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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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과학 소설이라고 하여 관심이 갔던 벵하민 라바투트의 매니악. 작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은 후 지속적으로 과학 관련 서적을 읽고 있는 나로서는 소설로서의 과학이 무척 궁금하였다. 게다가 근래에 시간과 우주론 그리고 시뮬레이션에 관련된 양자물리학 책을 읽은 후여서 더 궁금하였다. 덕분에 생소한 분야에 발을 담가서인지 아는 만큼 많이 본다는 말을 이번 책만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이 책에 덧붙여진 닉네임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이다. 이 별명은 읽기 전부터 독자로 하여금 픽션과 논픽션이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지 매우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책의 절반을 읽는 동안 어느 것이 허구인지 어느 것이 사실인지 전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등장인물과 사건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읽으면서 과연 이것이 소설이 맞을까 하는 의문을 놓지 못할 정도로 허구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알파고와 바둑 대결을 한 이세돌 편에 오면 드디어 어떤 것이 허구인지 감이 잡힌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의 필력에 의해 독자는 마구잡이로 휘둘리며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가 마지막에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랄까. 쉽게 설명하면 우리나라 대하드라마와 비슷한 결이라고 보면 된다.



책의 처음은 꽤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존 이론물리학자이며 네덜란드 레이덴대학교 이론물리학과 학장을 지낸 파울 에렌페스트가 양자물리학을 처음 접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삶을 포기하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주인공은 자신이 아는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오히려 인정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성적이라는 단어와 동급으로 취급하던 물리학에 논리적인 동시에 비이성적인 양자물리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양자물리학을 아주 조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울 에렌페스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부부터 굉장히 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문장에 스쳐지는 과학자부터 비중 있게 등장하는 과학자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아인슈타인부터 들어보지도 못한 인물까지. 덕분에 읽으면서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열심히 검색하면서 읽어 지식의 층을 조금 더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기존에 SF 과학 영화나 SF 소설, 일반교양 과학 도서를 접해본 분이라면 읽으면서 이미지가 그려져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양자물리학의 등장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조니 폰 노이만의 최초의 컴퓨터를 진화시켜 만든 매니악 얘기로 넘어오면서 더 발전하고 성장한다. 맨해튼 프로젝트 얘기로 넘어가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리처드 파인만이 등장한다.


"기폭 장치를 집어넣는 구멍들은 테이프로 덮여 있었는데, 흰색 테이프가 십자가 모양으로 붙어 있어 꼭 붕대 같았고, 결과적으로 폭탄의 생김새는 다쳤든지 두들겨맞았든지 해서 부서지기 직전에 겨우 꿰매 붙인 프랑켄슈타인의 작은 괴물 같았다."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p.151



글 중에 리처드 파인만이 맨해튼 프로젝트의 첫 원자폭탄 실험 때 폭탄을 보고 묘사한 것이다. 물론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아직도 구분이 안 간다. 그러나 원자폭탄의 위력을 생각하면 프랑켄슈타인의 작은 괴물이라는 표현이 너무 꼭 들어맞는 것 같아 이렇게 소개한다.



책의 대부분은 우리가 흔히 미래에서 온 남자로 부르는 조니 폰 노이만을 주변인이 본 시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가 노이만과 당대의 과학자들을 다 만나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것이 아니니 꽤 많은 허구가 섞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계를 소설 안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다. 주변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된 노이만은 히틀러와는 또 다른 결을 가진 통제광이었다. 무엇이든 본인이 이해해야만 했고 기술적으로 통제가 가능해야만 했던 노이만이었다. 심지어 생물학에도.




"수학이나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이라는 영역은 여전히 논리의 손길 바깥에서 우리가 길들일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우연과 혼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생물학적 존재들은 정신없이 복잡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이해 못 할 리듬 안에 갇힌 채, 경이로운 무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그와 같은 조화로 형성되고 움직이다. 고통스럽지만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이 단순한 진실이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어떤 대상을 통제할 수 ㅇ벗고 이해할 수 없으면 그는 격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대상이었다."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p.247




여기서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만약 노이만과 히틀러가, 노이만과 스탈린이 손을 잡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민주주의와 손을 잡은 노이만이었지만 그 결과는 딱히 독재자와 손잡은 것과 큰 차이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인격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조니 폰 노이만은 천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는 심지어 현재의 AI, 그리고 앞으로 진화할 AI에 대해서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알파고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무력감과 공포감을 느꼈던 거다.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으니까. 이 승리는 우리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증거다. 시간이 지나면 AI를 이기기가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승리······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p.390



이 책의 의의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성향과 이들의 활약이 아니다. 과학의 발견과 발전으로 인해 인류가 현재에 다다른 AI 자체와 이것으로 인한 앞으로의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문제점을 던져주는 것이다. 마지막 얘기에서 알파고와 대결한 이세돌의 인터뷰로 인하여 책은 다시 처음 양자물리학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파울 에렌페스트에게로 돌아간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 창의력을 발휘하여 진화하는 AI를 비롯하여 두려움을 가진 과학 분야를 어떻게 대하며 앞으로 어떻게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말이다.



"이번 경험으로 많이 배웠습니다. 얻은 교훈으로 더 발전할 겁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인간이 창의적이라 생각했던 수들을 알파고가 관습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둑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하 생략."

매니악 벵하트 라바투트 p.396



벵하민 라바투트의 매니악은 과학적 지식이 있으면 조금 더 깊게 이해가 가능하며, 없더라도 이해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과학 소설이지만 작가는 과학적 내용보다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으로서의 철학에 대하여 메시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AI가 인류를 역으로 공격하는 영화나 소설을 우리는 자주 접했다. 이제 이 문제가 단순히 화면 너머의, 종이 안의 활자로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님을 작가는 마지막에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린다. 그러면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만 하여야 할까? 이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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