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 SF와 인류학이 함께 그리는 전복적 세계
정헌목.황의진 지음 / 반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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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신청할 때 언급된 소설 전 작품 다 읽고 서평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는데 자신 없었다. 당첨되면 생각하지 뭐. 이런 마인드였다. 그리고 당첨되었고, 다 읽었다!

하지만 정헌목의 탁월한 요약 덕분에 인용된 열 권의 작품을 굳이 읽지 않아도 이 책을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하다. 글쓰기 교실에서 소설 읽고 요약하기의 모범사례로 보여줄 만큼 깔끔한 정리다. 정헌목의 요약 반 인류학적 해석 반으로 이루어진 여덟 편과 황의진의 탐사 보고서(?)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의진은 만약 SF 세계관 속에서 민족지 연구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학술적인 글을 썼다. 사이언스픽션과 앤트로폴로지가 교차하는데 나는 아무런 경계선을 발견하지 못 했다. 이미 SF는 어느 정도 인류학이 아닐까? 또 인류학은 SF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게 인류학은 지구 권역에 스며드는 어떤 ‘유행’들을 경계하도록 경고해주는 학문이다. 서구의 것이 마치 지구의 표준인 양 퍼지고 있는 세계화를 시니컬하게 본다. 또한 지구행성 중심의 역사에서 인류라는 종의 위치를 가늠하고 주제를 파악한다. 그러는 한편 여전히 인류를 애정한다. SF와 판타지문학도 마찬가지다. 그 세계만의 작동방식을 현실에서 재현하고 구연하기엔 다소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이미 그 자체로 고유하게 존재하는 세상이다. 난 사이언스픽션이 현실의 대안세계라는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기 이곳이고 ‘그곳’은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허구일 뿐이라고 해도, 이미 우리는 그 세상에 빠져들지 않은가. 우리의 지독한 현실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난 판타지에서 현실을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두 저자의 합이 돋보이는 글은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을 다룬 것이다. 정헌목은 “성별을 제거하고 나면 착취와 전쟁이 없는 사회가 남는다”는 “사고실험”이라고 평했다. 황의진은 작품 속 주인공 겐리 아이(남성)가 아닌 어떤 ‘여성’이 게센 행성을 방문한다면 어떨까 상상하며 양성의 외계인 세상을 탐구한다.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 <<빼앗긴 자들>>도 소개되었는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고, 정반대인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끌어당김으로써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는 ‘공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도 두 편 소개되었다. 르 귄이 타자와의 조우와 타자에 대한 예우를 다룬 정치적인 글을 썼다면 버틀러는 책임소재를 가지고 저글링하는 러브스토리들을 썼다.

SF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많은데, 과연 느끼는 대로 살고 있는가? 허물어진 경계, 연결된 관계를 일상에서 몸소 느끼고 있는가? 실천하고 있는가?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겠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직 덜 읽어서 그럴까? 좀더 SF와 환상문학에 푹 빠져보고 다시 생각해보겠다. 나는 이제 버틀러와 르 귄의 전 작품을 읽을 것이라는 다짐과 미루고 미루었던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빨리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이 책을 덮는다.

일독을 권한다. SF가 궁금한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일단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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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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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카드같은 패치워크. 사랑으로부터의 상실로의 이주, 상실로부터의 사랑으로의 이주는 그냥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화해다. 자연 속에서 발맞춰가면서 상실의 운명을 이해하는 훌륭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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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드는 세계 위대한 도시들 2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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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들의 고유한 에너지가 도시의 심장박동에 따라 울린다. 우리가 곧 도시야, 인간은 세계를 창의해. 그러니 세상을 주의깊게 ‘관찰’하렴. 무언가가 되려는 염원, 구분 짓고 배제하려는 혐오 같은 마음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결정한단다. 도시는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에 귀기울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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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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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치나 여성들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공동체를 떠날지 말지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한 남성에게 기록을 부탁한다. 그 남성은 아우구스트, 부모 손을 잡고 공동체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자로 아이들에게 숫자와 글자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들의 회의를 아우구스트의 시선으로 아우구스트처럼 구석에서 경청하는 읽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더 몰입될 것 같다. 영화로 보는 것도 좋겠다. 여성들의 최종결정은 책 표지를 펼쳐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이 말을 끄는 그림이 말해준다. “우리는 아이들이 안전하길 원해.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싶고, 생각하고 싶어.”(182) “이곳을 떠나는 일은 우리에게 좀 더 멀리 볼 수 있는 관점을 얻게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용서하는 데에 필요하며, 우리가 지닌 믿음에 따라 제대로 사랑하고, 평화를 지키는 일이다.”(168)

고립된 공동체에서 살아온 여성들이 나눈 이야기는 오늘날 글로벌 페미니즘의 의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잖아. (중략) 아마도 문제는 남자 그 자체가 아니라 남자들의 머리와 마음을 잠식하도록 허용된 치명적인 이데올로기겠지.”(105) “우린 일원이 아니라고! 우리는 몰로치나의 여자들이야. 몰로치나라는 공동체 자체가 가부장주의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린 거야.”(183) “그들이 권력을 추구했기 때문에. 권력을 휘두를 대상이 필요했고 그게 우리가 된 거지.”(187) “문제는 성경에 대한 남자들의 해석과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수됐냐는’거야.”(237) “우리는 아들들이 타인을 연민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 과정에서 재교육을 유기적으로 하게 될 거야.”(239) “다른 여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특정 상황에서 그들이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일을 할 때, 네가 위선자처럼 굴면 안 되지.”(269) 서구 여성 작가의 시선에서 그려진 소설이기 때문에 다소 익숙한 언어들일 수 있다. 이점을 작가도 의식했는지, 아우구스트의 입을 빌려 저지대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몇몇 단어들을 상당히 의역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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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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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 자미에게는 여성들과의 관계가 바로 집이었다. 제니, 진저, 비, 유도라, 뮤리얼, 아프레케테로 이어지는 사랑 연대기를 통해서 그 점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집을 떠나서 만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 오드리 로드를 자미로 키워주었다고. 자미는 서인도제도에서 레즈비언을 일컫는 말 중 하나로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캐리아쿠식 이름”(440)이다. 오드리 로드의 이 책 뒷내용의 삶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책 속에서 그는 자기의 상처와 꼭 맞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은 서로 닮아보인다. 뮤리얼에게서 제니가 겹쳐보이고, 유도라에게 오드리는 오드리에게 진저같기도 또는 비같기도 하다. 여신같이 묘사된 아프레케테에 할애된 장은 비교적 짧지만 오드리에게 “정서적인 타투”(437)로 남아 멘토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오드리 로드가 어머니의 집을 떠나기 전 내용이 책 분량의 반을 차지하지만, 내게 인상깊었고 읽는데 속도가 났던 쪽은 후반부다. 그렇지만 전반부가 좀더 ’신화‘같았다. 특히 첫 생리가 터지고 어머니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절구로 사우스를 해먹는 챕터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 연상되어 분위기가 신비스럽다. “온몸이 강하고, 꽉 차고, 열린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절굿공이의 부드러운 움직임, 그리고 부엌을 가득 채운 풍부한 향기, 초여름의 열기가 품은 충만함에 사로잡혀 있었다.”(136) 이 날 이후로 오드리 로드는 그 절구를 쓸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절구 빻는 행위는 생리가 시작되면서 유년시절에 작별을 고하는 ‘의식’같기도 하다. 또 가장 신화스러운 챕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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