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적 문제는 자아상의 근거를 성취와 행위에두는 데서 비롯되는 지독한 정서 불안이다. 그래서 그는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떠받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흠잡아야 한다. 내 신학교 시절의 한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을 선행"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물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신이 잘못한 일을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거기서 그친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냥 형일 수 있다. 참된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 P117
지난 세월 많은 독자가 동생의 복권에 아무런대가나 속죄도 수반되지 않았다는 피상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그들은 동생이 배상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말렸음을 지적한다. 그가 전혀 값없이 집안에 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는 용서와 사랑이 항상값없고 무조건적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지나친 단순논리다. 누가 당신의 램프를 깨뜨리면 당신은 상대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또 다른방법은 상대를 용서하고 당신이 값을 치르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캄캄해서 자꾸 가구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보다 중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당신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역시 당신이 택할 수있는 길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하는 것이다. 명예 회복의 일환으로 사람들 앞에서 상대를 욕해 그의 좋은 평판을 짓밟으면 된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이다. - P123
다행히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결격된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님은 진정한 형을 상상하고 동경하도록 우리를 유도하신다. 우리에게는 그런 형이 계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형을 생각해 보라. 그분은 우리를찾으러 옆 나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서이 낮은 땅까지 오셔야 한다. 한정된 금액 정도가 아니라자신의 목숨이라는 무한한 대가를 기꺼이 치러 우리를하나님의 집안에 들이셔야 한다. 우리의 빛이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다. 형으로든 동생으로든 우리는 다 아버지께 반항했다. 소외와 배척과 거부를 당해 마땅하다. 비유의 요지는용서에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값을치러야 한다. 형이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동생이 다시한식구가 될 길은 없었다. 우리의 진정한 형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다. 거기서 그분의 옷과 존엄성이 벌거벗겨지셨기에 우리는 자격 없는 존엄성과 신분을 입을 수 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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