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다 - 삶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샬럿 조코 백 지음, 안희경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샬럿 조코 백이라는 미국인 선사가 쓴 책이다. 1960년대, 야스타니 하쿤 선사와 타이잔 마에즈미 선사 밑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로스엔젤레스 선원에서 마에즈미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일본인 선사로부터 전법받은 1세대 미국인 선사이며, 샌디에고에서 Ordinary Mind Zen School을 설립하여 선을 전파하다가 2011년에 입적하였다. 조동종 계열의 승려이며, 이 책은 조동종의 전통 수행법인 묵조선, 지관타좌를 다룬다. 전문적인 수행용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선수행에 관한 배경 지식이 없어도 접근 가능하다. 다만 저자가 전달하는 내용의 깊이가 상당히 깊다. 선의 현대화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고답적인 불교 용어는 피하고, 현대적인 용어들로만 선을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세련됬다. (미국 선불교의 특징이다.) 선에 관한 안목의 깊이도 굉장히 뛰어나서, 한번 훑어보고 덮을만한 책이 아니다. 사실 이런 책은 명상 에세이라기보다 제방선원에서 수행하는 수행승들이나 재가수행자들이 읽어야 할 수행지침서에 가깝다.


수행은 '영성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단어가 통용될만한 그런 개념은 아니다. 수행이란 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자 한다면 '영성적' 상태에 목표를 둘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수행이 유혹적이면서 해로운 목적이 될 수 있다.


수행의 길에서는 '좋은' 것만 밝게 비추고 소위 '나쁜' 것이라 불리는 상태를 제거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도 좋고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좋아지려는 몸부림은 수행이 아니다. 그런 훈련은 운동 종목에 행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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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물어왔다. "관찰하는 수행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이분법적인 수행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가 관찰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어떤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분리된 둘이 아니다. 관찰하는 자는 따로 떨어져 나온 다른 주체가 아니라 대신 빈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공'인 존재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저 관찰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듣는 이도 없다. 다만 듣는 행위만 있을 뿐이다. 보는 사람도 없다. 그저 보는 행위만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체인 관찰자를 너무나 꽉 움켜쥐고 있다. 수행을 충실하게 했다면 관찰하는 사람만 빈 존재가 아니라 관찰되는 대상도 비어 있다는 것을 읽히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찰자(목격자)는 붕괴된다. 이것이 수행의 마지막 단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 관찰하는 주체가 마침내 파괴되는 걸까? '없음'이 '없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얻을까? 삶의 경이로움뿐이다. 그 무엇에서 분리된 그 어떤 이도 없다. 오로지 그 자체로 살아가는 삶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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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바다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스승을 찾아다녔다. 여러 스승이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그래, 좋은 물고기가 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네가 보다시피 여기 바다는 엄청난 곳이다. 그걸 가늠하려면 너는 정말 오래도록 명상해야 한다. 너 자신을 담금질해야 하고, 정말 좋은 물고기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단다."


물고기는 한 스승을 만나 마지막으로 물었다. "무엇이 위대한 바다인가요? 무엇이 위대한 바다입니까?" 그 스승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껄껄 웃기만 했다.



샬럿 조코 백, 「가만히 앉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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