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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영혼 ㅣ 이숲 청소년 4
헤르만 헤세 지음, 선근혜 옮김, 조인영 그림 / 이숲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가, 트라우마, 기억]작가, 예술가의 글이나 그림을 보면 '이런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참 힘들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같이 무딘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민감한 감성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래서 나의 무딘 신경에 고마워(?)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상처받기 쉬운 감성이 있음을 가끔가끔 느낀다. 이 책은 헤르만 헤세가 그의 일생에 영향을 준 열한 살 때의 한 사건(아버지 서재에서 무화과를 훔친)을 서술한다. 누군가에게는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을 그런 사건이 헤세에게는 일생의 화두가 된다. 이런 사건이 나에게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더불어 아이들에게 이런 깊은 트라우마를 주지 않도록 섬세한 배려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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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5쪽
일상에서 우리는 특별한 의미 없이 이런저런 행동을 한다. 사소한 일로 외출하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잡다한 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매번 다르게 해도 된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선택의 여지 없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이런 일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에 이럴 때 우리는 꼼짝 없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여 남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은 대부분 전자에 속하고, 또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후자에 속하는 것은 남들 앞에서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고, 또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가 흔하다. 이런 일은 평생토록 기억에 남아 우리 삶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61쪽-
~ 혹시 내가 저지른 도둑질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이대로 묻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예전처럼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모든 두려움과 고통도 다 부질없었던 것이 되어버릴 수는 없을까? 아! 만약 이 생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만 한다면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매시간 순수하고 빈틈없이 깨끗한 삶을 살아 그 황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
76쪽-
~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나 혼자 이리저리 날뛰게 하시고는, 아무 의미 없는 내 연극을 끝까지 감상하신 것이다. 마치 물에 빠진 쥐가 익사할 때까지 줄에 매달려 살려고 버둥대는 모습을 구경하듯이.
아, 차라리 처음부터 내게 이것저것 묻지 않고 매를 들고 와서 머리를 내려치시는 편이 내게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 조용한 공정함으로 내가 바보 같은 거짓말을 하게 내버려 두어 천천히 질식하게 하시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나았다. 어쩌면 이토록 섬세하고 공정한 아버지보다는 차라리 거친 아버지가 훨씬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79쪽
~ 나는 그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아버지의 서재를 잠시 구경하고 싶었었던 것뿐이었다. 어떤 물건이 있는지, 어떤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지, 아버지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무화과를 보았다. 나는 그것을 훔쳤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날 하루를, 그러니까 어제 하루를 고통과 절망감으로 괴로워하며 보냈고, 심지어 죽기를 바랐으며, 나 자신을 원망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래, 오늘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이 후회와 이 모든 것에 지쳤다. 나는 이제 조금 더 이성적이 되었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버지가 내게 기대하고 요구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 엄청난 반항심을 느낀다.
81쪽-
~ 어쩌면 이 사건은 내 유년기에서 두 가족 구성원이 서로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도, 서로 오해하고, 고통을 주고, 모든 대화와 이성이 상대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로운 고통과 상처와 혼란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시발점이 되었던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었고 실제로 일어났다. 터무니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놀랄 만한 일이며, 우스꽝스럽고, 절망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렇다, 그런 사건이었다.
~ 이 슬픈 일요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아버지는 나와 잠깐 대화하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화해했다. 결국, 나는 다시 내 방 침대에서 밤을 맞았고, 잠들면서 확신했다. 아버지는 한 점의 의심 없이 나를 용서해주셨다고. 내가 아버지를 용서해준 것보다도 더 완벽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