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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 - 사회 구조가 만드는 외로움의 고리를 끊어내는 개인의 연대
턱괴는여자들 외 지음 / TohPress(턱괴는여자들) / 2024년 7월
평점 :
내가 속한 독서모임에서 당분간, 여성주의, 돌봄, 장애, 가난, 차별 등에 관한 책을 다루지 말자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그동안의 책목록을 보면 너무 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번 여성주의, 차별, 가난을 얘기하지만 정작 구성원 모두 비장애인, 중산층, 교육받은, 아직은 젊은 나이인 중년여성이다. 가난하지 않은 자가 가난에 대한 책을 읽는다고 과연 얼마만큼 가난에 가 닿을 지에 대한 회의감이 우리들 안에 있다. 실수로라도 '그들'이라고 부르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과 '우리들' 사이에 흐르는 강은 넓고도 깊어 보인다.
그렇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우리 앞에 닥칠 것이다. 늙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므로. 우리도 언젠가는 늙을 것이며 자식들은 늙은 우리를 버거워 할 것이다.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시력이나 청력을 상실할 수도 있고, 가난해 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는 '외로움의 땅'(p.10)의 주민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내가 그 땅의 주민이 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것은 죽음만큼이나 확실하다.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는 몇 장의 사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카로우 셰지아크Carol Chediak라는 작가가 5년간 요가를 가르치기 위해 방문했던 베타니아 양로시설 노인들의 사진. 양로시설의 좁디 좁은 방을 자신의 물건으로 꾸며놓은 노인들이, 그들의 친구 카로우 셰지아크의 카메라 앵글 속에 담긴다. 프랑스의 한 워크숍에서 카로우 셰지아크의 'Possibly, Here'라 명명된 사진 연작을 보게 된 저자(턱괴는여자들)는 '나이드는 몸과 노년의 집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주조'(p.20)하게 된다. '턱괴는여자들'은 '노인들의 작은 선택과 끊임없는 두드림을 상상'(p.24)했다. 늙고 가난한 노인이, 집도 아닌 공공시설에 거주하면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서로를 연결하고 '장소의 향유자'로서 '외로움을 걷어내는'(p.25) 장면을 본 것이다. '턱괴는여자들'은 '사회 구조적으로 형성된 외로움' (p.10)을 '개인에게 전가하던 단편적인 관례'를 끊어내는 '맑은 눈의 연대를 도모'(p.30)한다는 취지로 이 책을 구성했다.
이 책은 '카로우 셰지아크'의 연작사진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외로움에 대한 사유를 모은 책이다. 내가 아는 저자도 있었고 모르는 저자도 있었다. 좋은 글도 있었지만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글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기획의도를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특히 카로우 셰지아크의 사진은 압도적이다.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사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언뜻 보면 좁은 방, 늙고 힘없어 보이는 노인, 창문에 설치된 창살 등이 쓸쓸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간은 작지만 그 안에는 방 주인이 좋아하는 물건들이 배치되었다. 비록 감옥처럼 쇠창살이 달린 창이지만 분홍색 커튼, 그리고 커튼이 열린 틈으로 비쳐들어오는 밝은 햇살은 침대에 걸터앉은 방주인의 주위를 휘감아 후광처럼 보인다. 다시 사진을 살펴보면 방주인이 손에 작은 꽃을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저기 꽃이 장식되었다. 심지어 신고있는 슬리퍼도 발등이 꽃모양이다. 공간과 공간의 주인이 카메라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인다. 내 입가에도 미소가 걸리는 멋진 사진이다.
이 책 중 '턱괴는여자들'이 쓴 서문 격인 「외로움의 땅 위에서」라는 글도 좋았지만 특히 좋았던 글은 '김원영'의 「외로움을 향한 복수의 시선들」 이었다. 김원영 작가가 쓴, '사회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공동체를 방문한 외부자가 그곳의 사람을 응시하려 할 때, 그 응시의 '대상'을 향한 주체의 윤리적 욕망이 쉽게 드러난다.'(p.47)라는 대목. 이 부분을 읽고 나와 내 독서모임이 빠진 함정이 혹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상을 향한 주체의 윤리적 욕망'. 결국 내가 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 개개인이 아니라, 사실 그 누구라도 좋았던 것일까? 여성주의, 차별, 장애, 가난, 소외를 이야기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사람들은 각각의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표상하는 추상적 타자로만 보았던 걸까? 뼈아픈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다. 비슷한 예로, 얼마 전 장애인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했을 때, 함께 간 동료가 너무도 쉽게 '윤리적 욕망'을 드러내는 바람에 민망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나도 그러지 않았다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매순간 발생하는 이런 시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 편으로 김원영 작가는'이 시선이 외부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p.50)라고 말한다. '시설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 일부는 순순히 풍경이 되기를 거부하고 어떤 종류의 투쟁을 통해 외부자들을 정작 풍경의 일환으로 전도시키는 지점을 획득한다.'(p.50)고. 바라보는 자들을 문제삼는 '바라봄'이 이렇게 탄생한다. 고로 내부자와 외부자 서로간에 '바라봄'을 통해 상대방은 '풍경'으로 포착된 추상적 타자들이 된다.
그러나 세지아크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그는 노인들을 풍경으로 다루지 않았다. 오랜 우정으로 다져진 그들의 시선은 맞서 싸우지 않는다.(세지아크의 사진을 보면 더 잘 이해가 갈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적 시선'을 갇히지 않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각자가 상대방을 내적시선으로만 바라본다면 외로워질 것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복수의 시선이 있음을 배워야 한다.'(p.56-57) 김원영작가의 마지막 말은 내 마음 속 답답함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 나의 시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답은 일단 알고, 배워야 한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내 외로움을 끊어내는 시작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턱괴는여자들'의 기획 덕분에 좋은 사진과 글을 접하게 되었다. 감사한 마음이다.
*이 리뷰는 도서 체험단에 선정이 되어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