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와 18세기, 과학과 이성은 중세의 암흑기를 뚫고 인류에게 '이성의 승리' 또는 합리주의의 시대를 꽃피우게 해주었다.
그랬던 과학이 독재 국가건, 공산주의 국가건, 자유민주주의 국가건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비민주적이 되었고, 급기야 최근 들어 더욱 '계급적'이 되고 있다.
19세기 찰스 다윈은 어떤 조직체계나 보조금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한 많은 과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런 식의 자유와 독립성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과학 기금을 관리하는 각종 위원회는 과학 분야에서 무엇이 연구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이들 위원회의 힘은 정치에 아주 밝은 나이 많은 과학자들과 정부 관료, 대기업 대표들의 의사결정에 집중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실험 데이터 중 극히 일부만 발표한다. 그들 자신들이 사전에 설정한 가설에 적합한 결과만을 선별하여 발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기성 학계의 눈치를 살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표된 데이터가 채택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여과 과정을 거치는데, 첫 번째 여과는 실험자들이 결과들을 놓고 어떤 것을 발표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일어난다. 두 번째 여과는 학술지의 편집자들이 발표하기에 적합한 종류의 결과들만을 고려할 때 일어난다. 세 번째 여과는 공동 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데, 예상과 다른 결과들보다는 예상과 같은 결과들이 발표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고려된다.
이렇게 자기네들만의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검토하고 추천하고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혁신적인 과학이 탄생할 수 없다.
실제로 현대 과학의 주요한 업적들은 1970년대 이전에 이미 완결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솔직히 '답보상태'라는 의견도 많다. (기존 패러다임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주류를 형성한 과학자들이 스스로 '주류'임을 자부하면서 같은 주류 과학자들에게는 관대한 잣대를 적용하면서도 '초심리학'같은 특수분야에 대해서는 '이중 은폐법' 같은 엄정한 실험 기준을 가혹하게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그러한 기준을 통해서 도출된 실험 결과에 대해서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검토를 거부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기에, 일부 '주류' 과학자들의 교조주의가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다윈이나 아인슈타인은 어떤 연구단체나 보조금의 지원 없이도 패러다임을 바꾸는 이론을 밝혀내는 업적을 이루었지만, 모든 과학자들이 층층시하의 조직 내에서 '자리'와 연구 기금에 목매어 사는 지금의 시대에 제2의 아인슈타인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란 너무나 요원한 이야기다.
정통과 이단을 자기네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定罪)하며 기득권을 유지해나가는 모습은 어쩌면 과학이 그토록 싸워왔던 중세의 종교적 권위를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하여 루퍼트 셸드레이크는 경고를 던지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이상으로 과학을 보았을 때, 그것은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이끄는 지식의 행로였다. 과학과 이성은 맨 앞에 서 있었다. 이들은 멋진 이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며, 세대를 걸쳐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왔다. 이들을 나는 고양한다. 나는 과학과 이성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들이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라면. 하지만 나는 과학자들과 유물론적 세계관이 비판적 사고와 회의주의자들의 조사로부터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을 계몽할 필요가 있다." - 루퍼트 셸드레이크
(이상은 루퍼트 셸드레이크의 <과학의 망상>의 내용을 인용하며 나의 개인적 의견을 곁들여 서술한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