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대제는 도량형의 단위를 개혁하려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신장을 1카이저파덴, 자신의 체중을 1카이저첸트너로 해 모든 단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안만 되었을 뿐 실행되지는 않았다. 너무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문을 받은 당시의 재무경 클레페는 어떤 자료를 황제에게 정중하게 제출했다. 그것은 도량형의 단위를 개혁하려면 인류사회에서 쓰이는 모든 컴퓨터의 기억회로며 계기류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내용과, 그에 필요한 경비를 계산한 것이었다. 마침 당시 통화단위를 크레디트에서 제국마르크로 바꾼 참이기도 해, 자료에 늘어선 0의 숫자는 아무리 완고한 루돌프라 해도 주눅이 들 만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미터와 그램은 생존을 허락받았다. 다만 오늘날의 통설에 따르면 클레페의 계산은 명백하게 과장된 수치였으며, 한도를 모르는 루돌프의 자기신성화에 대해 온화한 것만이 장점이라고 여겨졌던 클레페가 말없는 반항을 감행한 것이라고 한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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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민중이란 본래 자주적 사고과 그에 수반한 책임보다도 명령과 종속과 그에 따른 책임 면제를 선호한다. 루돌프의 등장은 이를 다시 한 번 예증하는 것이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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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 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 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도 됩니다. 천체투영관에서 태양계 파트를 틀어주실 때,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설명하실 때 말해도 됩니다. 저기에 친구가 산다고. 갈릴레이의 위성 중 하나에 친구가 산다고요.
우리가 다시 만나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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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샤는 울고 있었다.
왜 이래 왕샤. 너 취했어.
우리 완벽히 졌어. 마이크 하나 제대로 훔치지 못했어.
울지 마. 마이크값 그거 얼마 하지도 않아.
망했어. 다 뺏겼어. 마이크도, 무용도, 아빠까지도. 내가 사랑하는 건 모조리 다 없어져버렸다고.
왕샤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빠, 아빠, 소리를 지르며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야, 뚝 그쳐. 너 서른다섯이야. 그런다고 아빠가 돌아오겠니.
아빤 죽었겠지. 다들 죽어 없어진 거겠지. 망해버린 거겠지.
아니, 그런 건 망했다고 하는 게 아냐. 완성된 거야. 너희 아버지는 성공한 인생을 완성한 거고, 왕샤 너는 현대무용이라는 꿈을 완성해버린 거고,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의......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P213

그건 도대체 뭔 춤인데.
현대무용입니다. 작품의 제목은,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이다.‘
왕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목이 좀 잘못됐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마치 샴페인 잔으로 건배를 하는 것처럼 소주병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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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엄마는 한껏 멋을 부리고 나의 시상식장에 나타났다. 엄마의 목둘레에는 무시무시한 퍼가 달려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B와 나는 그녀를 ‘레이디 스타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면에 ‘퀴어‘로 표현되었던 심사평과 달리 상패에는 ‘성소수자‘라고 인쇄되고 읽히면서, 나는 혹시 엄마가 그것을 알게 되었을까 걱정했지만, 시상식이 끝난 자리에서 엄마는 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효도 같은 걸 했다며 나의 친구들에게 농담을 던졌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문득이면서 필연적으로 이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가 잘 살아온 게 맞는지, 내 삶이 더 나아진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어졌다. 그건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 김봉곤, 그런 생활 - P146

"지죽지 말고. 어디 가서 기죽을 필요 없고. 미우나 고우나 내 아들이니까. 내 새끼다."
"응, 알았다 엄마."
엄마조차 용기를 내어 했을 말, 엄마니까 할 수 있었을 말, 하지만 엄마답지는 않은 문장들………에 나는 조금 감동을 하려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말은 영락없는 엄마였다.
"일단 저축을 해라 저축, 메이카 사 입지 말고."
- 김봉곤, 그런 생활 - P149

오히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녀와 나 사이에 또 한번의 다툼이 있었고 그것이 언제나처럼 해소되었다는 예상된 안도감에 가까웠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감상에 빠지는 대신 눈앞의 그를 바라보며, 엄마도, 나도, 서로에 대해 정말로 모르는 채 사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도 엄마도 때로는 상처가 될 만큼 진부한 말을 내뱉고 때로는 미칠 듯이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 김봉곤, 그런 생활 - P149

‘더 좋은 엄마가 될 준비가 된 다음에‘라는 표현이 부른 불쾌감과 별개로, 어머니의 그 말이 줄곧 내게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각은, 지금 해수의 선택에서 임신이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그래서 제동장치가 풀린 자동차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이 현재의 선택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알려야하지 않을까. 희진 언니의 말처럼 우리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선택지가 있음을 해수도 알아야 하지 않나.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거리의 무례한 전도자들과 다를 게 무언지 물어야 했고 그럼에서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동생이라면 몰라서 질주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수와 당신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만에 하나 그 말이 실수로라도 입 밖에 나온다면 그로 인해 나의 동생과, 다름 아닌 바로 당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는 않을지, 만약 그리된다면 어찌해야 할지,
그때의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 P183

"아저씨, 시비 걸고 싶으면 저기 담배 피우는 남자들한테나 가세요."
그 장면 안에서 지도위원이란 작자를 노려본 나는 뒷일 따위는모르겠다는 듯,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잔뜩 날이 선 말들을뱉어내고 있었죠. 언니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내 옆에 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집회나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언니에게 담배를 피우자고 보챈 것은 단둘이 보내는 그 짧은 시간이 내게 더없이 소중했기 때문이었음을, 언니가 턱을 들어 뿜어내는 연기 아래, 언니의 목이 그리는 곡선을 너무나도 좋아했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감정이 걷잡을 수 없어질까 여태 언니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했고, 병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언니와 멀어진 이유도 단지 내가 바빠져서가 아니라, 그즈음엔 이미 내가 아니더라도 언니 곁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임을. 이 어리석음과 유치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언니와의 만남을 더욱 꺼려했었다는 것도.
-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 P197

"내는 그냥 행복하고 싶더라. 언니야도 안 그렇나?"
해수의 물음에 나는 고갯짓을 멈추었지요.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눈은 다른 무엇이 아닌 다만 동의를 구하는 듯했습니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라며 머릿속을 울리는 메아리 끝에 문득 희진 언니의 억지웃음을 마주했던 때를 떠올렸는데, 어쩌면 나는 해수의 눈에서 그때의 나를, 가늠되지 않던 나의 얼굴을 가늠해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니와는 그날까지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었죠. 이럴 일이었나. 먼저 다가서려는 마음 없이, 그저 주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밀려들 즈음 해수가 고개를 살짝 숙였고 앞머리가 내려와 동생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럼. 나도 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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