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암살자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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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란에 올라오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진다. 망자 스스로가 유명했거나, 아니면 유명한 사람과 관계되어 있거나. 전자도 후자도 아닌 보통 사람들의 죽음은 대부분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죽음이 기사화되기에는 부고란에 주어진 지면이 너무나 한정적이다. 한정적인 지면에서는 으레 드러난 부분들을 다루게 된다. 최소한의 입력이 최대한의 출력이 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지극히 경제적인 방식들로 말이다. 유명세가 부고란 입성의 잣대가 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부고란에서는 이미 공공재가 되어있던 삶들이 다시 한 번 공공재가 되어버릴 죽음으로 포장된다. 머지않아 소비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망자의 동의는 생략한 채로. 보통은 이런 문장들로 시작된다. 

25세의 로라 체이스 양이 5월 18일 오후 서쪽으로 운전하던 중 차가 다리 위 공사 지를 보호하고 있던 방벽 사이로 빗나가 다리 아래 협곡으로 추락한 후 불길에 휩싸였다. 체이스 양은 즉사했다.


아니면,

아이리스 체이스 그리픈 부인은 지난 수요일 향년 83세로 이곳 포트 타이콘드로가에 있는 자택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라든가.

죽음의 명시 이후는 망자가 남긴 업적과 피붙이, 연인의 존재에 대해 서술되기도 하고, 뒤따르는 의혹과 가십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수 십 년의 삶이 한 페이지의 토막 기사로 갈무리된다. 사람들은 그런 부고를 읽는 데 2분? 아니 빠르면 단 몇 십초 정도를 머무를 뿐이다. 망자를 애도할 틈이 없다. 하긴 요즘은 검은색 근조 리본(▶◀) 조차 Ctrl + C, Ctrl + V로 해결하는 시대니까.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구식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25세 로라 체이스와, 83세 아이리스 체이스의 죽음. 운 좋게도(?) 두 사람은 모두 부고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어려서는 지역사회를 지탱하던 체이스 가의 일원이었고, 자라서는 신흥 자본세력인 그리픈 가에 종속되어 살았다. 어찌 보면 그들의 배경에는 자본이 늘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고만 읽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두 사람 다 안타깝긴 한데, 그래도 나름 잘 살다 갔네. 부족한 게 뭐가 있었겠어. 그저 운전은 좀 조심하지..." 질투 반 동정 반 정도의 마음이랄까? 아마 나조차도 그랬을 것이다.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을 끝끝내 읽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소설은 부고를 읽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소설과 부고 양쪽 모두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었지만, 소설을 읽는 쪽이 몇 백 배는 더 소모되었다. 시간도, 마음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많은 물음표들 모두. 아이리스는 자신의 삶이 평범한 부고로 점철되길 바라지 않았다. 홀로 남은 노인은 초연한 듯 초연하지 못했다. 지독하리만큼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데 몰두했다. 회고하고, 소설을 썼고, 또 소설 속 인물의 손을 빌려 다시 한 번 소설을 썼다. 어쩌면 손녀 사브리나에게는 잠깐의 흥밋거리조차 되지 않았을 가족의 역사에 대해 기록했다. 은유하고, 은유하고, 다시 은유했다. 훗날 누가 읽게 되더라도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깊은 늪과 같은 구조 속으로 자신을 파묻었다.

이 모든 기록이 로라의 죽음에 대한 부채의식을 덜어내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완전 무결함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끝내 이 소설 속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것으로 나는 읽었다. 확신한 것은 한 가지뿐. 아이리스, 그가 죽음이라는 장면에 다다르게 되기까지 허투루 쓰인 글귀는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가? 나 자신을 위해서? 그건 아니다. 나중에 이것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이니까. 미래에, 내가 죽은 이후, 어떤 낯선 사람을 위하여 쓰는 것인가? 내겐 그런 야심, 소망이 없다."

덧) 이 문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린 모두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우리가 죽고 나면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이야기를 저마다 안고 살아간다. 부고는 절대 그런 이야기를 써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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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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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좋던 목요일 오후, 한적한 정릉에서 『아이네이스』를 읽었다. 조선 왕후의 무덤 옆에서 읽는 로마 조상의 이야기라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전지전능한 유피테르 신도 이 동네까지는 관할하지 않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일본어 수업이 끝난 토요일 오후에는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베이비 드라이버」를 봤다. 팝콘 뮤비였다. 나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어폰을 끼고 싶어졌다. 아이팟 대신 노트 5, 선글라스 대신 부릅 뜬 눈빛으로 스텔라장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계륵」, 「환승입니다」, 그리고 다시 「계륵」. 그 단순한 패턴이 일주일이나 갈 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다시 토요일, 홍대 와우북 페스티벌에 갔다. 부스에서 일하는 지인을 만나 셀카를 찍었다. 하나, 둘, 셋, 찰칵. 분명 숫자는 내가 카운트했는데 사진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지인이 아니라 나였다. 추가 촬영을 몇 회 더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나와 지인은 다음을 기약했지만 정확히 30분 뒤 그 셀카는 단톡방을 떠돌게 되었다. 셀카 따위...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부스에서 사온 찰스 부코스키의 시집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을 펼쳐봤다. "just drink more beer. more and more beer.", 아직 술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던 시간. 유독 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부코스키의 문장으로 블로그 상태 메시지를 바꿔버렸다. 그 사이 602번 버스는 drive through hell. 달리고 달려 기자의 방으로 향했다. 맥주 대신 위스키와 포트와인을 마셨다. 싸구려 방에서는 제아무리 비싼 술을 마셔도 싸구려의 맛이 났다. 벌컥 벌컥 마시다 보니 열 시도 못 넘기고 잠들어 버렸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부남이 되어버린 은행원만이 집에 돌아가야 했기에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가 증거로 제출한 사진 속에서 나와 기자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굴욕적인 사진을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나는 술을 마시면서 자꾸만 "おまえは~"를 외쳤다고 한다. あなた도 아니고 おまえ라니. 부끄럽다.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다시 일주일. 연휴 전 마지막 일주일은 『눈먼 암살자』 1권을 들고 다녔다. 월 화 수 목 금. 5일을 들고 다녔고, 6일째인 토요일. 오늘은 몇 페이지 넘겨볼 수 있었다. 분량이 2권 이상 되는 영미소설에는 언제나 최소 삼대 이상의 스토리가 펼쳐진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주인공. 때로는 이웃집 아저씨나 고모나 보모들까지. 가계도와 가풍이 파악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초중반이 고역이다. 꾸역 꾸역 그 구간을 넘기면 그때부터 꿀잼이고. 일본어 과외가 끝나고 홀로 남은 삼성역 스타벅스에서 읽다 졸다를 반복했다. 282페이지까지 도달했을 때, 일곱 번째 줄에서 『아이네이스』를 발견했다. 릿터 7호의 인터뷰에서 『아이네이스』가 『눈먼 암살자』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라고 했던 한 줄이 내 핸드폰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2주 전 『아이네이스』를 먼저 읽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아이네이스』의 어느 부분이 모티브가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한 권은 다 읽고 카페에서 나오려고 했는데, 오늘은 5시가 마감이었다. 연휴라서 그랬던 건가. 잘 모르겠다. 가방으로 되돌아간 『눈먼 암살자』를 언제 다시 꺼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민나노 日本語』 3권의 옆자리에서 다시 만날 날까지 편히 잠들어 있기를.(아마도 다음 토요일까지)


몇 주 전 『모든 요일의 기록』 독후감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모든 요일마다 한 줄씩 끄적여서 완성시켜 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자주 읽고, 매일 듣고, 이따금 찍고, 종종 배운다. 김민철 작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들을 모아서 쓰면 자연스레 이 책과 같은 독후감이 나오지 않을까? 심지어 기억력 측면에서는 작가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니까 어쩌면 더 나은 상황이 아닌가? 뭐, 대충 이런 망상들. 하지만 모든 요일의 경험은 고스란히 모든 요일의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했다. 기록하지 않은 것들 중 대부분은 끝내 '기억나지 않음'으로 기록되었다. 복원되지 않았다.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재구성한 결과가 저 위의 잡문이다. 손가는 대로 끄적이고 난 글을 쭉 다시 읽어 봤다. 콕 집어 뭐라 설명은 못하겠지만 참 한결같은 취향이 보인다. 구질구질한 독서들. 그나마도 토요일 위주로. 그러고 보니 블로그에 글을 잘 남기지 못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 자연스레 방문자 수가 줄었고, 이웃 수도 줄었다. 늘어나는 건 스팸 쪽지뿐이다. 녹색양말님 b★log를 매※입하고 싶은데요. 블라블라, 팔면 200만 원이란다. 됐고, 아무튼 잘 쓴 에세이. 잘 쓴 독후감의 요인은 뭘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잘 쓰는 작가를 따라서 무작정 기록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렇게 몇 자만 끄적여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A가 쓴 글을 읽고 나면 A라는 사람이 떠올라야 한다. 아니면 A를 드러내는 키워드라도. 『모든 요일의 기록』을 읽고 나면, 한 평생을 바르게 자라온 사람이 떠오른다. 이 사람은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혼자서 열심히 동기부여하면서 매 순간을 헤쳐나간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끄러움이 많지만 뻔뻔하기도 할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김민철 작가의 캐릭터가 하나, 둘 그려지고 있었다. 내가 그려낸 캐릭터는 당연히 작가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다음 문장을 읽게 만드는 것도 내가 그려낸 그 캐릭터다. 그래서 독자에겐 캐릭터가 전부가 된다. 김민철 작가는 자신의 캐릭터를 대놓고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달리 카피라이터가 아니었다. "에이, 말도 안 되잖아. 너무 오글거리는 거 아니야?",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그러다가 다음 책 『모든 요일의 여행』도 샀다. 언제쯤 꺼내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문득 '모든 요일의 OO' 시리즈가 어디까지 나올지도 궁금해졌다. 잘 쓴 에세이를 더 많이 읽고 싶다. 그 안에서 잘 다듬어진 캐릭터들과 조우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 다듬어진 블로거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위대한 작가나 위대한 독자는 아니더라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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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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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정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멀어도 좋지 않지만, 너무 가까워도 좋지 않다. 사람 사이의 문제는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질 때보다는 가까워질 때 더 많이 발생하고, 그래서 우리는 거리를 둔다. 객관적, 이성적 판단이 가능한 위치를 유지하려 애쓴다. 제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삶은 적정 거리 안쪽 (스스로 제어 가능한) 세계와, 적정 거리 너머  (외부 요인에 의해 흘러가는) 세계 간 영토 분쟁의 연속이다.

피아식별은 놀랍도록 빠르게 이루어진다. 침입자가 자신의 영역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걸 용납할 사람은 많지 않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는 한없이 사람 좋던이라 할지라도 확신할 수 없다. 사람들 중 일부는 타인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급격히 부산해지기도 하고 예민해지기도 한다. 타인의 접근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벽을 허물어버리기라도 할 듯 두려워한다. 최악의 경우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벽을 지켜낸다. 이 경우 법은 폭력이 행해진 이후, 즉 사건에 대해서만 문서대로 판단한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으로 남는다. 적정 거리 바깥에서 보았던 사람과 적정 거리 안쪽에서 마주친 사람, 어느 쪽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OOO은 절대 그런 사람도 아니고,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이 없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럴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때마침 OOO이 그런 사람일수도 있다. 나 자신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절대적인 믿음이란 섣부른 이야기다. 혹은, 무관심의 변명일 뿐이거나. 이도 저도 자신 없다면 차라리 OOO과 나 사이의 적정 거리를 가늠해보는 쪽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적』은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와 살인자 장클로드 로망 사이의 거리감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1993년 한 가장이 자신의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 내 목소리 대부분이 사건의 가해자인 장클로드 로망을 악마, 싸이코패스로 몰아가는 가운데.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는 악마가 아닌 사람 장클로드 로망의 실체에 대해 추적해나간다.

거짓의 거짓으로 둘러싸인 로망의 실체만큼이나, 이 책의 장르 역시 단정 짓기 쉽지 않았다. 문학과 다큐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듯. 카레르는 분노나 경멸, 동정과 연민 등 그 어떤 감정의 개입 없이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글을 써 내려간다.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를 시청하는 기분으로 읽어 나갔다. 카레르와 로망 사이의 거리를 나와 애인 사이의 거리로, 업체와 업체 사이의 거리로, 댓글과 댓글 사이의 거리로, 내 머리와 마음 사이의 거리로 무수히 치환해볼 수도 있었다. 각자의 세계에서는 이해받지 못할 일이 없었고, 각자의 세계 밖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넘쳐났다. 의심하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몇 가지 일들은, 의심하는 그 순간 진실이 되어 내 눈앞을 아른거렸다.

소설에서 인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대체적으로 소설의 결말은 어두워진다. 여름의 끝자락은 조금 더 밝은 소설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꿉꿉보다는 드라이한 불쾌함과 허무함. 그리고 끝에서 따라 올라오는 혼탁함 정도를 테이스팅 노트에 끄적여 본다. 민성님이라면 이런 느낌의 칵테일을 제조해줄 수 있으려나.

P.S. 1.

7년이 지나 발표한 『적』의 후속작 『러시아 소설』에서 카레르 자신은 무엇을 위해서 글을 쓰는가, 자신의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고민으로 완전히 빠져버렸다. 타인과의 적정 거리는 끝끝내 유지했지만, 자신이 써낸 소설과의 적정 거리는 유지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호수에 빠져버린 나르시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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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 - 이응준 연작소설집
이응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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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신체의 기능이 다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아니면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거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땅 위에서 사라지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매일 여럿이 죽고, 매일 죽어버린 여럿 이상의 숫자가 태어난다.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세계 인구로 75억이 넘는 숫자가 집계되어 있고,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다. (http://www.worldometers.info/world-population/) 대략 10년 전쯤 유행했던 숫자송의 가사 '6! 60억 지구에서 널 만난 건 7! 럭키야!'도 이제는 개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기왕이면 60억 지구뿐 아니라 7 럭키까지 모두 말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죽음은 흔한 일이지만, 실제로 마주하게 되는 죽음은 흔치 않은 일이 된다. 일반화시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세상에 대해, 신에 대해, 죽은 이에 대해, 그리고 죽은 이와 나 사이의 갈라져 버린 틈에 대해서. 이윽고 몹시 두려워진다.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이는 결국 죽은 이일뿐이다. 죽은 이는 과거형 안에 갇히게 되고, 나는 죽은 이가 갇혀버린 벽 옆에 머무른 채, 미래로 가야 하는데 한동안 떠나지 못한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모니터 속 Deaths this year에 일조한 내 대학 동기의 이야기다. 녀석이 왜 죽음을 결심했는지는 대략 짐작이 간다. 나는 녀석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요 몇 년간 계속해서 지켜봐왔고, 그것은 한 인간의 완벽한 몰락이었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비극이었다. 나의 질문은 녀석의 죽음 자체 보다는, '왜 나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는가?'로 기울어진다. 녀석은 3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내가 녀석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5월이었다. 부고는 유가족이 내게 남겨둔 SNS 메신저 메시지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OO이 자살을 했고, 딱히 연락할 만한 친구도 연락처도 없어서 이렇게 SNS로 메시지를 남긴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오래된 메시지는 확인과 동시에 증발해버렸고, 홀린 듯 클릭한 녀석의 SNS 페이지에는 녀석이 세상을 떠나던 날 작성한 마지막 게시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황당함에 눈물보다는 욕지기가 먼저 치밀어 올랐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생(生)보다는 마지막 가는 길을, 마지막 소주잔 한 잔을... 지금도 나를 제외한 대학 동기들은 녀석의 죽음을 모른다. 녀석에게는 친한 친구가 정말로 나 하나뿐이었던 모양이다. 다음 모임이 오면 동기들은 나에게 으레 질문할 것이다. 녀석은 요새 뭐하고 살고 있냐고. 그러면 나는 대체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녀석을 알게 된 건 대략 10년 전쯤으로 돌아간다. 신입생이던 녀석과 나는 둘 다 6, 06학번이었고, 시끌벅적한 모임에서는 언제나 말수가 많지 않았다. 이유 없는 친절도, 안부도 모두 부질없다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술자리에서 딱히 할 말이 없다 보니, 술잔만 계속 비우게 됐다. 내가 술을 잘 마신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처음 만난 사람들일 것이다. 실제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입에 술이라도 물고 있는 편이 나았다. 녀석은 그런 나의 기분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단 한 명이었다. 별다른 말 대신 그냥 같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남기는 항상 끝까지 남아있었다. 막차가 끊기면 나는 녀석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혼자 살기에는 적당히 넓고, 네모난 창문으로는 서늘한 외풍이 불어오는 방이었다. 녀석과 나는 신기하게도 그곳에서만큼은 서로에게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면 둘 다 지금쯤 친구가 백 명은 거뜬했겠다 싶을 정도로.


잠깐, 나는 지금 녀석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니 이야기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에 먼저 다다른다. 사실 시작은 이응준 작가의 신작 『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에 대한 작은 감상을 쓰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녀석의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이어가기로 한다.) 친구의 자살을 마주하게 된 내가 자살을 이야기하는 연작 소설집을 읽게 된 것, 그리고 그 소설집에 홀딱 빠져버린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겪고 공감할 수 있게 된 이야기에 쉬이 빠져들게 되어 있지 않던가? 심지어 명왕성의 이응준이니 말 다 했다. 문장은 냉소적이면서도 무겁고, 시(詩) 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지난한 문장을 무기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수록된 모든 이야기에 '자살(혹은 자살 충동)'이 등장하지만 결말은 예상을 조금씩 빗나간다. 불안정했던 주인공들은 타자의 죽음으로부터 질문을 시작하고 결국 새로운 생(生)의 국면을 맞이한다. 이미 죽은 이도 죽음을 고민하던 이도 모두 다시 태어난다. 나는 『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이라는 표제에서 '사랑'밑에 '죽음'을, '죽음'밑에 '추억'을 병기해두고 싶어졌다. 수록된 모든 소설을 읽고 나니, 나 또한 잠깐이나마 (녀석과 같이) 다시 한 번 태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고,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 후에 남는 건 질문뿐이다. 정해진 답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서,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된다. 나 역시 매일 질문하고 답변을 해나가는 중이다. 죽은 녀석이 갇혀있는 벽에서 한 발자국씩. 그렇게 점차 미래로 떠나갈 것이다. 6! 60억 지구가 75억이 된 것처럼, 그렇게 계속 늘어가는 것이 과연 7! 럭키한 일인지는 여전히 판단이 잘 서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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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494
서효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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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가 많은 지명과 그곳을 거쳐간 많은 사람들의 역사로 진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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