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은희경 작가의 데뷔작 <새의 선물>  

 

"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 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

 

우물가를 중심으로 두채의 살림집과 가게채로 이루어진 감나무집을 둘러싼 사람들의 개인사와 냉소적이고 담담한듯한 시선으로 자신의 삶과 사랑을 말하는 어른 같은 아이 열두살 강진희의 이야기가 담긴 성장소설이다. 우물가를 제외하곤 나의 유년시절 그곳과도 많이 닮아 있어서였을까? 책을 덮고나서 아련하고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게 기억하고 싶은 여운이 필름의 잔상처럼 오래도록 남았다.감추고 나의 싶은 치부를 들킨듯 부끄럽기도하고 열두 살 진희의 어린 아이 답지 않은 생각들과 행동에 뜨끔하고 애잔해지기도 했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곳의 우물 물 - 살랑이는 물결 위로 반사되어 보여지는 내 모습이 그녀의 냉소적인 시선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깊은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부끄러운 몸을 감출 겨를 없이 예닐곱 그 모습이 두레박으로 떠올려져 광진테라 아줌마의 설겆이와 장군네 빨랫감 사이로 스며들어 또 다른 나의 이야기도 들리는듯 하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한 나이. 그래서 성장할 필요가 없어졌던 열두 살- 이라 했던가? 그 절반 나이 예닐곱도 충분히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망각하고 있는것 중 하나는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이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훨씬 영리하고 똑똑한 존재라는것 아니던가!

 

" 나는 짜증이 난다. 아무 잘못도 없이 나에게 극복해야 할 상처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어른들에게 적의가 생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루어진 부모의 인연으로 인해서 왜 이런 과제들을 짐 져야 하는 것인지 부당하다.

  나는 지금 엄마와 아버지 생각으로 마치 돌덩이가 얹힌 듯이 가슴속이 묵직한 것이었다."

 

" 그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다시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에서 나는 슬픔을 느꼈으며 그런 슬픔이 나에게 약점을 만드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나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를 원치 않았다.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나는 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

 

여섯살에 엄마는 실성하여 자살했고 아빠는 아이 곁을 떠났다.

그래서 외할머니댁에 맡겨진 채 이모,삼촌과 함께 살지만 아빠의 살아있음을 알기에 엄마와는 달리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은 훨씬 커진다. <꽃밭에서> 라는 노래를 부르며 처음 아빠라는 발음을 해 봤다는 진희. 그녀와 달리 난 엄마의 대한 그리움으로  <꽃밭에서> 라는 노래를 부른 기억이 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곁에 있는 아빠에게 전해져 가슴 아파하며 슬퍼하시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아빠가 들어간 이 노래만 불렀던 기억이.. 그래서 내겐 너무 슬픈 노래 -

책임 없는 상처와 원치 않는 시선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보여지는 나' 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법을 일찍 터득하고 삶의 이면과 비밀을 누구보다 일찍 깨닫게 되는 진희. 생각 없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으면서 어딘가에 뚫어질 듯한 시선을 두고 있는 것. 습관인줄도 몰랐던 습관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 진희는 '보여지는 나' 가 되고 읽고 있는 나는 '바라보는 나' 가 되는듯 했다.

흠... 아니~ 그 반대인것 같기도 하고...

 

"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

 

" 그때 버스에 한 발을 올려놓는 것으로 아줌마의 인생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의 삶'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아줌마가 느꼈을 복잡한 갈등이 내 가슴으로 들어와 스몄다.

   나도 떠나고 싶은 건가, 나에게도 지금의 삶에 대한 번민이 있어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다른 삶은 어떤 것인가. 엄마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또 아버지라는 발음을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삶?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더욱 우울해진다.  내 삶이 이어지는 한 그들의 이미지를 떠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뜻에서 내게는 '다른 삶'이란 없었다. "

 

이미 사라져버린 버스의 뒷 꽁무니를 뒷쫓는 광진테라 아줌마의 시선에서 같이 느껴졌던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이 진희를 통해 걸러내지자 내 마음 속 그것들도 고요해졌다.

 

" 나에게 있어 이별의 고통을 느끼는 것과 그 이별에 대한 항체가 분비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음식물이 들어가자마자 침이 분비되는 것과 같다.

 이별이 닥쳐왔다는 것을 깨닫자 그것을 녹여 없애기 위해 내 마음속에서는 또 내가 두 개로 나뉘어진다. "

 

"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

 

" 완전히 헤어진다는 것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정지시킨다. 추억을 그 상태로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간에 의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변형될 염려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헤어짐이야말로 추억을 완성 시켜준다.

  현식오빠와 완전히 헤어짐으로써 내 첫 키스라는 추억의 박제는 완성되었다. "

 

하모니카 소리, 황혼이 배경이 되어 한 염소와 남자의 실루엣에서 느껴지던 첫사랑(?)의 그림자도 첫 키스의 추억처럼 박제 되어간다.

 

" 그러므로 지금처럼 할머니가 마땅히 이모를 야단을 쳐야 할 때 어이없이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면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

  다. 내 정통성이 뿌리를 내린 곳은 할머니의 사랑이 아닌 책임감이나 의무 따위의,그러니까 사랑보다 훨씬 저급한 감정이 아

  닌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

  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

  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

  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

  지도 모르겠다. "

 

"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은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에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

  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

 

열두 살 진희는  할머니의 완전한 사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의심하고, 스물한 살 이모에게 미운정까지 질투를 낸다. 역시나 다른 여느 아이처럼 사랑에  목마른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아이처럼 투정 부리지 않는다. 투정을 부려도 할머니는 다 받아주셨을텐데 조숙한 진희는 그사랑을 책임과 의무가 아닐런지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진희가 할머니에 대한 감정이 고운 정만 있는 이유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생명의 뿌리인 부모라는 존재의 상실과 부재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아이에게 눈치 없는 어른들의 행동이 더해져 아이는 눈칫밥만 느는거 같아 가슴이 아리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데 속마음과 달리 너무 빨리 성숙해버린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웁다.

 

" 어느 날 나는 지나간 일기장에서 '내가 믿을 수 없는 것들' 이라는 제목의 긴 목록을 발견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다 말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면체로서 언제나 흘러가고 또 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

  의 삶 속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이며 또 그 믿음을 당연하고도 어이없게 배반당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입을 것인

  가. 무엇인가를 믿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그 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삶을 꽤 심각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목록을 다 지워 버렸다.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

  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

 

" 숲속에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 여우가 깜짝 놀라 뛰기 시작 했다.(....) 그래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혀졌고 숲은 그 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커다란 비밀을 일찍 알아버림으로서 조숙해진 열두 살의 소녀 진희의 시선속에 그렇게 우리들의 삶도 비밀도 간파 당한 기분이다. 상처와 아픔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단단히 여물어 딱지를 앉게 만들고 그 딱지가 떨어져 나갈즈음 어느새 나를 위로하고 우리를 포옹하는 이야기의 힘이 된다는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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