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 2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재학시절, 음악 시간 우리 가락을 배울 때면 음악 선생님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얘기가 있다. 우리 가락의 근본은 바로 '한'이라는 것이다. 당시 마이동풍격으로 지나친 말이었지만, 이 '서편제'라는 작품을 보고 '한'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서편제는 어느 주막에서 한 사내가 주인의 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떠돌이 소리꾼이었던 유봉과 야반도주를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해산 도중 숨이 끊어지고, 유봉은 동호와 송화에게 각각 북과 소리를 가르쳐주며 마을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외국 노래에 밀려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상놈이라는 핍박에 못 이겨 동호는 가출을 하고, 이에 송화는 소리를 거부하나, 유봉이 지어준 한약에 넣은 부자라는 약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송화는 다시 소리를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동호가 천신만고 끝에 누이를 찾았을 때에는 술집의 소리꾼으로 전전하는 상황이었다. 동호는 북을 잡고 누이에게 소리를 청한다. 둘은 마주 앉아 심청가를 부르며 서로를 확인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이튿날 동호는 떠나고 송화 역시 유랑의 길을 떠난다.

이 작품을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었다. 한, 한은 무엇인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대주제인 한은 무엇인가. 우리의 소리에, 아니 우리 민족 정신의 근본에 자리잡은 한이란 무엇인가.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 하면서까지 집착했던 한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 '한'이라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한의 의미는, '원한, 한탄' 정도의 뜻을 지니지만 여기서의 한은, 그런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다. 판소리의 근간이 되는'한'은 이 비극적 가족사에서 어느 정도 그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우선, 당시 천대받던 소리꾼이라는 직업이,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좋든 싫든 그들 모두에게 어느 정도 한스러움을 가져다 줄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두 부녀와 달리 '밥도 안나오는' 소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던 동호의 가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재인이라는 신분적인 차별에서가 아닌, 판소리가 받던 업신여김 또한 그들의 한스러움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봉의 '언젠간 판소리가 판을 치고 말껴!'라는 호기 있는 외침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공허한 울림이요, 절박한 다짐으로까지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이란 정말 이런 절망에서 오는 한탄에 불과한 것일까. 송화 개인에게 눈을 돌려보자. 송화는 동호가 떠난 뒤 식음을 전폐한 후 소리까지 금하였으나 눈이 먼 후 다시 소리를 시작한다. 그러나 원망의 기색이 완연해야 할 송화의 소리에는 그러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송화가 자신의 한을 원망으로 지니지 않았음은 훗날의 유봉의 말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또 송화와 동호가 재회하여 회포를 푸는 장면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을 눈멀게 한 유봉을, 자신을 매몰차게 떠나간 동호를 원망의 감정 속에 가두어두지 않고, 그 모든 한을 용서하는, 초월하는 '한'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우리가 찾던 해답이 조금이나마 드러난다. 판소리의 화신인 송화-술집작부로 전락한 그녀의 모습조차 지금의 우울한 판소리의 현실을 나타내는 듯한-는 세속적인 차원의 '한'을 뛰어넘는 '한',그 자체가 된 것이다. 그렇다. '한을 뛰어 넘는 한', 불만스러운 현실을 한탄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 그것을 초월하여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는 한의 세계, 이것이 우리 소리의, 아니 우리 민족 가슴 깊이 자리잡아온 한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나에게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정서인 한의 세계에 대해 많은 점을 깨닫고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지금껏 이 작품을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래서 아름다운 한의 세계를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나를 질책하며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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