는 사고는 삼가야 한다" - P 74. 그렇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하거나 기도 시간을 줄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목사가 목회에 관한 관심과 열정보다도 정치를 통해 사회나 국가에 이바지하려는 의지와 신념이 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의 임무를 떠나 정치활동을 하는 편이 본인과 교회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 P 87

이분의 따끔한 지적은 "정신적 지도자가 되고 종교적 가치를 전해주어야 할 목회의 지도자들이 명예욕에 너무 심하게 사로 잡히면 학위나 직책이 더 높은 인격과 학식을 만들어준다고 착각할 수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날의 교훈이 아쉬워진다." - p 99

교회는 재산을 소유하거나 재산 관리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곳이 되어선 안된다며 헌금을 갖고 교인들의 기복 신앙으로 이끌어 가서는 안되며, 올바를 경제적 가치관을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다. 나 역시 저자의 말에 크기 공감한다. 부자는 부자의 나름대로의 경재적 이익을 사회와 소외된 계층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의미가 남다르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일이다. 헌상이 모여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가난한 이웃들에게 쓰임은 당연한 것이다. 그 규모가 비록 나라에서 하는 복지정책에는 아주 보잘것없지만 말이다. 그러하기에 국가에 대한 세금도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세금 내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독교를 일부에서는 너무 배타적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구원관이 있기 때문이이다라고 말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즉 성경의 권위와 창조주 하나님이 진리 이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조금 소홀히 다루는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한국교회에 대한 우려함에 대한 그의 수고와 고뇌가 엿보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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