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세네카가 말한 이 문장에 대한 로마 발음과 고전 발음은 다음과같습니다.
로마 발음: 논스콜래, 세드 비때 디쉬무스고전 발음: 논스콜라에 세드 위이타에/비타에 디스키스잠깐 맨 마지막에 위치한 ‘디쉬무스discimus‘ 동사를 살펴볼게요.

라틴어는 동사에 주어의 인칭이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1인칭과2인칭 단·복수의 경우 문장에 주어를 따로 표시하지 않습니다. ‘디쉬무스‘는 ‘배우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스코disco‘가 원형입니다. 여기에서 ‘배움, 공부, 규율‘을 의미하는 ‘디쉬플리나disciplina‘라는 명사가 파생하고 학생은 ‘디쉬풀루스discipulus‘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여기에서 영어의 ‘디서플린discipline (규율, 지식 분야, 학과목)‘, ‘디사이플disciple (제자)‘이라는 단어가 유래했고요. 참고로 라틴어 사전에서동사를 찾을 때는 반드시 동사의 직설법 현재 단수 1인칭으로 찾아야만 원하는 동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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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적 문제는 자아상의 근거를 성취와 행위에두는 데서 비롯되는 지독한 정서 불안이다. 그래서 그는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떠받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흠잡아야 한다. 내 신학교 시절의 한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을 선행"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물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거기서 그친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냥 형일 수 있다. 참된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 P117

지난 세월 많은 독자가 동생의 복권에 아무런대가나 속죄도 수반되지 않았다는 피상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그들은 동생이 배상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말렸음을 지적한다. 그가 전혀 값없이 집안에 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는 용서와 사랑이 항상값없고 무조건적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지나친 단순논리다. 누가 당신의 램프를 깨뜨리면 당신은 상대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또 다른방법은 상대를 용서하고 당신이 값을 치르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캄캄해서 자꾸 가구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보다 중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당신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역시 당신이 택할 수있는 길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하는 것이다. 명예 회복의 일환으로 사람들 앞에서 상대를 욕해 그의 좋은 평판을 짓밟으면 된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이다.  - P123

다행히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결격된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님은 진정한 형을 상상하고 동경하도록 우리를 유도하신다. 우리에게는 그런 형이 계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형을 생각해 보라. 그분은 우리를찾으러 옆 나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서이 낮은 땅까지 오셔야 한다. 한정된 금액 정도가 아니라자신의 목숨이라는 무한한 대가를 기꺼이 치러 우리를하나님의 집안에 들이셔야 한다. 우리의 빛이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다.
형으로든 동생으로든 우리는 다 아버지께 반항했다. 소외와 배척과 거부를 당해 마땅하다. 비유의 요지는용서에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값을치러야 한다. 형이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동생이 다시한식구가 될 길은 없었다. 우리의 진정한 형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다.
거기서 그분의 옷과 존엄성이 벌거벗겨지셨기에 우리는 자격 없는 존엄성과 신분을 입을 수 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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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가 높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세리들과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항상 끌어들인 반면 당대의 종교적이고 성경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대체로 그런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 끌렸던 부류의 외부인들이 현대 교회에는 끌리지 않고 있다. 가장 전위적인 (avant-garde)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우리가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반듯하고 도덕적인 경향이 있다. 인습을 벗어난 난잡한 사람들이나 소외되고 망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피한다. 그의미는 하나뿐이다. 우리의 설교와 행실이 사람들에게미치는 영향이 예수님과 같지 않다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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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상하게 하는 일은 그만하기로 했다 - 바닷가마을에서 깨달은 지금을 온전하게 사는 법
전지영 지음 / 허밍버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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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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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공부하는 사람이자 신을 믿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꽤 오랜 시간 ‘오늘날의 종교는 인간에게 어떤 기다림과 기대감을 줄 수 있을까? 어떤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마음속에 출로 그 법을 도민체와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거나 질문을 겉으로 드러내 던지면 믿음이 없는 자‘로 낙인이 찍힐까 봐 두려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적을 그 있던 신학교나 가톨릭그회가 그 같은 질문을 포용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은 공동체는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만 아니라 그 질문에서 나아가 ‘나만이 연주하도록 신이 나에게 즌 악보는 무엇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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