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헬스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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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는 하늘을 유영하는 자연을 통해 인간 존재의 자유와 덧없음을 비추는 테마 앤솔로지이다. 소설과 시, 산문 곳곳에서 구름을 노래한 대목만을 섬세히 발췌해 묶었다. 한 문장씩 따라가다 보면 바람과 빛, 계절의 온기가 문장 속을 흘러가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삶의 호흡을 천천히 되찾게 된다. 짧은 발췌들이 느슨하게 이어지지만 구름이 건네는 무상과 자유라는 주제는 단단하다. 반면 이 느슨한 여백은 독자가 자신의 하늘을 끼워 넣을 자리가 되어 어느 순간 책과 하나 됨을 느낄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는 그가 쓴 작품 속에서 구름이 건네는 무상과 자유를 나타내는 부분을 발췌한 작품집이다. 단순하게 하나의 주제로 묶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생의 변화에 따른 시각의 차이를 현저히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작품 속에서 구름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철학의 변화까지 함께 느낄 수 있어 헤세의 작품을 읽을 때 더 넓고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참고서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책이 특별한 까닭은 저자의 관찰 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관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대상을 표면 그대로 감탄하며 바라보는 단계인 감각적·즉각적 관찰과 의미를 길어 올리며 스스로를 투사하고 구름을 삶과 존재의 은유로 읽어내는 해석·공감적 관찰이다. 이 작품 속 헤세의 시선은 단순한 심미적 감탄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 구름은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는 1차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곧 삶과 인간 존재를 비추는 상징으로 읽힌다. 그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 안에 스며든 무상과 방랑, 자유의 의미를 길어 올린다. 



이러한 두 번째 관찰은 대상을 바라봄과 동시에 해석하고 자신을 비추는 행위이다. 이 시선이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고착된 것은 아니다. 물론 천재적인 재능으로 인하여 일반인에 비하면 두 번째 관찰 방식이 남달랐으나 원숙함을 자랑하는 단계에서의 그와 비교하면 온전히 1차적 관찰로 보인다. 이런 시선에 그가 살아온 시간의 축적이 더해지면서 아름답고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 자신과 동등한 상황, 인간의 여정과 동일한 길을 걷는 모습의 구름으로 변한다.



이러한 점은 그의 초기작인 페터 카멘친트에서부터 노년의 대작인 유리알 유희에 이르기까지 확연하게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덕분에 독자는 책의 초반 여백에서는 그의 글에 자신을 가볍게 밀어 넣고 감각할 수 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오히려 행간에 자신을 밀어 놓고 그곳에 머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감각에서 사유로의 전환을 자신도 모르게 경험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가 세계대전을 겪고, 동양 철학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 밀도는 더욱 촘촘해진다.



헤세의 철학은 동양 사상과 불교적 사유를 접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무상과 공(空), 중도의 개념은 그의 문장 속 구름을 단순한 상징에서 벗어나 생멸과 순환, 존재와 비존재가 한 몸임을 깨닫게 하는 매개로 만든다. 구름이 오고 가는 모든 순간이 동일하다는 통찰 속에서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책의 후반에 가면 행간의 밀도는 더욱 촘촘해지지만 오히려 덧없음이 강하게 입혀지면서 독자는 무게감보다 가벼움을 느끼게 된다. 



이 삶의 태도 변화로 인하여 노년에 바라본 구름은 더 이상 멀리 있는 풍경이 아니다. 바람에 흘러가며 모양을 바꾸는 그 움직임 속에서 삶의 무게와 자유가 동시에 드러난다. 그는 구름의 이동을 통해 마음의 이동을 설명하고, 고독과 해방이 교차하는 인간의 내면을 고요히 포착한다. 더 나아가 어느 순간 그것을 바라볼 때 눈앞에 보이는 형체가 아닌 사라지고 난 이면을 보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가 살아 있지만 드러난 삶의 의미가 아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지닌 구름을 바라보고 있음을 독자는 느끼게 된다. 



이처럼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는 한 이미지가 한 인간의 생애와 사유를 어떻게 변주하는지를 증명한다. 구름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자유와 고독, 방랑과 화해가 겹쳐 있는 거울이며, 감각적 관찰에서 해석과 성찰로 이어지는 모든 변화를 품고 있다. 그가 평생 구름을 통해 길어 올린 통찰은 독자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는 일을 곧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일로 전환시킨다. 단순히 곁에 있는 존재가 아닌 인간의 삶과 의미를 같이 하는 존재로의 인식 전환을.



결국 이 책은 발췌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감각에서 사유로, 찬미에서 관조로 이어지는 그의 관찰은 구름을 따라 흘러가면서 인간과 세계의 무상함을 동시에 포착한다. 페이지를 덮은 후에도 독자는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되고, 변화하는 구름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시간을 조용히 재배치하며 삶의 속도와 방향을 다시 성찰하는 깊고 오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여운은 잠시의 감탄을 넘어서 일상의 사소한 순간까지 스며들어 걷는 길과 바라보는 풍경, 스스로의 생각까지 새로운 빛으로 비추게 만든다.



구름이 건네는 무상과 자유를 그리는 헤르만 헤세의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는 결국 한 인간의 삶과 사유가 구름이라는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헤세가 평생 하늘을 올려다보며 발견한 자유와 무상, 그리고 존재의 투명한 진실은 독자에게도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조용한 힘으로 남는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어지는 그 고요한 시선이야말로 이 책이 남기는 가장 큰 선물이다. 소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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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 2024년 타이베이국제도서전대상 소설상 수상작
탐낌 지음, 우디 옮김 / 엘릭시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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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엘릭시르에서 출간한 탐낌의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는 2024년 타이베이 국제 도서전 대상 소설상 수상작이다. 어두운 가족사에 얽힌 욕망과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영국령 시절부터 이후까지 홍콩 사회의 법과 정치,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진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런 이중의 선율로 인하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이지만 킬링 타임용이 아닌 진지한 문학 작품에 속한다. 화려하고 빠른 속도감은 없지만 문장 한 줄 한 줄이 전하는 풍자와 후반부까지 감도 잡을 수 없는 범인은 다른 의미로 독자들의 심장 박동을 가속화시킨다.


탐낌의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줄거리는 홍콩의 란타우 섬 끝자락 사이위의 쓰우 가문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매년 가족 모임을 열지만 코로나19로 사회적 격리로 이어지며 한동안 모이지 못하다가 이번에 다시 모인다. 성대한 연회는 가족의 장인 쓰우원후가 주도한다. 이들 가족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가문 내에서 가족의 장을 제외하면 남녀 모두 발언권이 없으며, 소수의 가족 때문에 모두가 자손 번창에 집착해야 한다.



이 의무만 지키면 이들은 평생 동안 경제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가문에서 재벌처럼 먹고살게 매달 생활비를 대준다. 그러나 이런 가족의 내력이 문제라고 느낀 쓰우즈신은 가문이 주는 생활비를 포기하고 자유를 택한다. 일부는 자유를 염원하지만 생활비 때문에 묶여 있으며 대부분은 자유를 염원할 의지조차 가지지 못한다. 이런 그들이 가지는 몇 년 만의 연회에서 온 가족이 몰살되는 범죄가 일어난다. 다행히 쓰우원후를 비롯해 다섯 명이 더 생존하는데, 과연 범인과 동기는 무엇일까?



어두운 가족사에 얽힌 욕망과 진실을 주제로 한 탐낌의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는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주요 스토리를 엮는 과정에서 과거 홍콩의 화려함을 단숨에 찢어버리고 그 민낯을 드러낸다. 성별·계급·부를 좇는 인간의 본성, 권력과 법의 정의, 가족의 개념 등을 사건의 동기와 수사 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 거칠고 생생한 폭로는 독자의 시선을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이제 이 모든 것을 살펴보기 전에 작품의 주제를 압축해 담은 인물들의 이름 속 의미부터 먼저 들여다보자.



이 작품에서 정면으로 드러나는 이름은 쓰우(司武) 가문의 원후(文𧆞), 즈신(志信), 즈이(志義), 그리고 집사 아더(Arthur)이다. 가족의 장인 쓰우원후의 이름은 말 그대로 힘을 다스리는 낡은 세계, 억압적 권력층을 상징한다. 이름만으로 이미 서사 속 전통의 쇠락과 청산되어야 할 구체제를 담고 있다. 신의를 지키는 즈신, 도덕적인 문제는 있지만 끝까지 옳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즈이,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집사는 Arthur가 아니라 ‘Other’로 남는다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름에 숨겨 넣은 위트가 드러난다.



작품이 가장 먼저 고발하는 것은 가족의 개념이다. 사랑 없는 혈연이나 혈연 없는 유대라는 단순한 대비를 훌쩍 넘어 이야기는 의도치 않게 ‘키메라’를 불러낸다. 키메라는 한 육체 안에 서로 다른 DNA를 지닌 존재를 뜻하며, 신화에서는 사자·염소·뱀의 형상을 함께 지닌 괴물로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탄 벨레로폰에게 쓰러졌다. 현대 의학에서도 이란성 쌍둥이가 태중에서 한쪽을 흡수하거나 골수 이식 등으로 타인의 유전자를 품게 될 때 인간 키메라가 생겨난다.



소설 속 쓰우 가문은 그 개념을 현실처럼 드러낸다. 혈통을 지키기 위해 여자는 남편을 데릴사위로 들여 그 성을 지우고 ‘쓰우’를 강제로 붙인다. 이 전통은 단순한 성씨 교체가 아니라 정체성과 과거를 덮는 폭력적 장치다. 서자로 버려진 아이, 범죄의 흔적으로 태어난 생명, 선택과 무관하게 ‘쓰우’ 아래 편입된 이들까지, 피라는 끈이 얼마나 잔혹하게 개인을 구속하는지 보여준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어디까지를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피가 이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



저자는 가문의 폭력을 독자가 더 뚜렷이 느끼게 하려 보육원을 등장시킨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서열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입양되려 연기를 하며, 어른에게 더 받기 위해 무조건 복종한다. 쓰우 가문을 축소한 이 공간은 재산만 없을 뿐 닮아 있다. 탐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를 위해 과감히 가문을 떠난 즈신과, 가문을 혐오하면서도 생활비를 포기하지 못하는 즈아이를 대비시킨다. 즈아이는 해외여행을 위해 끝내 복종하는 모순은 보육원 아이들의 무조건적 복종과 겹쳐 우리 모두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춘다.



작품은 홍콩 사회의 병폐도 날카롭게 고발한다. 미친 듯이 일해도 생활이 불가능한 화폐 가치와 왜곡된 사회 구조, 생존을 위해 범죄로 내몰리는 취약 계층의 현실, 그리고 그 범죄가 단순한 폭력을 넘어 사회 전체를 무너뜨리는 과정까지 집요하게 드러낸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정부가 제 역할을 잃을 때 벌어지는 참담한 풍경이자, 제도적 실패가 낳은 필연적 비극이다. 이는 명품 소비와 해외여행을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즈아이와 맞물려 자본이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품은 마지막에 사법 기관의 부패를 정조준한다. 국가가 만든 법이 이름만 남은 채 제 기능을 잃고, 바람 앞의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가는 진짜 사상누각이 된다. 그 빈틈을 파고든 경찰은 실적을 위해 범죄 단서가 없어도 스스로 범인을 만들고, 증거를 조작해 무고한 이를 30년 옥살이 시킨다. 권력자의 범죄에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시민들은 두려움에 침묵하며 그 부패를 방조한다. 탐낌은 이렇게 법과 정의가 동시에 무너지는 과정을 집요하고도 날카롭게 고발하며 독자의 마음속 깊은 분노와 허탈함을 동시에 일깨운다.


탐낌의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는 어두운 가족사에 얽힌 욕망과 진실이라는 미스터리의 외피를 두르고 자본, 사회, 법까지 뒤흔드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피와 사랑의 경계를 무너뜨린 쓰우 가문, 자본에 자신을 내맡긴 인물들, 그리고 부패한 법의 그늘은 우리가 믿어온 정의와 가족, 인간성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든다. 마지막까지 촘촘히 쌓인 단서들은 끝내 한 사람을 지목하며, 독자는 책장을 덮는 순간에야 비로소 범인의 얼굴과 그 동기를 마주한다. 그때 남는 것은 단순한 정답이 아니라 가족과 인간에 대한 깊은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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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 현대미술 - 21세기가 사랑한 예술가들
김슬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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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은 21세기가 사랑한 24인의 예술가들의 이야기이다. 한 번쯤 들어봤을 인물부터 매우 생소한 인물까지, 극 사실주의부터 극 추상주의까지 그 간극도 매우 크지만 그 내용은 현대인들의 심리와 사회적 고통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작품 설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애를 함께 짚어주어 작품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름다움과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고전과 달리 개성과 위로 그리고 사회적 고발을 담고 있는 현대미술의 매력에 빠져보자.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은 21세기가 사랑한 24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부터 현대미술의 거장까지, 사실주의에서 추상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작품 세계가 펼쳐진다. 1부에서는 니콜라스 파티, 플로라 유크노비치, 아드리안 게니 등 현재 가장 뜨거운 초현대미술 작가들이, 2부에서는 요시토모 나라, 게르하르트 리히터, 데이비드 호크니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등장한다.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따라가며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을 읽으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작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삶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로 각인되는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책은 작가들의 궤적을 짚어 작품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데 그중에서도 개인의 이야기가 그림을 어떻게 입체화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작품을 깊이 이해하려면 언제나 그 뒤에 선 인간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림은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작가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캐나다 출신의 매튜 웡이다. 1984년에 태어나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페이스북 시대의 반 고흐’라 불린다.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해 SNS를 통해 주목받았으나, 자폐증과 우울증, 투렛 증후군을 안고 살았다. 결국 요절했지만, 사후에는 천재로 각인되었다. 그의 그림에서 차분하고 공허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삶의 궤적과 맞물려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림과 인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강하게 증명해 주는 사례로 읽힌다. 그의 비극은 곧 작품의 문법이 되었다.


특히 그의 우상이 반 고흐였다는 점은 더욱 상징적이다. 2024년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와 함께 전시된 장면은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현대미술은 종종 작품 그 자체보다 작가의 개인사와 비극적 운명이 열쇠로 작용한다. 웡의 삶과 그림은 고흐를 닮은 비극의 반복처럼 읽히며 관객에게는 작품 해석의 또 다른 통로를 제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미술은 고전과 달리 스토리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그림만 본다기보다 그림을 둘러싼 이야기를 함께 본다.



그와 얽힌 또 다른 화가는 스콧 칸이다. 그는 70세가 넘도록 사촌의 다락방에서 그림만 그리며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왔다. 매튜 웡이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면서 칸은 단숨에 스타 화가가 되었다. 인터뷰 속에서 그는 “세상 누구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매튜가 내 삶을 바꿔주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예술의 우정과 연결이 지닌 힘을 감동적으로 드러냈다. 두 예술가의 관계는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선 서사로 남았고, 예술사에 작지만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이 일화는 동시에 현대미술이 자본과 시장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드러낸다. 한 사람의 시선이 예술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현실은 따뜻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남긴다. 칸의 삶은 해피 엔딩처럼 보이지만, 그 기회가 특정한 계기로만 열렸다는 사실은 질문을 남긴다. 결국 이 책은 예술가의 이야기 속에서 현대미술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비추고 있었다. 예술은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자본의 질서 안에서 철저히 움직이는 구조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킨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 Unknown Pleasures 〉이다. 알려지지 않은 기쁨이라는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책 속에 이 작품에 대한 직접 해설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서사와 포개어 보면 여러 가지 연상이 떠오른다. 혜은이의 노래 ‘파란 나라’, 동화 ‘파랑새’ 같은 이미지가 자연스레 스쳐 간다. 작품만 놓고 본다면 화면을 가득 메운 푸른빛은 우울과 고독의 상징이지만 그 끝에는 희망의 그린, 생명의 그린, 빛의 그린이 기다린다. 현재의 고통을 넘어서는 길 위에서 결국 기쁨을 향한 작은 확신이 스며들어 오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 그의 삶을 대입하면 풍경은 달라진다. 힘들고 불행한 삶 속에서도 타인에게는 행복을 전해주었던 예술가의 모습이 겹쳐진다. 저 멀리 빛과 생명의 그린으로 채색된 공간은 막상 다다르면 다른 풍경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착시를 자주 경험한다. 붉은 노을이 번진 서해에 도착했을 때 그 땅은 여전히 무채색의 현실을 내뿜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작품 앞머리를 차지한 파란 영역, 지금 이곳이야말로 진짜 행복의 자리일 수 있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늘 가까운 발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또 다른 층위로 본다면 그는 현재의 우울한 길을 서둘러 걸어 마지막 눈 덮인 산을 넘어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염원, 곧 고통을 끝내려는 욕망으로 읽힌다. 이처럼 같은 그림이라도 작가의 삶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른 채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의 비극적 현실을 떠올리는 순간 단순한 풍경은 곧 내면의 고백이 되고, 색채는 존재의 목소리를 품는다. 결국 이 작품은 “알려지지 않은 기쁨”을 말하는 동시에 그것을 끝내 붙잡지 못한 예술가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21세기가 사랑한 24명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는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은 개별 화가의 이야기와 그들의 작업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예술이 결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작품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사회적 맥락이 켜켜이 스며든 이야기이다. 이 책은 단순히 미술가의 삶을 엮은 기록이 아니라 21세기 현대미술이 놓인 자리를 비추는 작은 지도이기도 하다. 고전과 다른 맛의 현대 그림 너머를 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 번쯤 펼쳐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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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고쇼 그라운드
마키메 마나부 지음, 김소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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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일본 판타지 소설이다. 일반적인 판타지에서 현재 인물이 과거와 미래로 이동하는 설정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과거 인물들이 스스로 현재로 넘어온다. 책 속에는 두 갈래 이야기가 등장한다. 겨울 마라톤에 참여한 여고생과 한여름 야구 경기에 뛰어든 대학생. 얼핏 계절적 대비처럼 보이지만, 두 이야기는 청년과 교토라는 일본의 근간을 매개로 하나로 포개지면서 오히려 더욱 풍성한 서사를 빚어낸다.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 줄거리는 두 개이다. 첫 번째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내리는 날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여고생 사오리. 후보 선수였던 그녀는 선배의 사정으로 출전하게 된다. 그녀는 달리는 동안 인도에서 함께 달리는 에도 막부 말기에 활동했던 신센구미들을 보게 된다. 두 번째는 갑자기 친구 다몬의 요청에 의해 야구 경기에 참여하게 된 구치이. 사실 그는 여자친구와 여름 방학을 보내려 했지만 직전에 차여 숨 막히는 더위를 자랑하는 교토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야구 경기에 참여한 구치이는 인원이 부족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는 이들 덕분에 아홉 명을 맞춰 경기를 진행한다. 같은 학교 선배 샤오가 나타나기도 하고, 야구를 구경하던 샤와무라 에이지, 엔도 미요지, 야마시타 세이치까지 갑자기 합류한다. 그러다 야구를 공부하던 중국 유학생 샤오에 의해 이들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때 청년이었으며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징병되어 전사했다는 것. 이들은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 함께 야구를 하게 된 것일까?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일본 판타지 소설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제목에서 이미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고쇼는 과거 천황이 살던 황궁과 땅이라는 의미이다. 즉, 작품 명에서 현재 발을 디디고 사는 땅 위에 일본의 천년 고도라고 하는 교토의 천황이 살던 황궁을 얹어 놓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평범한 청춘의 장면이 과거 고쇼의 의미, 즉 역사와 권위, 오래된 기억의 무대 위에서 펼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현재의 경기장이 과거의 궁궐과 포개지면서 시간과 기억이 겹쳐지는 판타지적 효과를 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순히 에도 막부에서 곧바로 현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센구미는 에도 말기에 정통 사무라이가 아닌 자들로 이루어진 황제 호위 조직이다. 그들이 들던 깃발에는 정성 성(誠)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 집단이 스스로를 진심이라는 미덕으로 정당화하려 했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신센구미의 깃발은 권력과 폭력 속에서 ‘진심’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아이러니하게 소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시대적 배경으로 2차 세계대전 말이 등장한다. 일본 야구의 전설이자 메이저리그에서도 눈독을 들였던 사와무라 에이지를 비롯해, 당시 대학생이던 수많은 청년들이 강제 징집으로 원래의 꿈뿐 아니라 삶 자체를 빼앗겼다. 작품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은 몇 명뿐이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매번 이런 식으로 경기에 참여해 왔던 다른 이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최소 인원인 아홉 명이 언제나 어떻게든 채워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두 이야기는 에도 막부 시대, 군국주의 시대, 그리고 현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층위를 교토 고쇼라는 무대 위에 겹쳐 놓는다. 세 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청년이며, 열정과 꿈을 품었지만 시대의 폭력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내몰린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결국 작품은 청춘의 빛남과 시대의 폭압이 교차하는 아이러니를 고쇼라는 장소와 야구와 마라톤이라는 경기를 통해 선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망자들이 청춘의 현장 속에서 함께 숨 쉬는 순간 독자는 단절된 시간을 넘어 이어지는 일본사의 무게를 체감하게 된다.



작품 속에는 한국인 독자에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8월 15일 종전 다음 날 열리는 오쿠리비다. 소설에서는 이 의식이 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행사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원래 오쿠리비는 본래 오래된 불교·민속 행사로 일본 패전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단지 날짜가 우연히 겹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종전 직후의 영령 추모와 겹쳐지금의 의미가 되었다. 이 때문에 작품 전체의 메시지가 오쿠리비 장면에 가려지는 경향이 생긴다.



이 작품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도, 사무라이도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슴속에 열정의 불을 지닌 청춘들이 강제로 삶을 중단당했다는 사실이다. 천황에게 진심을 맹세하고도 일류 사무라이로 인정받지 못했던 청년들 역시 달리고 싶었고, 국가의 징집으로 생명을 빼앗긴 청년들 또한 그저 야구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 청춘들이 품는 소망. 즉, 달리고, 던지고, 웃고 싶다는 그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고 끝까지 타오르는 것.



나오키상을 수상한 『8월의 고쇼 그라운드』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판타지적 장치가 전혀 가볍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령처럼 나타나는 과거의 인물들은 단순히 색다른 볼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 온 청춘의 상실을 눈앞에 불러온다. 소설은 교토라는 장소에 역사의 켜를 겹쳐 놓고, 달리기와 야구 같은 평범한 행위를 통해 청춘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동시에 얼마나 쉽게 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순간 독자는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경계가 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특정한 역사와 배경을 넘어 청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달리고 싶고, 공을 던지고 싶고, 웃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다는 것. 이 판타지 소설은 바로 그 단순하고 뜨거운 소망이야말로 가장 오래 살아남는 힘임을 일깨운다. 지금 청춘의 길을 걷고 있는 이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미소 짓는 이도 모두 기억 속 판타지로 빠진다. 현실에 지쳐 마음속 소망의 불씨가 꺼진 이에게 다시 불을 붙여 주는 세계, 그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판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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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퍼시벌 에버렛 지음, 송혜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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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해문 클럽 첫 선정작은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이다. 이 작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속 헉의 동행자 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며, 2025년 퓰리처상을 거머쥔 화제작이다. 더불어 유니버셜 픽처스에서 영화화 계약까지 체결되어 머지않아 스크린에서도 만나게 될 예정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1부는 원작의 흐름을 따라 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2부와 3부에서는 원작을 비틀어 에버렛만의 시선을 펼친다. 따라서 1부는 원작과 2~3챕터씩 교차해 읽으면 보다 선명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 줄거리는 원작처럼 각자의 사정으로 집으로부터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는 단순히 짐의 본래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훨씬 깊은 의미를 품는다. 영어권에서 제임스는 흔히 어린 시절의 친근함과 귀여움을 담아 짐이나 지미라 부른다. 그러나 이 애칭이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게까지 고착된다면 그것은 친근함이 아니라 정체성의 축소로 변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속 짐은 자유를 얻고도 끝내 짐으로만 남지만, 이 작품 속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 제임스라 선언하며 주체성을 확립한다. 그 순간 독자는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미 밝혔듯이 이 작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침묵을 요구받은 짐에게 모든 발언권을 준 작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작의 짐이 가진 생각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독자가 알아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을 뿐.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목소리로 진행되어 노예 짐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가진 어른으로서의 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노예이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을 품을 수 있으며, 관대함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드러낼 수 있다.



이 작품 속 짐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판사의 서재에서 철학서를 몰래 훔쳐 읽기도 한다. 물론 이런 설정은 시대적 사실성과 맞지 않아 일부 독자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연민의 대상으로만 이해되던 인물이 철학적 언어를 던지는 순간 그 간극은 시대적 이질감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거리를 좁히는 경험으로 변한다. 즉, 이 장치는 그 시대를 살지 않은 현대 독자에게 짐을 더욱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에버렛의 기묘한 장치로 기능한다.



작품 속 예로 헉은 짐에게 알라딘 램프의 지니에게 빌 소원에 관하여 물어본다. 이때 당연하게 가족과의 만남과 자유를 요구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그는 두려움으로 소원 빌기를 거부하며 '철학자 키르케고르라면 무슨 소원을 빌까?'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 순간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짐의 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먼저 여러 부분에서 키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그가 왜 이 철학자에게 사로잡혀 있는지 살핀 후 소원 빌기를 거부한 이유를 알아보자. 



키르케고르는 실존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인간의 불안과 선택, 그리고 신 앞에서 홀로 서는 단독자를 강조했다. 짐이 이 철학자에게 매료된 까닭은 노예라는 신분으로 늘 불안 속에 놓여 있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바꿀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감히 빌 수 없는 상황은 키르케고르가 말한 불안과 도약의 문제와 겹쳐진다. 따라서 소원을 거부한 그의 태도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존재가 선택 앞에서의 불안을 드러낸 것이다.



또 다른 장치로 짐은 겉으로는 백인들이 강요한 흑인 방언을 흉내 내지만, 내면 서술에서는 정제된 언어와 사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의 이중 구조는 언어 권력의 힘을 말한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박탈하는 것은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사회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챙길 수 있는 첫 단계를 거세하였다. 에버렛은 원작에는 없는 언어의 이중 구조 장치를 도입하여 발화 권력의 불평등을 드러내고 백인들의 편의로 지워졌던 평등을 작품 속으로 불러온다.


에버렛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질문은 노먼과 또 다른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먼은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다른 인물은 백인 어머니에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은 모두 백인의 외형을 지녔다. 두 사람 모두 백인의 외형을 지녔지만 전자의 경우 자녀 역시 변명할 여지없이 노예가 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어머니의 노력에 따라 완벽한 백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흑인이기에 인간이 아닌 노예라면 같은 외모를 지닌 백인은 그 뿌리를 모를 때 어떻게 인간과 노예로 나눌 수 있는가?



이를 노먼이 완벽하게 재연한다. 그도 도망자인 노예 신분이지만 그는 다른 주에서 백인으로서 대우를 받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 다른 인물은 자신의 주에서도 다른 주에서도 언제나 백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 저자는 이 아이러니를 통하여 피부색에 따른 신분제의 허상을 고발한다. 또한 노예제의 폭력성이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을 구분하는 시선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역사 속에 묻힌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다름의 시선으로 폭력을 느끼는 존재는 현대에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2025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는 단순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재해석한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에버렛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장치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넣음으로써 작품을 19세기에서 21세기로 불러내고, 그 결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장을 내민다. 말로는 다양성을 외치면서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과 멸시가 이어지는 현대 사회는 노예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작품이 던지는 차별에 대한 메시지는 충격적이게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겨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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