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 재발명’ 그 끝없는 길을 묻다
조르조 아감벤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난장 | 김상운·양창렬·홍철기 옮김 | 1만1800원
서울, 평양, 바그다드, 파리, 모가디슈,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어느 도시의 광장에서라도 좋다. “이 중 민주주의자 아닌 이가 있는가”라고 외쳤을 때 당당히 손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조지 W 부시, 자크 데리다와 에티엔 발리바르,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과 하마스 등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에 또 무엇이 남았을까?”(웬디 브라운)
민주주의의 의미와 지향점은 너무나 넓다. 모든 것을 뜻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대의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신세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는 명망 있는 여덟명의 지식인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민주주의를 죽인 자는 누구이며, 죽은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참여한 이는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다니엘 벤사이드, 웬디 브라운, 장 뤽 낭시, 자크 랑시에르, 크리스틴 로스, 슬라보예 지젝이다.

민주주의의 본뜻은 인민(demos)에 의한 통치(kratos)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된 민주주의는 과두정, 귀족정 등과 달리 자신이 지칭하는 정체의 구성원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인민에 의한 통치가 실행되기 위해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이며 조직은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끝없이 ‘재발명’돼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아감벤은 인민주권이 모든 의미를 상실했으며, 행정과 경제가 그것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통탄한다. ‘통치=행정부’라는 쉬운 공식 뒤에 권력, 정치의 의미를 캐기 위한 모든 노력은 필요없게 됐다. 바디우 역시 현대의 민주주의가 사실상 ‘보수적인 과두정’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을 지배하는 서구인들은 ‘정치적인 족내혼’을 통해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이들을 배제한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며 살고 있다고 믿는 성벽들의 성벽지기이자 상징”이라는 일갈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바깥의 ‘야만인들’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브라운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성인 인구의 10~20%에게만 허용됐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보면서 서구인들은 자신이 여전히 민주주의자라고 자위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닳고 닳아 내팽개쳐져야 할 단어일까. 랑시에르는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프랑스 지식인에게 민주주의는 텔레비전 앞에 주저앉은 슈퍼마켓 고객의 군림이나 다를 바” 없지만, 한국에서는 “국가기계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힘에 대한 어떤 생각 같은 것이 인민이 거리를 메우는 스펙터클한 형태(가령 촛불시위)로 옮겨지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건 여전히 의미 있다는 주장이다.
벤사이드는 ‘시장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조어에 대해 고민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번영을 누리던 서구 사회에선 의회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가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 “실제론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회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민주주의라는 부유하는 기표는 승리한 서구, 승리자 미국, 자유 시장, 왜곡되지 않은 경쟁의 동의어가 됐다.”
브라운 역시 “오늘날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기업과 국가의 권력이 교차하는 것 이상으로 융합되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전직 건설사 사장을 대통령으로 뽑은 한국도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지젝은 역사를 돌아보며 말한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고, 오히려 19세기 하층계급의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결과라고. (백승찬 기자 | myungworry@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