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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포비아를 넘어서 - 4자녀 엄마 기자가 해부한 초저출산 대한민국
이미지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9월
평점 :
아이를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나이가 되어갈수록 ‘나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얼마나 먼 미래일지, 정말로 겪게 될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스스로가 신기하다. 전에는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넌 너에게 스스로가 너무 소중한 사람이라, 아이를 낳지 않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만약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갖추고 싶은 선결조건이 있다. 첫째, 나이스한 파트너. 둘째, 탄탄한 재정. 셋째, 내가 엄마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됨. 이왕 자식이 생길거면 잘 키우고 싶고 자식 있는 내 삶도 잘 꾸리고 싶다. 번식본능이 있는 웬만한 인간들이 다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조목조목 짚어주듯 한국사회는 이미 육아포비아에 물들었다. 1부, 2부는 아이가 갈수록 적어지는 우리 사회를 널리 관찰하고 기록하였는데 어렸을 적부터 ‘저출산 고령화’를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듣고 자란 내겐 다소 식상한 내용이었다. 저출산은 심각한 문제고, 돈 문제, 가부장적 분위기, 핵가족이라는 환상이 근본적 원인이라는 점.
반면, 출산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서 3부는 꽤나 새로운 내용이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해결책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어서 제도의 맹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대응책이라고 마련한 다자녀 지원 정책 등도 ”일단 낳으라“는 주의여서 아이가 성장하는 단계별로 적절한 지원은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하도 저출산저출산저출산 노래를 불러서 젊은 세대에게 이미 친숙한 문제로 자리매김해 그 경각심이 잘 발동하지 않는다고.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왜 저자가 저자로서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은 ‘저출산’은 그 책임이 여성에게 가중될 수 있기에 ‘저출생‘이라는 표현을 제안했고 설득력 있는 제안인 만큼 ‘저출생‘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걸로 안다. 짐작건대, ‘육아포비아‘ 현상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저출생‘에 익숙할 것이다. 만약 출산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입장을 강조하고 싶었더라면 ‘저출산’이 마땅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부의 “여전히 시월드라는 공포”란 부제의 장과 3부에서 클라우디아 골딘을 인용하며 “사회가 오랫동안 만들어 온 성 역할과 성별 분업, 가정 내 권력 구조 탓에 조정하고 포기하는 쪽이 되는 건 대체로 여성이다.”(229)라고 지적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여자로서 엄마로서의 고충을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육아에 있어서 어느 한 성별의 책임이 부각되는 것을 지양하고 싶었다면 ’저출생’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동기들은 여자가 훨씬 많은데 막상 교수 임용되는 건 남자가 더 많다는 인터뷰에 관해 저자가 단 코멘트가 다음과 같다. “진원 씨 역시 박사 과정 동기들과 교수 임용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7년간 피임하면서 ‘겨울나무처럼’ 버텨왔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남자 동기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육아와 취업, 학업을 병행하는 건 아이 아빠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104) 그럴 것이다. 그런데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남자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굳이 덧붙이는 건 좀 아쉽다. 실컷 가부장적 문화를 지적하고(155) 요즘에는 일과 육아로 고단한 아빠의 모습이 흔해졌다고(156) 균형을 맞출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솔직하게 말하자. 임신, 출산, 육아에서 여성의 압도적인 비중과 희생은 현재완료형이다. 원래 여성의 몫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여성들이 키워졌다. “남성과 동일한 교육을 받고 자라 사회적 지위, 성공에 대한 욕구도 높고 저돌적인 도전 정신을 지닌 강한 여성”(144)들이 등장했어도 “낮은 여성고용률”(71)이 현실이며 저자가 229쪽에서 지적했듯이 아이에 관한 긴급한 상황에서 직장에서 달려나가는 쪽은 여성이다. 또한 나는 명절에 시댁 먼저 가는 문화나 시댁에서 닭을 삶을 때 며느리만 빼고 다리를 준다거나 하는 것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차별“(154)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은근하고 찌질한 차별일수록 더 곱씹게 되고 속상하다. 그것을 작고 사소하다고 치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육아를 권하지 않는 사회는 단순히 새 생명을 반기지 않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누구를 존중하지 않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