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변화를 희망으로 만드는 책임이 온전히 우리 자신에게 주어져 있음을 되새기며 준비할 때 "
- 우리는 사회에 소속돼 있기 때문에 우리 삶과 밀접해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며,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 속에는 반드시 각자의 몫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을 창작하는 문학인들로서 실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조명하는 듯한 구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실행과 실천의 이전엔 글이 뼈대가 돼 듯이, 행동의 기초인 글을 쓰기 전에도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바로 "인식".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 오로지 사적이고, 그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만으로 보이던 것들도 사회와 필연적으로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만 봐도 그러한 감상이 나온다.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인물들. 그들의 모습이 서사화되었을 때 우리에게 와닿는 감각들을 생각해 본다. 특정한 주제에 날카롭고 뚜렷한 인식 갖는다는 건, 단언컨대 문단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번 호 주제에 오른 "세계서사"는 우리가 사회의 총집합인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이전 사회 문제의 인식들을 바꾸기 위해 문학이 걸어온 행보를 뒤이어 전진의 필요성에 대한 타당한 논리를 제시함과 동시에 진보를 목적으로 방향성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에 배치돼 있는 칼럼에서는 "기후 위기를 어떻게 서사화할 것인가"의 질문을 시작으로 세계화를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하며, 정치와 문학의 조합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를 가리키는 동시에 수동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 말곤 할 수 없는 허무주의에 맞서, 세계를 재현하는 서사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구절은 해당 칼럼의 목적성을 부각한다. 즉,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변혁의 서사가 절박하게 요청됨과 동시에 개인의 경험이 사회적 총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무세계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목적성, 아직 형태화되지 않는 것들이 앞으로 어떻게 서사화되어 구체화될지 기대를 품게 된 글이었다.
좀 더 우리의 삶과 가깝게 말하자면, 새로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본문의 말을 빌려 말해 문학과 정치의 조합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문학과 정치, 그리고 우리의 삶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이와 관련해 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글은 다른 성격을 띠는 두 작품을 예시로 잘 개괄되어 있다.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같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사회적 재난을 대처하는 현 정부의 문제점을 확실히 짚고, 피해자 권리 보장과 더불어 진상 규명 및 재발방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 대해, 문학이 할 수 있는 몫에 대한 여러 문학적 방식을 탐색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추상의 언어를 실현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이미 있는 것과 지나간 길(현재와 과거)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사유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것(즉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길)으로 미래를 어떻게 살아나갈지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는, 주민현 시인의 작품 해석과 무력할 수밖에 없는 말을 갱신하면서 권력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 변윤제 시인의 작품 해석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말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구절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고뇌하기를 권고한다. 사회적 흐름에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늘 문학이 해야 할 몫은 분명하다. 이것을 어떻게 언어로 오랫동안 보존하고 투쟁하고 저항할 것인지, 계속해서 시도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알린다.
우리의 삶이 서사화될 때: 문학 작품으로 보는 변화의 분기점
시 - 알게 모르게 묻힌 부조리함과 폭력이 있는 세상을 다채로운 은유로 묘사한 좋은 작품들이 많이 보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세한 감정을 어루만지는 듯한 섬세한 구절들을 특히 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중 피해자의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을 내포하는 것과 동시에 반드시 더 나은 길(대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김주대 시인의 <로드킬 복수>가 특히 힘이 잔뜩 실려 있어 강렬했다.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 것, 잊지 않는다는 것은 불변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과거로 쌓인 현상을 발판 삼아 변화를 맞이, 실현하는 순간을 내포하고 있는 구절들은 수많은 상황 속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응원하는 듯하다.
소설 - 소설 부분에서 단편 세 편 모두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읽으면 필수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감상도 분명했다.
특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가까운 감정, "죄의식"을 다룬 소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너무나 친숙하게 다가왔다. 죄의식을 지배하는 쾌락, 금기 (범죄)의 영역에는 절대 닿지 않은 채 쾌락과 도파민에 몸을 맡기는 인물을 보며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이 일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부분을 아닐 거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죄의식을 동반한 쾌락은 왜 더 달콤하게 다가올까. 이러한 아이러니를 쭉 방치하고만 있어야 되는 것인가. 한동안 일상 곳곳에서 소설이 건넨 질문에 얽매여 있을 것 같다. 거대한 몸집과 상반된, 무력하게 생기 잃은 호랑이의 이미지의 잔상이 오랫동안 아른거렸다.
글을 쓰고,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 문학의 트렌드와 흐름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람으로서 문학 평론 부분을 가장 꼼꼼하게 읽었다. 시와 소설, 평론까지 각 분야에서 작가들의 다양한 시도들을 살펴볼 수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웠고, 유익했다. 욕망과 호기심으로 생겨난 세계가 텍스트를 통해 구체화될 때, 그 세상을 사유하며 탄생 되는 결과물들은 끊임없는 질문을 낳고, 방향을 추구한다. 발전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는 문학의 다양한 시도 속에서 앞으로 어떤 세상들이 새롭게 탄생될지 기대를 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