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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1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19년 5월
평점 :
<누가 날 죽였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내가 죽어 있었다. 아니 처음엔 죽어 있다는 인식이 없다. 죽어 있는 자신의 신체(몸)을 보기 전까지는 마치 살아 있는데 그냥 몸이 평소와 좀 다르게 느껴지고 왠지 어딘가 좀 아프고 힘이 없는 듯하면서도 가벼운 느낌을 받는다. 영혼이 되어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아도 되니 중력의 강한 힘에 이끌려 땅에 붙어 다니지 않아도 되니 몸이 약간 공중에 뜬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고 이윽고 자신의 신체, 이제는 사람들이 시체라고 부르는 자신의 영혼이 머물렀던 물리적 공간이 눈에 들어오면, ‘왜 내가 거기 누워있지?’라는 의아함을 잠시 가진 후, 곧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체를 보고 반응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을 관찰한다. 슬퍼하는 사람, 놀람과 충격에 빠진 사람, 입으로는 슬퍼하나 눈으로는 즐거운 것 같은 사람, 무관심한 사람 등등 다양한 반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곧 자신의 시체를 보는 것이 힘겹고 또 역겨워진 영혼은 그 곳을 떠나 자신과 같은 영혼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거나,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계속 살던 곳 주변을 배회하며 마치 살아있는 듯 생활하거나, 하여튼 영혼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이런 모습이 대부분의 ‘죽음’을 다루는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나오는 죽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베르베르의 신작 <죽음>도 시작은 비슷한 것 같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혼과 대화를 하고 교감하는 영매가 나온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지금 내 곁에 어떤 영혼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영매들은 영혼의 기운을 느끼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의 주인공(아직 자신의 삶에 애착이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으며, 더구나 죽기 하루 전 일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을 완성한 작가인) 가브리엘 웰즈가 자신의 죽음에 깃든 미스테리와 음모를 밝히는데 영매 ‘뤼시’의 힘을 빌리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혼 세계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물리적 세계에서 존재하는 인물로 사건 해결에 꼭 맞춤인 영매 ‘뤼시’. 주인공 가브리엘과 뤼시의 얽히고 설킨 활동과 이야기를 통해 소설은 가브리엘 웰즈의 죽음에 씌워저 있는 베일을 하나씩 벗겨 나간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영매 ‘뤼시’의 사건 해결 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처음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번 소설은 미스테리 탐정 형사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탐정 형사 소설만큼의 흥미진진함이 있기도 하지만 범인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는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탐정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으레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뭐 이런 범인과 죽음이 있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아가는 탐정 소설물의 플롯을 따르기는 하지만 범인을 잡고 사건의 미스테리를 푸는 것이 목적인 소설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베르베르의 소설이 그런 성격의 소설에 머물렀다면 작가의 많은 팬들은 실망했을 수도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독자에게 주었던 재미가 다소 반감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사건 해결의 플롯을 따라 가면서도 소설 속에 작가는 장르작가, 대중 소설작가로서의 자신의 생각과 고민,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찰들에 대해 잘 풀어 놓고 있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먼저, 주인공과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해서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가브리엘 웰즈는 소설가이다. 베르베르처럼 많은 대중적 성공을 거둔 소설 작가로 SF적인 세계관을 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 점은 작가인 베르베르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마도 주인공의 모습에 작가의 모습이 일정 투영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가브리엘의 소설 작품이 소위 순수문학집단의 평론가인 ‘무아지’에게 무참히 깨지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 책이 백 년 뒤에도 읽힐 거라고 생각하나 보죠? 아주 기고만장이군요. 미래 세대에게 어필하겠다는 건 그의 공상에 불과해요. 나는 고전만이 유일한 가치를 지닌 수준 있는 문학이라고 믿고 그것만을 옹호할 뿐이에요. 슈퍼마켓의 진열대를 채운 환상 문학, 영웅 판타지, SF, 추리, 스릴러, 공포 소설, 만화, 에로 소설, 이것들이 과연 문학입니다. 이것들은 상상의 소산이지 <진짜> 문학이 아니에요. 좋은 소설이라면 응당 지금 여기를 현실과 현재를 말해야죠. 작가의 앎과 경험에서 나와야 좋은 소설이지. 환상의 결과물은 좋은 소설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평론가 ‘무아지’에게 가브리엘이 반박한다.
자신의 유년기를 소설로 쓰는 작가는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 내지 않고 그저 관찰한 걸 기록할 뿐이에요. 그의 부모나 그를 둘러싼 세계, 그의 삶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가 만들어 낸 게 아니에요. 그들은 자서전을 쓰고 있을 뿐이에요.
대부분의 예술계가 그렇듯 문학계도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두 갈래가 나뉘어 있고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점철되고 잇는 현실을 반영한 것 같다. 아마 대중 장르 소설작가로서 작가 자신이 받았던 비판과 비난도 작품 속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무아지’가 이런 종류의 소설이 백년 뒤에 읽힐 거라고 생각하냐며 비아냥거렸지만 작품 속에서 가브리엘의 중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코난 도일의 탐정 소설 <셜록 홈즈>가 1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읽히고 수많은 셜로키언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가브리엘 웰즈와 그의 소설에 대한 무아지의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죽음 이후 ‘영혼으로서의 삶’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평소 죽음 이후 ‘과연 영혼이 있나? 영혼이 있더라도 이미 나라는 육체는 죽었고 그 영혼이 환생한다고 해도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관련 없는 또 다른 존재일텐데, 그 영혼과 환생이 과연 지금 현재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도 그런 나의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우리 영혼과 현재의 삶을 관장하고 죽음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신적 존재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 의지에 앞서는 신의 절대 의지에 다소 반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평소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중에 죽음과 영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가브리엘이 저승을 관장하는 ‘메라트론’을 만나고 난 후, ‘죽을 때 삶에서 배운 걸 모두 기억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며, 자신이 배운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 있다.
첫째, 인간의 삶은 짧기 때문에 매 순간을 자신에게 이롭게 쓸 필요가 있다.
둘째,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남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 선택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우리가 지는 것이다. ~
그리고 여섯 째,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은 유일무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다. 비교하지 말고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이런 가브리엘의 성찰은 현재를 사는 내가 삶에서 배워야 할 것과 같다고 생각되었다. 베르베르의 전작 소설인 ‘고양이’를 읽어 본적이 있었다. 그 작품에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현생 인류인 우리가 폭력, 전쟁, 테러, 환경파괴 등으로 지구를 망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비판하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지향점과 문제의 해결 방법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재미있는 상상력, 기발함이 넘치는 인기 소설이 아니라 그 속에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함의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 죽음은 어떤 것을 담고 있었을까? 가브리엘의 깨달음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소설의 마지막을 덮었다.
* 사족 – 첫 문장의 중요성
소설의 첫 장면에서 가브리엘이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나를 누가 죽였지?’라는 문장을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이 문장을 첫 문장으로 해서 소설을 구성하고자 하는 장면인데, 이 때 소설의 첫 문장의 중요성에 대한 가브리엘, 어쩌면 작가의 생각이 서술된다. 그리고 이 책은 가브리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한 챕터 전개 되면 관련 있는 것으로 가브리엘의 조상인 에드몽 웰즈가 썼다는 백과사전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 사전’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중 유명한 ‘첫 문장과 끝 문장’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다.
유명한 첫 문장으로 ‘어느 날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프란츠 카프카, <변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등이 적혀있다. 특히 카뮈의 <이방인>의 첫 분장이 눈에 와 박히는 느낌이다. 이런 선언적 또는 선동적 첫 문장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맥이 될 때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는가 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죽음’의 첫 문장인 “누가 날 죽였지?”도 성공적인 첫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