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부재 - 삶의 한가운데에서 해탈하기 Modern Spiritual Classic 4
제프 포스터 지음, 심성일 옮김 / 침묵의향기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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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제프 포스터의 신간 깊은 받아들임을 읽고나서 이 책을 찾았다. 저자의 이야기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현대적이고, 편안하면서도, 이지적이고, 아주 예리하고 치밀하다. 저자는 젊은 날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 우울증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실존적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바탕에 대한 자각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받아들임이었다고 한다. 캠브릿지를 졸업한 이 젊은 영적 지도자는 비이원론의 영적 가르침을 설파한다. 그것은 때로 뉴에이지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 선불교의 가르침과도 상통한 것 같다. 선을 가르치는 심성일님께서 왜 이 책을 번역했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선의 냄새가 짙다.


나 또한 선불교 제도권 안에서 공부하면서 얻은 통찰과 영감을 갖고 이런 저런 글들을 쓰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편안하고 현대적이면서 적합하게 다가갈만한 글로써는 이 글을 뛰어넘을 만한 글이 없을 것같다. 직접적이면서도 아주 명쾌하다. 현대인들에게 최적화되어있다.


저번에 읽은 저자의 신간에서도 그러했지만, 이 책에도 저자는 한결같이 '추구'의 중단을 이야기한다. <깊은 받아들임>에서는 심리적 추구에 주목했다면 이 책에서는 영적 추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모든 영적 구도는 좌절되어야 한다고.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절망 또한 사라진다고.


사람들은 추구하여 획득하고자 하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그 추구가 좌절되었을 때야말로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 스스로 드러난다. 그래서 일본의 도겐 선사는 '내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깨달음을 드러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저자는 깨달음, 완전한 영적 평화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수행'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하고 진실된 목소리로, 진실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가 '생각'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저자는 '추구'를 내려놓을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는 안목있는 사람들에겐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절절히 공감할만한 것들이지마는, 아직 안목이 없는 이들에겐 그 얘기가 그 얘기같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당송시대 번성했던 조사선의 '직지'가 그 이후에 전승되지 못했던 것은 구도자들이 디딜 발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바로 가리키는' 가르침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늘상 스승을 옆에 두고 공부하는 이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구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이제 막 안목을 갖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읽기에 적합한 것 같다. 깨어났지만 그 깨어남의 길목 들에 도사리는 함정들을 아주 예리하고 치밀하게 지적해낸다.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해탈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상태이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자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부 헛소리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생각이고, 또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p.94


목격자가 목격되는 모든 것과 하나 될 때, 자각이 자각되는 내용물과 하나 될 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한 깊고 완전한 매혹뿐입니다. -----p.111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제프, 그게 당신한테는 어떤가요? 깨어 있는 것은 어떤가요? '하나임'의 자리에 있는 것은 어떤가요?"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모두가 어떤 개인을 향한 질문인데, 여기에는 그런 개인이 없습니다. 깨달음? 깨어남? 하나임? 그것은 모두 개인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없다면, 여기에는 깨달을 사람도 없고, 깨어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하나임'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p.119


제프가 (깨닫기) 전에는 우울했고, (깨달은) 지금은 우울하지 않은 걸까요? 아뇨, 떨어져 나간 것은 내가 (우울하거나 우울하지 않은) '제프'라는 느낌입니다. 떨어져 나간 것은 분리된 개인이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여기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는 부분인데, 제프라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기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등장인물의 성격과 기질은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해탈은 성격과 기질을 잃어버리거나 개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은 개성이 없어지거나, 뒤로 물러나 삶에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영적인 추구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p.120


예전에는 나도 명상을 하는 것이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더 '고귀'하거나 더 '영적'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행위가 충격적일 만큼 평등하다는 것을 보게 되자, 그런 분별적인 관념들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명상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고, 자기탐구는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명상에 관심이 없고, 현존을 실천하는 일에도, 고요함이나 다른 무엇과 접촉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삶은 지금 이대로 언제나 충분합니다. -----p.123


언젠가 어느 아드바이타(비이원론) 스승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전히 거기'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내가 '여전히 한 사람'이라고, 또는 나의 사람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또는 그 비슷하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는 물론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었겠지요. 그의 '사람'은 아마 그에게, 다른 사람들의 사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때 그렇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마법 같은 능력을 주고는 사라졌나 봅니다. 어쨌든, 자기에게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 어떤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매우 개인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이 '개인적인 사람 없는' 사람이 놓치고 있는 점은, 다른 사람의 현존이나 부재를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모두 투사와 내사의 게임입니다. 교묘한 속임수들입니다. '여기'있는 사람이 '저 바깥으로' 사람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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